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삼지행(三志行) (3)
거인의 이마에 빛무리가 맺히자마자, 준혁의 몸 안에서 반응이 왔다.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는 모르지만, 삼대지력이 하나 된 그 힘은 마치 식검이 마선을 만났을 때처럼 밖으로 튀어 나가려 요동쳤다.
그래서 준혁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인의 이마에서 쏘아진 힘이 삼대지력이 하나 된 힘과 같다는 것을.
‘위험하다!’
그 순간, 준혁의 직감이 마치 미래를 보여주듯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계산해 냈다.
삼대지력이 하나 된 힘은 셋 중 어떤 힘으로든 변화할 수 있었고, 만약 그 힘이 성광지력으로 변해 버린다면?
지금도 승산이 없다고 말했던 중괴가 동급 이상의 성광지력을 정면으로 맞이한다면 과연 살 수 있을까?
필사(必死)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랬기에 준혁은 중괴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앞을 가로막는 순간, 적마도를 그의 몸 안에 찔러 넣었다.
계산을 마치자마자 거의 본능적으로 행한 것이었다.
아무리 준혁이 도움을 준다 해도, 수사 본인이 적마도를 사용해야 능력을 십분 사용할 가능성이 높을 텐데,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기에 강제로 중괴의 몸 안에 적마도를 쑤셔 넣은 것이었다.
적마도와 중괴가 직접적으로 반응하며 순간이동 능력이 온전히 발휘되도록.
그리고 다행히 계산대로 적마도가 발동되자, 중괴의 모든 힘이 흩어지며 그가 비경 밖으로 사라졌다.
‘휴, 성공인가.’
중괴가 정확히 어떤 의도로 자신을 돕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그저 순수한 호기심이 아닐 거란 건 준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에게 계속해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었고,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미 몇 번이나 죽었을 거란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준혁은 본인이 위험해질 가능성을 예상했지만, 그럼에도 중괴를 살리려 행동했던 것이었다.
분명 한순간만 망설였어도 중괴는 성광지력에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을 것이 틀림없었으니까.
‘으윽’
직후, 중괴가 사라지며 처음에 느꼈던 압력이 온몸을 짓눌렀다.
하지만, 4대 종문의 수사들이 영역으로 서로를 보호하기 때문이었는지, 거인이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꼼짝도 할 수 없을 정돈 아니었다.
준혁은 이미 면전까지 다가온 빛무리를 보며 적마도를 재소환해서 발동하는 건 불가능이라 여기고는 재빨리 삼대지력을 움직였다.
지잉-
그 순간, 귀원패의 존재감이 옅어지면서, 은색과 푸른색이 은은하게 번지는 육각 타일의 보호막이 준혁을 덮었다.
사실, 준혁이 서슴없이 행동했던 데는 하나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거인의 이마에서 빛무리를 본 순간, 그것이 중괴를 녹여버릴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수행으로 비교하자면 거인의 발톱만도 못한 자신이, 오히려 중괴보다는 살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런 준혁의 예상이 정확했다는 듯.
쏴아아-
공격성이 다분했던 빛무리는 삼대지력으로 감싸인 준혁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고 지나쳐 버렸다.
오히려 빛무리에 직격당한 순간, 준혁은 이유 모를 벅차오름에 희열을 느껴야 했다.
‘아아아….’
그것은 삼대지력이 하나 된 힘의 근원을 엿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이유 모를 희열이 깨달음으로 변해갔다.
‘그저 다른 힘으로 치환되는 게 다가 아니었구나! 이 힘이 거인족의 근본이었어! 삼대지력이 아닌 이 힘이!’
천혈에서 수많은 혈맥이 파생되고, 마선기가 수많은 마선으로 분화했듯.
삼대지력이 하나 된 힘이 삼대지력으로 나뉘고, 그것이 수많은 공법과 술법의 시초가 되어 퍼진 것이었다.
그 순간 준혁은 뇌리를 강타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만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면, 무조건적인 우위에 설 수 있다.’
영수족처럼 신체를 단련하는 종족에겐 모르겠지만, 술법과 공법으로 자연에 존재하는 원소를 운용하는 수도자들에겐 압도적인 우위에 서는 게 가능할 듯싶었다.
그 생각에 빛무리가 옅어지면서 거인이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움직인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준혁은 항거할 수 없는 힘에 당한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그래야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
"저, 저런 짓을!"
"중력괴가 당했습니다!"
