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제16화
질문을 했던 여후보생의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 있던 이슬은 결국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무슨 과제인지 모른 채 조장이 없다고 나불거리는 너, 그런 33번과 제대로 소통도 하지 않고 이야기도 나누지 않은 조 전체. 모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된다. 그래서 9번, 33번, 41번, 44번 후보생 모두 벌점. 앞으로 조별 과제를 진행할지 말지는 남은 조원들끼리 결정하고 내일까지 부교관에게 말하도록.”
칼같이 끊어 버린 악교운의 말에 모두가 마른침만 꼴깍꼴깍 넘길 뿐이었다.
“다들 착각하지 말도록. 후보생은 후보생. 무관 생활의 진면목은 생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너희는 말 그대로 후보에 불과하다. 너희가 없더라도 무관은 잘도 돌아간단 말이지.”
마지막까지 모두에게 쐐기를 박은 그는 부교관들과 함께 연무장에서 사라졌다.
내일 오전에 늦지 말라는 말과 함께.
하여간.
저, 저, 저 성격 하나는 정말 내 과거의 모습 못지않게 더럽다.
문득 돌이켜 보니, 내 밑에 있던 놈들도 꽤나 고생했을 것 같단 생각이…….
아무튼 그 탓에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후보생들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흩어졌다.
“무린아!”
“그렇게 크게 부르지 않아도 다 들려, 인마.”
진짜다.
내공으로 귀를 보호하지 않으면 귀가 터질 것처럼 목청이 좋은 녀석이 뛰어와서 내 온몸을 살폈다.
“정말이야? 정말?”
“뭐가?”
“칠 주야 동안 너의 그 괴랄한 단련법으로 지금 남해태양궁의 무공을 이겨 낸 거냐고!”
괴랄? 허, 아직 정신 못 차렸네. 이거.
소림사의 방장이 보면, 기절하고 까무러칠지도 모르는데.
자기들의 비전이 어디에서 굴러먹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기가 막혀 피를 토할지도 모를 광경이니까.
“보고도 모르냐?”
“아니……. 그래도 남해태양궁의 열양장인데…….”
힐끗.
실려 가는 남사익을 바라봤다. 흠씬 두들겨 맞은 녀석이긴 했지만, 열양장의 화기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계속 열기에 노출되었다면 되레 내가 실려 갔겠지.
“근데 옷은 좀 갈아입어야겠어, 무린아.”
“뭐? 왜?”
“누가 보면 네가 열양장에 옷 다 탄 줄 알겠어.”
괜히 으슬으슬 추운 게 아니었나.
이 정도면 옷이 제 역할을 못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남들 눈에 민폐를 끼치는 수준이었다.
“…….”
입맛을 다시는 가운데,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가 분위기를 후벼 팠다.
“어떻게 된 거죠?”
설화린이었다.
“보고도 모르냐? 진짜 다들 나 괴롭히고 싶어 안달이 났네. 언제는 싸우라고 등 떠밀더니 이젠 눈앞에 결과가 안 믿겨서 묻는 거냐?”
입 아프다, 이젠.
내 말에 설화린의 입이 꾹 닫혔다. 그러나 내게서 의심을 지우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제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X랄.
“당연히 등 안 떠밀었겠지. 그놈이 너한테 푹 빠져 가지고 혼자서 나댄 거지.”
“…….”
샐쭉해진 표정으로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듯했다.
“근데 정말 너는 잘못 없다고? 말리긴 해 봤냐?”
그럴 리가.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혹시나 남사익이 이긴다면.
힐끔.
천무린의 팔뚝에 매어 있는 저 노란 띠는 자신에게 있었을 테니까.
“내가 원래 조장 같은 거 할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
설화린이 고갤 들어 나를 본다.
“원래 같았으면 네가 하든 내가 하든 크게 신경도 안 썼을 텐데 말이야. 근데 좀 괘씸하더라고.”
“괘씸……?”
“자기 약혼자 등 뒤에 숨어서 조장 자리 얻어서 점수나 따려는 네 심보나 네 녀석 앞에서 헛짓거리 하는 그놈이나 아주 날 가지고 장단 맞추라고 난리를 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쳇, 평소보다 말을 많이 했다. 말하고 나니 창피했다.
에이 씨.
괜히 애X끼들한테 발끈해 가지고.
