제128화
제128화
삼대 무관 비무대회.
마공서 회수.
징계위원회 소동.
쉴 새 없이 각종 사건 사고들이 몰아쳤어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오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늘 그렇듯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청명한 날씨가 찾아오는 법이고, 을씨년스러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훈풍이 부는 봄이 찾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사천무관 역시 그렇게 봄이…….
쿠당탕!
“이 개X끼가!”
그렇다.
그렇게 따뜻한 봄이 찾아올 리 없었다.
“쯧!”
신혁건은 짧게 혀를 찼다. 땅바닥을 몇 바퀴나 구른 황태가 잔뜩 열 받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온몸이 흙투성이인데다 먼지로 옷은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끄으윽.”
“나, 나 죽어.”
“……뭔 놈의 창이.”
겨우 일어서 있는 황태의 주변으로 8기수 생도들이 신음을 내뱉으며 널브러져 있었다.
“이게 바로 너희들과 나의 실력 차이다. 쿠헬헬헬.”
낄낄거리는 신혁건을 바라보는 황태의 두 눈이 황망함으로 물들어 갔다. 저토록 비아냥거리는 모습을 보면 열이 받지만, 그보다 더 크게 소용돌이치는 감정은 바로.
‘이렇게나 차이가 난다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물론 신혁건이 8기수 생도들 중에서 손꼽힐 정도로 강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널브러진 이들 중에는 진무양과 명진, 낭소소까지 포함돼 있었다. 8기수 중에 강한 열 명을 뽑으라고 하면 반드시 드는 이들.
고작 오십여 명밖에 안 되는 숫자라지만, 소수인 만큼 천무린에게 혹독하게 훈련을 받아 온 이들이 아니던가.
“영단을 혼자 두 개 먹었을 리도 없을 텐데.”
고개만 겨우 든 진무양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자, 귀를 쫑긋 세운 신혁건이 손사래를 쳤다.
“아서라. 천무린 그놈이 나에게 두 개나 줄 놈으로 보여?”
그건 그렇지.
“그럼 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수 있는 거지?”
“아니, 혁건이까진 어떻게 이해해 볼 법한데 말이야. 중요한 건.”
쿠당탕탕!
“끄으억!”
볼썽사납게 구르고 있는 남사익이 보였다. 남해태양궁의 소궁주이자 적화객이라는 별호까지 얻은 남사익이 아니던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띠고 있는 설화린이 보였다.
“앞으로 다시는 혼인 이야기 꺼내지 마요. 나보다 약하면.”
……음.
뭔가 화린이도 달라진 거 같은데.
“저것 봐. 화린이가 사익이를 저렇게 쉽사리 꺾는다는 게 말이 돼?”
“……비무대회 때만 해도 사익이가 이기지 않았나?”
“내 말이 그 말이야. 말이 안 되잖아.”
이제는 아예 관망하고 있는 진무양과 낭소소의 시선이 이어서 다른 곳으로 향했다.
푸드더더덕!
“꾸엑!”
비명을 내지르며 포탄처럼 뒤로 튕겨 나가 벽에 부딪힌 이는 다름 아닌 태강이었다.
“……태강아, 너무 게을렀던 거 같은데? 그동안 수련을 어떻게 했길래?”
날아간 태강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이는 송무까지.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지.
“착하게 말하면 폭력이 아닌 줄 아는 것 같은데, 송무는?”
“나쁜 뜻은 없었을 거야. 저 표정 좀 봐.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잖아.”
“그래서 더 나쁜 거야.”
그리고.
콰아앙!
휘리리릭!
검이 튕겨 날아가 그대로 땅바닥에 꽂혔다.
“하나같이 빈틈뿐이구나! 방만하였구나. 방만하였어. 쯧쯧.”
백리무영의 노호성에 고개를 숙인 백리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날아간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을 놓친 충격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지 손을 떨고 있었다.
“……이럴 수가.”