거인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밀려났던 태청문 부문주는 연이어 이어진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거인을 처리한 뒤에 가장 골칫거리라 여겼던 중력괴가 빛무리 공격과 동시에 동료의 배신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상황이 왜 연출된 건지 생각할 틈도 없었다.
쿠아앙-
"피해야 합니다!!"
중력괴를 녹여버린 거인은 그의 등 뒤에 숨어 있던 인족 꼬맹이 하나를 예의 주시하는가 싶더니 금세 공격 방향을 바꿨다.
거대한 눈으로 주변을 훑더니 세 번째 눈인 이마의 눈으로 영기가 맹렬히 모여들었다.
쿠오오오-
그 순간, 은푸른 빛무리가 주변을 덮었고, 공동 내부가 순식간에 절대 영도에 도달했다.
마치 세상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게 얼어버렸다.
쩌저정-
"모두 공격을 멈추고 스스로를 보호하시오! 월광지력입니다!"
태청문 부문주는 우연히 경험한 적 있던 월광지력의 한기에 소름이 돋아 재빨리 영역을 극도로 압축했다. 분신은 해제해 버렸고, 오직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젠장할! 냉기의 시험은 끝난 게 아니었습니까?!"
그를 제외한 나머지도 급히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가장 수행이 떨어지던 오검문의 여인과 자휴궁의 남수사 한 명은 미처 한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쉬이잉-
그리고는 얼어버린 몸뚱이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듯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퍼걱-
잠시 후, 자유낙하를 끝낸 두 사람은 바닥에 부딪힌 충격을 이기지 못한 채 산산조각이 나 비산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진정한 거신체의 월광지력이란 말인가? 생각보다 더하지 않은가?"
악명높은 삼대지력에 당한 두 명은 몸이 부서진 것만 아니라 원영조차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 모습에 침음을 흘리던 태청문 부문주는 급하게 정신을 차리고는 외쳤다.
"다들 모여야 하오! 아까와는 상황이 다르니 한곳에 모여 대항해야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모두 한곳에 모여 대항해야 합니다! 분명 이런 공격이 계속해 이어질 리는 없는 법! 시련이 강해진다는 말은 끝이 보인단 뜻입니다!"
또 다른 수사 역시 외침에 호응해 동의했고, 직후 사방에 흩어져 있던 수사들이 급히 움직였다.
두 사람의 말대로 남은 자들이 힘을 합쳐 월광지력에 대비해야 함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모이기도 전.
화아아악!
거인의 이마에서 다시 빛무리가 쏟아져 나왔고, 이번엔 한기가 아닌 열기였다.
마치 태양을 마주한 것 같은 열기가 주변을 태우기 시작했다.
동시에 공동을 가득 뒤덮고 있던 월광지력의 하얀 서리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수증기로 변하며 온도를 가속화시켰다.
"으아아악!"
"도, 도와주십시오!!"
내부는 삽시간에 극렬지옥이라도 된 것처럼 불타오르고, 수사들은 방어 수단을 마련하기도 전 불타버렸다.
"이, 이게 진정한 시험이었단 말인가? 그럼 아까까지의 그것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몸이 괴사하는 현상만 이겨낸다면 보물에 닿을 수 있다고 여겼던 태청문 부문주는 곁에서 한 줌 잿더미가 돼버린 사손뻘 제자를 보고 분노를 터트렸다.
하지만 그 분노마저 이른 감이 있었다.
잠시 후, 거인이 행동을 멈추자, 열기가 조금씩 가라앉았고, 그때부터 남은 수사들은 다시 한번 몸이 괴사하는 현상을 겪어야만 했다.
"서, 설마? 이것이 계속 반복된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으로 몸의 저항력이 떨어지고 수사들이 혼란해진 그 순간.
지이잉- 쩌저정-
거인의 이마가 또 한 번 번쩍 빛나더니 절대 영도를 지닌 월광지력이 다시 한번 주변을 뒤덮었다.
그 후 또 한 번 태양지력으로 변화하며 모든 걸 불태우고 나자, 공동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푸른빛과 은색으로 빛나는 육각 타일의 원구만이 드넓은 공동에 홀로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
준혁이 육각 타일 보호막 안에서 삼대지력의 황홀감에 빠져 있는 사이, 주변은 어느새 적막과 고요가 내려앉았다.
오직 거대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거인만이 무심한 눈으로 준혁이 자리한 곳을 내려볼 뿐이었다.
특이한 게 있다면, 4대 종문의 수사들이 불타 없어진 자리였다.
그곳엔 시체나 원영의 흔적 따윈 없었지만, 수사들이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의심되는 영기.
