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삼지행(三志行) (2)
삼대지력은 생명체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는 하나, 어떤 방식으로든 사용할 수 있는 힘이었다.
소화여의 예만 보아도, 스스로 태양지력을 만드는 사람도 존재했고 말이다.
하지만, 성광지력은 아니었다.
특히 마선에게 치명적인 그 힘을 마선이 다루다니?
중괴는 가면이 깨진 것처럼,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우연히 얻은 작은 힘에 불과합니다. 식아에게 영향을 줄 정돈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실은 달랐지만, 괜한 오해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준혁이 사실을 축소해 전달했다.
중괴는 조금 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이번엔 전음으로 말을 전했다.
-그렇다 한들, 허…. 양이 중요한 게 아님을 모르느냐? 그럼 네 녀석은 월광지력에 성광지력까지, 설마 태양지력도 다룰 수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겠습니까? 그랬다면 화여 수사를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됐을 텐데. 생각해 보니 한 번 시도해볼 걸 그랬습니다.
준혁이 너스레를 떨며 입맛을 다시자, 중괴는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또 한 번 육성을 내었다.
"미친놈…. 역시 내 예상이 맞…."
하지만 친근한 욕설을 제외하곤 그 소리가 너무 작아 준혁의 초감각에도 걸리지 않았다.
-방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아니다. 그냥 혼잣말이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헌데 어떤 실험을 해본다는 것이냐?
어느새 중괴의 표정은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살짝 상기돼 있었다.
준혁은 그것이 거인족의 유적에 남겨진 힘에 대한 갈망 때문이라 여겼지만, 진실한 이유는 중괴만이 알 터였다.
-제가 가진 성광지력이 저 괴이한 저주의 해답이 되는지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다음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중괴 역시 바로 알아먹었다.
만약 준혁이 가진 힘이 마지막 관문에 통하는지만 알아낸다면, 후일 다시 찾아와 유적의 힘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흠, 그럼 잠시만 기다리거라, 혹시 모르니 빠르게 탈출할 준비는 해놔야지.
중괴의 동의를 얻은 준혁은 그가 술법을 준비하는 동안 어떤 방식을 사용할까 고민했다.
그러다 중괴에게서 신호가 떨어지자 통로 끝자락까지 이동해 성광지력을 목족의 공법을 이용해 꽃잎처럼 만들어 날려 보냈다.
팔랑~
손톱만 한 꽃잎은 요동치는 대기를 파도 타듯 날아갔다.
4대 종문의 수사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쳤는지, 공동안에 새하얀 꽃잎 한 장이 날아듦에도 아무도 신경 쓰지 못했다.
잠시 후, 하늘거리며 바람인 듯 먼지인 듯 날아간 꽃잎이 가장 가까이 있던 오검문 여수사 곁으로 날아갔고, 여수사를 공격하기 위해 후방에서 달려들던 석인의 어깨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그 순간, 무식한 주먹을 휘두르던 석인이 고장 난 것처럼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공동 전체의 석인들 역시 제자리에 멈춰 섰고, 몇 호흡 하기도 전 푸스슥 소리를 내며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다.
‘효과가 있구나! 헌데 이건 예상과 너무 다른데?’
준혁은 힘이 통하는지 알아보고 싶었던 거지, 상황을 해결하고 싶은 생각은 아니었던지라 당황하고 말았다.
이렇게 된다면 관망이 아닌, 4대 종문과 유적의 보상을 놓고 다퉈야 할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준혁의 걱정은 1초도 가질 못했다.
잠시 후, 공동 전체가 격렬하게 진동하더니 위엄 가득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증명되었다!
그리고는 목소리와 함께 끝이 보이지 않았던 천장에서 무언가가 엄청난 중압감과 함께 떨어져 내렸다.
쿠웅!!
‘저게 거인족?’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수십 미터에 이르는 인간.
정확히 말하면 실체를 가진 환영처럼 보였다.
흔히 인족이라 부르는 종족 특성을 그대로 재현한 듯. 거인족은 사람의 확대판 같은 모습이었다.
딱하나 다른 게 있다면 눈이 두 개가 아닌 세 개였는데, 그마저도 이마에 위치한 눈은 감겨있어서 크게 티가 나진 않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아니 누가 어떻게 한 겁니까?"
석인들이 사라지고 진정한 거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좌중에 혼란이 그득했다.
거인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던 묘존청 수사들과 자휴궁 수사들이 놀라 달아났고, 태청문과 오검문의 수사들은 조금 늦게 움직였지만, 오히려 빠르게 공동의 벽면 가까이 이동했다.
그때, 거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인의 손이 향한 곳은 준혁이 숨어 있던 통로 끝자락이었다.