허망한 어조가 담긴 말이었지만, 많은 뜻이 내포돼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모든 생도들의 궁금증을 대변했다.
마음 편히 진행한 비무였다. 그저 단순한 비무였을 뿐이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변화는 생도들의 마음속에 크나큰 의문을 남겼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백리후는 심지어 무영이와 초접전까지 치르지 않았었나, 비무대회에서?”
“으응, 분명 그랬지.”
오죽하면 매화쌍절이라는 별호까지 얻었겠는가. 그런데 저렇게 압도적인 차이가 난다고?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모두가 침음을 흘리고 있는 와중에,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흠, 그러게?”
“저놈들이 훈련을 게을리한 거지, 뭘 어떻게 돼.”
“다 같이요?”
“…….”
8기수 생도들 중에 훈련을 게을리하는 이들은 이제 드물었다.
왜냐고?
「 내가 없다고 무관 내에 너희를 지켜보는 눈이 없을 줄 같아? 히히, 어디 한번 놀아 볼 테면 놀아 봐. 내가 무관 내에 있는 숙수, 미화원, 부교관, 장로들까지 다 털어서라도 너희 훈련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할 거니까. 후후후. 」
모골이 송연해지는 그놈(?)의 이야기가 8기수들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여 훈련을 안 했다가 들키는 날에는 뼈도 못 추릴 게 뻔한데 어느 누가 훈련을 게을리하겠는가.
거기다.
이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훈련하는 이들이었다. 비무대회 때부터 찾아온 각종 사건들은 그들을 잠시도 쉬게 두지 않았으며, 강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마저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 훈련에 매진했기에 이와 같은 결과에 더욱 허망함을 느끼는 이들이었다.
어째서 이렇게나 큰 차이가 생겨 버렸나.
무엇이 이렇게 만든 것인지.
“저, 저 X끼들…….”
태강이 거의 기다시피 하여 일행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으으으. 아파 죽겠네.”
“나도 턱이 얼얼해.”
“난 허리…….”
겨우 참았던 신음을 터뜨리며 하나둘 곡소리를 내면서 땅바닥에 철퍼덕 드러눕자, 그제야 황태를 제외하고 일어서 있는 이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아까 그 녀석이 비무를 꼭 펼치라고 한 이유가 뭘까?”
“그 인간은 수련 안 할까 봐 그렇게 말한 거 아니었을까?”
“아닌 것 같아요. 그 인간이 남기고 간 말이 조금 의미심장하긴 했어요.”
설화린이 골똘히 생각하며 천무린이 당백진에게 불려 갔을 당시를 떠올렸다.
「 나 없는 동안 비무를 해. 녀석들도 자극을 받아야지. 가끔은 이런 충격요법이 필요한 법이거든. 우물 안 개구리로 있으면 얼마나 헛똑똑이가 되는지 말이야. 」
“그런 말을 했다고?”
“충격요법? 우물 안 개구리? 그게 다 뭔 소리람.”
백리무영과 신혁건이 서로를 돌아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 알쏭달쏭한 가운데 설화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한 가지는 확실해요. 그 인간은 지금 우리 네 명과 다른 생도들의 차이를 인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응. 내 생각도 그래.”
송무가 그 말에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이라, 차이가 뭘까?”
“한 가지가 있지.”
“……한 가지?”
평소답지 않게 진중한 표정으로 자신의 창끝을 바라보던 신혁건이 무거운 얼굴을 했다.
「 혁건아,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마라. 늘 갈고닦되, 갈고닦은 실력을 너 안에 가둬 두지 말거라. 실전이다. 실전은 수련과 훈련만으로는 끌어 올릴 수 없는 힘을 갖고 있다. 」
……자신의 할아버지이자 신창(神槍)이라 불린 무인의 진언이었다. 실전. 결코 수련만으로는 체득할 수 없는 것을 얻게 해 주는 건 실전뿐이라고 누누이 말씀하셨던 신창의 이야기가 떠오른 신혁건이었다.