그렇게 말하곤 나는 몸을 돌리려다가 설화린의 시선이 묘하게 내 위아래를 향하는 것을 보곤.
나도 모르게 양손이 가슴팍과 허리춤 아래로 내려갔다.
“나 참, 그렇게 노골적으로 볼 건 뭐야?”
“뭐, 뭐라고요!”
내 과장된 몸짓에 설화린의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아니, 암만 그래도 남정네 속살을 그렇게 훔쳐보면 쓰냐고?”
“정말 미친 거 아니에요! 제가 그쪽 소, 속살을 왜 봐요!”
그 반응에 좀 더 곯려 주고 싶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었다.
내일이 되기 전에 옷도 새로 배급받아야 하고, 오늘 남가 놈이랑 붙으면서 느낀 부족한 초식들도 가다듬어야 했으니까.
“아무튼 내일 보자고.”
몇몇 녀석들이 내 무용담을 들으려고 다가오는 게 느껴졌지만, 난 재빨리 연무장을 벗어났다.
악교운은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고갤 돌려 눈앞에 보이는 부교관에게 다가갔다.
“부교관님, 옷을 새로 배급 받고 싶습니다.”
“옷을?”
부교관의 시선이 내 상하의로 향했다. 표정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그래, 심각해 보이는군. 그렇다고 해도 충분한 여벌을 지급했을 텐데?”
그거야 당연하겠지만.
“제 이전의 몸을 알지 않으십니까.”
불과 몇 개월 전의 내 몸은 200근도 넘는 몸뚱어리였다.
여벌의 옷이 하등 쓸모없었다.
“아……. 그랬지. 참.”
납득이 간다는 표정을 지은 부교관은 품속에서 종이를 꺼내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군수관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당연히 모른다.
눈뜨고 살기 위해 살을 뺐고, 계속 수업을 받고 각종 훈련에다 개인 단련까지 집중했으니까.
그래도.
“알고 있습니다. 전에 한 번 가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군수관은 후보생들이 이용할 수 없는 공간에 있다. 즉, 합법적으로 생도들이 생활하고 있는 본청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이자, 몰래 훔쳐볼 수 있는 순간이며 자연스레 관찰할 수 있는 짧은 시간인 셈이다.
한참 나를 바라보던 부교관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군. 좋다. 허가증을 내줄 테니 동문을 통해 사천무관 본관 통로를 이용해 군수관에 들렀다 오도록. 딴 길로 새면 안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겠지? 혹여 괜스레…….”
방금 쓴 종이를 쭉 찢어 내게 건네주며, 말이 길어지려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나는 대번에 부교관의 말을 자르고 허가증을 낚아채듯 품속에 넣고 재빨리 움직였다.
따라오려던 송무는 징계 먹을 거냐는 내 대답에 그만 시무룩해져서는 숙소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자유다.
발걸음이 꽤나 가벼웠다.
사천무관의 크기가 무려 3천 평도 넘는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는데, 사천무관에는 군수품을 담당하는 군수 담당관이 따로 존재했다.
생도들이 되기 전 후보생들에게는 제약이 무수히 많았다.
송무에게 들은 설명을 바탕으로 나는 움직였고, 본관 통로를 지키고 있는 호위 교관들에게 허가증을 보여 줬다.
“통과. 허가증대로 한 시진 내로 모든 일을 마치고 복귀할 수 있도록 하라. 8기 17번 후보생.”
“예.”
그렇게 본관 통로를 통과하는데.
“얼레? 8기?”
웬 창을 들고 지나가던 놈이 걸레짝이 된 내 무복에 쓰인 ‘팔(八)’이라는 숫자를 보고는 무척이나 반갑게 다가왔다.
“8기에 이렇게 잘생긴 놈이 있었나? 흐음, 아니 옷은 왜 이래? 뭐, 상관없지. 아무튼 반갑다.”
뜬금없이? 말 많네.
대뜸 다가와서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한 소리 하려는 내게 불쑥 손을 내밀더니 씩 웃는 녀석.
“나도 8기야. 신혁건.”
* * *
“신경 쓰이는 거야?”
“무슨 신경?”
딱딱하게 대답하는 백리후의 모습에 쿡쿡 웃는 진무양이었다.