***
쇄애애액-
갑작스러운 거인의 공격에 준혁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외부로부터 쏟아지는 압력이 그가 상상하는 수준을 넘어있었기에 마치 몸이 대기라는 틀 안에 갇혀버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거인의 손이 준혁에게 닿기 전.
"반전하라!!"
중괴의 목소리와 함께, 다가오던 거인의 손이 방향을 바꿔 옆으로 비껴갔다.
콰앙!
목표를 잃은 거인의 손이 통로의 벽면을 강타하자, 중괴가 번개처럼 날아와 준혁의 뒷덜미를 낚아채 몸을 날렸다.
"어마무시하고만, 겨우 이 정도 간섭이라니!"
조금 전 거인의 공격에 맞선 중괴의 방어.
그가 의도한 것은 중력을 이용해 거인의 주먹을 날아오던 반대 방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인의 능력과 힘이 일부 상쇄되며 겨우 주먹의 방향을 트는 데 그치고 만 것이었다.
"누구냐!? 누가 숨어 있었다니!"
"중력괴!!"
"아니! 중력괴 선사! 언제부터 숨어 있었던 것이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을 확인한 4대 종문 수사들의 외침을 뒤로한 채, 중괴와 준혁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통로를 빠져나가기도 전.
촤르르륵-
석실과 통로로 연결돼있던 구조물이 사방으로 밀려나기 시작하면서 마지막 공동이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도가 얼마나 빨랐던지, 중괴가 미리 준비해둔 비책을 사용하기도 전 주변의 모든 석실이 통합되며 하나의 거대한 공동으로 변해버렸다.
"세상에나!"
여기저기서 놀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때, 준혁을 놓친 거인이 몸을 바로 하자, 수십 미터에 달하던 몸체가 더욱더 커지기 시작했다.
"허, 저게 고서에서만 보던 거신체구나!"
중괴는 그 모습에 호기심을 드러냈다가, 자신의 처지가 떠올랐는지, 겨우 움직이기 시작한 준혁을 닦달했다.
"애송아, 빨리 적마의 능력을 사용하거라. 저 거인. 소싯적의 나보다 강하다."
‘소싯적? 어릴 때를 말한 건 아닐 테고? 천신라에게 눈을 빼앗기기 전을 말하는 건가?’
예전부터 그가 빼앗겼다던 눈이 어떤 용도인지 궁금했던 준혁은 불현듯 그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상념은 떠오를 때보다 더 빠르게 사라졌다.
거의 팔십 미터가 넘게 커져 버린 거인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같이 나갈 순 없습니다. 어르신이 먼저 나가시면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무슨 소리냐?! 내가 없으면 네놈은 움직이지도 못할, 이익! 막아서라!"
석실이 통합돼 도망갈 곳도 사라져 버린 상태.
거문에 적힌 것처럼 첫 번째 석실로 이동해 조용히 나가는 것도 불가능해진 상태여서인지 중괴의 말엔 조금의 불안과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짜증을 끝까지 표출하기도 전, 어느새 가까워진 거인의 손에 위험을 감지한 중괴가 한 손을 뻗으며 외치자, 주변 대기가 요동치며 세상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지직- 쿠우웅-
동시에 중괴의 곁으로 그와 똑같이 생긴 분신 네 명이 나타나더니 빛살처럼 거인을 향해 날아갔다.
"그게 아닙니다. 법기…."
위급한 상황이 지난듯하여 준혁이 적마도의 능력에 관해 설명하려던 순간, 중괴가 사방에 퍼져 거인의 눈치를 살피는 4대 종문 수사들에게 외쳤다.
"야이 빌어먹을 놈들아! 쳐다만 보지 말고 수를 내 보거라! 이 무식한 거인 놈이 네놈들이라고 가만히 둘 것 같으냐!"
"중력괴! 당신은 언제 이곳에 온 겁니까? 아니 도대체 어떻게 이곳에 온 겁니까?!"
4대 종문 수사들은 당장 거인이 자신들을 향해 위협을 드러내지 않아서인지,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한 듯 보였다.
오히려 유적의 보물을 나눠 가져야 할지도 모를 중괴의 합류를 더 신경 쓰는 것 같았다.
"왜? 전쟁을 벌이는 척하면서 뒷구녕으로 헛짓거리를 하면 모를 줄 알았더냐?! 애초에 여기서 발견된 건 공천귀의 표식이 아니라 봉인이었겠지? 그렇지 않으냐?!"
"그게 어쨌단 말이오!"
"그 말은 선마궁이 이미 내부를 조사했다는 뜻인데! 뭘 얻어먹을 것이 있다고 몰래 일을 벌였냔 말이다! 빨리 움직여라! 저놈에게 모조리 죽기 싫다면!"
"당신도 거인족의 유물이 욕심나서 몰래 따라온 것 아니오! 우릴 나무랄 처지라 생각하시오?!"
4대 종문을 움직이려던 중괴는 의도와 다르게 대화가 진행되자 입을 닫아버렸다.