“파평. 비록 짧았지만, 우린 파평의 수하들과 검을 겨뤘고 생사결을 치렀어. 뿐만 아니라 절정 고수인 파평과 무린이가 싸우는 모습도 지켜봤고.”
그 말에 백리무영의 두 눈 역시 깊어졌다.
그것이 바로 차이를 낳은 이유였다.
천무린이 누누이 말하던 이야기 중 하나.
「 수련만으로 채워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반푼이 무인이 될 뿐이지. 그저 반푼이 따위로 살아갈래? 」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자신들을 향한 욕설이나 비난으로만 여겼지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끄으으, 얼마나 쥐어팬 거야.”
“무린이 때보다 더 많이 맞은 것 같기도 하고.”
“나가서 뭔 일을 겪고 온 거야. 씨X럴.”
널브러진 이들이 하나둘씩 보였다. 동기들이 신음하는데, 그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신혁건이었다.
짧았던 순간이, 찰나라고 느낄 만큼 짧은 순간이 이와 같은 큰 변화로 찾아왔다.
「 실전을 방불케 하는 수련? 다 개소리지. 실전을 방불케 하는 수련 따위가 어딨어? 까딱하면 삶과 이별해야 하는 순간을 비무 따위로 겪을 수 있을 것 같아? 」
그랬다. 달랐다.
짧은 경험이었지만, 대번에 느낄 만큼 확실한 경험이었으니 말이다.
헛소리로만 치부했던 천무린의 이야기가 그제야 송무와 설화린, 신혁건과 백리무영의 가슴속에 다시금 깊이 새겨졌다.
“……참 우습죠?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패려고 막 갖다 붙인 이야기 같았는데, 막상 겪고 보니 하나도 틀린 말이 없다는 게 말이에요.”
설화린의 말마따나 천무린이 던진 이야기 중 헛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송무와 신혁건, 백리무영이 공감하며 천무린이 여태껏 했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 죽어! 죽어, 이 새X야! 으휴! 쓸모도 없는 새X들! 」
「 낄낄, 나였으면 접싯물에 코 박고 죽었을 텐데! 살아서 뭐 해!」
……어?
이게 무슨 기억이지.
「 잠? 잠을 왜 자? 죽어서 자는 거야, 이 새X들아! 」
「 아오, 요즘은 왜 깝치는 새X들이 없는 거야. 좀이 쑤셔 죽겠네. 쥐어패야 직성이 풀릴 텐데. 」
……흠.
헛소리가 없긴 개뿔!
으득.
이가 으드득 갈렸다.
아직도 당한 걸 생각하면!
“어쨌거나 실전이 중요하다는 게 이번에 느낀 깨달음이네요.”
설화린의 말에 신혁건의 눈이 빛났다. 번뜩이는 눈빛은 흡사 매의 그것과 같았다.
“그런데 억울하지 않아?”
“네? 뭐가요?”
“우리만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는 게.”
“…….”
저벅, 저벅.
신혁건의 말에 백리무영과 송무가 연무장에 있는 목검을 새 걸로 가져왔다. 다들 버젓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누군가를 쏙 빼닮은 모습으로…….
“알려 주자고. 좋은 건 같이 나누는 게 동료애 아니겠어?”
“혁건이가 간만에 옳은 말을 하는군. 나도 좋은 생각이라고 느낀다.”
“응, 맞아. 왠지 그렇게 움직여야 될 것 같지?”
세 남자가 씨익 입가를 말아 올렸다. 그 모습에 설화린은 아연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막으려다가…….
“서, 설 낭자, 나는 절대 낭자와의 혼인을 포기하지 않을…….”
남사익의 애절한 목소리에 설화린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어 목검을 쥐었다.
꽈드득.
막긴 뭘 막아?
깨달음. 그래, 알려 줘야지. 그게 진짜 동기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