평소보다 한껏 굳어진 표정을 한 백리후의 반응은 진무양에게도 생소했다.
물론 그의 표정을 이토록 굳어지게 만든 이유도 알고 있었다.
“화산파에서 나름 주목받는 백리후가 뭐가 그리 신경이 쓰일까나?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때문일까.”
“그럴 리가.”
짧게 대답한 백리후의 시선이 화제의 주인공에게 와 닿았다.
천무린.
이름 석 자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존재감이 없던 녀석.
그런데.
황태를 꺾으며 군소 방파 소속의 중심이 되었다.
갑작스레 뛰어난 실력을 드러내고, 금세 후보생들의 머릿속에 묵직하게 자리 잡았다.
자신마저도 그 전까지의 천무린의 모든 행동이 연기라고 판단될 만큼.
그리고 이제는 남사익까지 꺾으며 확실하게 자리매김하였다.
이제는 자신의 자리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비록 과거의 성적과 평가로 인해 제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결코 자신을 꺾을 수 없음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먼저 생도가 된 같은 화산파의 누구처럼 신경에 자꾸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짧게 부정하는 백리후의 말에 진무양뿐만 아니라 낭소소, 명진까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북해빙궁의 금지옥엽과 함께 있는 천둥벌거숭이를 바라봤다.
“환골탈태(換骨奪胎)라도 한 건지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확 달라졌어.”
“뭐, 제법 깨우친 게 있는 모양이지.”
진무양과 명진, 이 두 사람의 말에 낭소소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살 빠지고 좀 잘생겨지기도 했지?”
휙.
그 말에 세 사람이 낭소소를 노려보자, 그녀의 귀가 새빨갛게 익었다. 눈초리가 가늘어진 두 쌍의 눈빛에 헛기침을 한 그녀는 손사래를 쳤다.
“에이, 뭐 그냥 그렇다고.”
손을 휘휘 내저으며 자신의 조로 돌아가는 낭소소와 그녀를 바라보는 이들이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낭소소의 말에 살짝 빈정상한 듯한 명진이 입가를 비틀었다.
“뭐 어찌 됐든, 하등한 문파 소속의 존재가 겁대가리 없이 올라오는 건 좀 그렇지.”
명진의 말에 백리후와 진무양이 서로를 바라봤다.
“어쩌려고?”
“아직 시간은 많지. 그렇다는 건 기회도 많다는 뜻이고.”
“긁어 부스럼 만드는 건 좋은 생각이 아냐. 명진.”
“그냥 너희는 나만 믿고 따라와.”
두꺼운 가슴 근육을 팡팡 때리는 명진이었다.
* * *
“허! 하? 뭐?”
정말 어이가 없다 못해 화가 났다.
“약혼자 등 뒤에 숨어? 누가?”
늘 조신하고, 여인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해 엄격하게 가르침을 받아 왔던 설화린은 자신의 감정을 좀처럼 드러낸 적이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그녀가 익히 알고 있던 말투 중에 가장 험한 말을 내뱉었다.
“이…… 이……! 나쁜 놈! 내가 말리지도 않았다고? 정말 나쁜 놈!”
씩씩거리는 그녀는 난생처음 받아 보는 홀대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북해빙궁의 금지옥엽.
중원 무림에서는 북해빙궁주의 딸이자 빙화(氷花)로 불리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사천무관이라 해서 받는 대접이 다르겠는가.
후보생, 생도들을 넘어 교관들까지 그녀에겐 상당수가 호의를 보였다.
그게 배경이든, 외모든.
그렇게 다 가지며 살아왔는데, 눈앞에 보이는 녀석은 죄다 반대였다.
자신의 외모에 혹하지도 않고.
자신의 뒷배경에 혹해 잘 보이려는 노력은 무슨.
되레 자신이 가져가야 할 조장 자리까지 뺏어 가질 않나. 구박하다 못해 싸늘한 반응까지 보인다.
“……화린이는 정말 욕을 못 하는구나?”
“그러게 말이죠.”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송무와 태강의 말이 더 비수로 꽂히는 건 착각이었을까.
이가 갈렸지만, 그 와중에 넝마가 된 천무린의 탄탄한 근육이 왜 다시 머릿속에 떠오를까.
혹여 자신의 생각을 읽을까 봐 후다닥 자리를 벗어나는 설화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