수사가 죽고 나면 세상으로 자연스럽게 흩어졌어야 할 기운만이 안개처럼 뭉쳐 존재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그때, 아무도 없는 공동에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하얀 얼굴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몸이 유체라도 되는 듯 공동의 벽면에서 걸어 나온 사내는 하얀 얼굴과 어울리지 않은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미남자였다.
사내는 거인의 존재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더니, 준혁이 자리한 육각 타일 보호막 앞에까지 이동했다.
그리고는 손뼉을 가볍게 치자, 거인이 먼지 흩어지듯 사라져 버렸다.
"이 얼마나 오랜 기다림이었단 말인가."
거인이 사라진 후. 보호구를 한동안 내려보던 사내가 황홀감에 젖은 듯 아련한 눈빛을 했다.
"하등한 인족들 중에선 영원히 우리를 전승할 이가 나오지 않을 줄 알았더니. 이렇게 완벽하게 나타나다니."
사내는 손을 뻗어 육각 타일 보호막을 쓰다듬었다.
"응? 이건 마선기인가? 쯧, 삼지행(三志行)을 깨닫고도 왜 이리 연약한가 했더니 천혈족의 쓰레기 같은 힘을 사용해서였구나."
사내는 불만이듯 혀를 차더니 손을 가볍게 저었다.
보호막을 이루는 마선기로 이루어진 힘. 그따위 것은 뽑아내 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오호? 내 힘을 거부해?"
하지만 자신이 의도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지 깜짝 놀라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귀원패가 만들어낸 육각 타일 위에 손을 올린 채 있더니, 시간이 지나자 감탄을 터트렸다.
"오호라. 대단하구나! 대단해! 이런 생각을 하다니! 삼지행으로 천혈족의 능력을 사용하다니 노괴들이 들었다면 말이 되냐고 펄쩍 뛰었겠어."
삼지행을 깨달은 최초의 인족은 보기보다 뛰어난 물건이었다.
지금껏 누구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 삼대지력의 근원에 도달한 것도 모자라, 그 힘으로 천혈족이 뿌려놓은 힘마저 조종할 수 있다니.
"역시 인고는 쓰지만, 열매는 달다 했던가?"
천혈족과의 전쟁 이후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를 기간.
그 기나긴 시간이 흐른 뒤 찾아온 손님은 너무나 마음에 드는 선물이었다.
잠시 후, 사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가볍게 마주치자,
챠르르륵-
공동이 다시 재구성되며 변화를 일으켰다.
각 관문마다 이어져 있던 통로가 다시 생겨나며 각각의 석실로 분리되었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마지막 관문 역시 크기가 줄어들면서 파괴의 흔적들이 깔끔히 자취를 감추었다.
깨끗해진 환경에 만족한 듯, 사내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인족 꼬맹이가 자리한 보호막을 톡톡 건드렸다.
"그럼 잘 익으렴. 네 덕분에 드디어 나도 세상 구경을 할 수 있을 듯싶으니…. 혹여나 네 후손이 있다면 우리 거신족의 영광을 재현함에 같이할 수 있도록 해주마."
그러자 공동 곳곳에서 한기와 냉기, 그리고 둘과 섞이지 않은 기운이 공동 중앙의 보호막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사내는 그 현상에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네 몸 안에 삼지행이 너무 약해 내가 들어갈 순 없지만, 천 년 정도면 나와 하나 되기에 충분하겠지."
잠시 후, 육각 타일 보호구에 작별 인사를 해준 사내는 다시 공동의 벽면으로 다가가더니 그 안으로 흡수되듯 쑤욱 사라져버렸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였지만, 사내는 미약한 잔혼만이 남은 상태.
완벽한 신체를 기다려왔지만, 눈앞의 먹이가 완전히 익기까지 기다리기에는 너무 약한 상태였다.
그러니 적절한 조치만 해놓은 뒤, 다시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가 사라지자, 안개처럼 남아있던 4대 종문 수사들의 기운이 천천히 공동의 벽면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자는 것은 자는 것이고, 사내는 오랫동안 이런 방식으로 영력을 보충해오고 있었다.
스르륵-
하지만, 사내가 상상이나 했을까?
오랜만에 찾아온 맛있는 영력을 욕심내는 다른 이가 있다는 것을?
사내가 다시 기나긴 잠자리에 든 그 시각.
은푸른 육각 타일 아래로 금빛 실들이 사방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마치 공동에서 보내주는 삼대지력으로는 배가 차지 않는다는 듯, 먹이를 낚아채기 위한 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