"빌어먹을 맞는 말이군."
원래 의도는 그들에게 위기감을 심어 같이 거인을 상대하게 하는 것이었지만, 갑작스레 위험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면서 짜증이 폭발하여 헛말이 나오고 만 것이었다.
그러다 아차 하는 마음에 준혁을 돌아봤다.
"조금 전에 하려던 말이 무엇이냐?"
"제가 먼저 나갈 수 없단 말입니다. 법기의 사용 원리상 제가 먼저 나가면 어르신을 빼낼 수 없을 겁니다."
"흐음."
준혁의 말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는지 중괴는 순간 심각한 얼굴로 변했다.
준혁이 압력이 해소되며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고 여기고 있지만, 실상은 중괴의 영역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그나마 움직이고 있었던 것.
만약 중괴가 비경 밖으로 먼저 나가버리면서 영역이 사라진다면, 준혁이 바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한편 중괴의 외침에 한소리 받아친 태청문 부문주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오! 그 이상한 힘이 사라졌습니다!"
"저도 그래요! 몸이 괴사하던 게 깔끔히 사라졌어요!"
주위에선 지옥 같았던 마지막 관문의 힘이 사라졌다고 좋아하고 있었으나, ‘기’에 유독 민감했던 그는 거인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이야 갑자기 나타난 거인이 중력괴 일행만 공격하지만, 그들이 죽든 아니든 결국 공동안에 남아있는 모두가 겪어야 한다는 말은 곧 현실이 될 거였다.
결국 그는 멀리서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는 중괴에게 소리쳤다.
"중력괴! 분명히 말해두는데 저 거인을 저지하고 나면 우리 관계를 확실히 해야 할 겁니다! 우리 4대 종문을 동시에 상대할 게 아니라면 욕심을 버리십시오!"
그리고는 빠르게 동맹을 맺은 4대 종문 수사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다들 몸이 회복하는 대로 합류하십시오. 저 늙은 괴물의 말대로 우리도 피할 수 없습니다. 되도록 거인의 시선이 저들에게 향해 있을 때 처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이 전해진 직후, 그야말로 공동안은 장관을 이루었다.
태청문 복장의 사내가 중괴에게 소리친 직후, 그들은 자신이 소환할 수 있는 영역 분신을 만들어내 거인에게 보냈다. 그리고는 각자의 공법을 운용해 화려한 물리 공격을 만들어냈다.
자휴궁의 보라색 색채가 하늘을 뒤덮는 사이 오검문의 검들이 그사이를 수놓았고, 태청문의 푸른 물결이 거인을 덮칠 때 파도의 힘을 이용해 묘존청의 수사들이 바위처럼 날아갔다.
사방대서 나타난 분신들도 각각의 술법을 사용하고 벼락처럼 움직였고, 각종 법기들도 살아있는 것처럼 제각각 폭풍처럼 쇄도했다.
그 모습에 중괴가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준혁을 닦달했다.
"다행히 멍청한 놈들이 시간을 끌어주는구나. 그래 그럼 네놈 말대로 나부터 벗어나겠다. 저놈들 덕분에 주변 압력이 약해지고 있으니, 네놈도 무사히 나올 수 있겠지."
"저들을 돕지 않고 말입니까?"
"네놈은 우리에게 승산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냐?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저 거인은 소싯적의 나를 넘어선다고, 그 말은 지금 여기 있는 전부가 덤벼도 승산이 없다는 뜻이다. 네놈이 무얼 깨웠는지 이제 알겠느냐?"
머쓱해진 준혁은 적마도를 소환했다.
하지만 자신의 실험이 잘못했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만약 지금이 아닌 후에 혼자나, 혹은 중괴와 둘만 있을 때 시도했다면?
그땐 도망갈 틈도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준혁이 적마도를 발동하려는 찰나.
콰아아앙!!!
엄청난 폭발과 함께 거인을 상대하고 있던 수사들이 모두 피를 토하며 사방으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거인의 이마에 위치한 세 번째 눈이 번쩍 떠지며, 그곳에서 은색과 푸른색이 은은하게 번져나가는 빛무리가 준혁을 향해 쏟아져 나왔다.
"막아라!"
그리고 빛무리가 쏟아진 직후, 중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준혁의 앞을 가로막으며 양손을 휘저었고.
그에 따라 중괴의 앞에 눈에 보일 정도로 압축된 영기막이 생겨나며 그 뒤를 네 명의 분신이 나타나 막아섰다.
하지만 중괴와 빛무리가 부딪치기 전, 먼저 움직인 자가 있었다.
"피해야 합니다!"
푸욱-
어느새 소리 없이 다가온 적마도가 중괴의 등을 파고들었다.
"으윽, 이게 무슨 짓이…."
그리고 동시에.
파앗.
중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의 분신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