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 백호 유적 (4) >
백호족의 생전 가죽과 그들이 사용하던 무구로 생각되는 물건들을 보자 자비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준혁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하지만 표정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서려 있었다.
“수사, 아까 약속하셨지요? 무구가 나오면 하나 양보하시기로? 전 이걸로 하겠습니다.”
자비에는 준혁이 뭐라 답하기도 전, 4쌍으로 만들어진 팔찌를 공간대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에 준혁은 남의 일인 듯 무관심하게 쳐다보았다.
“그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아주 마음에 들어요.”
“중앙에 뚫린 석실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것이 그리 마음에 드신다면야···. 좋습니다.”
준혁의 말을 들은 자비에는 아차! 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공간대에서 팔찌를 꺼내 제단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그리곤 죽어가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하하···. 수사 생각에도 제가 너무 성급했지요?”
태도를 바꾼 그의 모습에 준혁은 피식 웃고는 백호 가죽과 팔찌, 기타 물건들을 전부 공간대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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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석실을 지나, 전면에 뚫린 마지막 석실에 들어서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놀라야 했다.
마지막 석실은 나머지 두 곳보다 서너 배는 될법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앙엔 거대한 사각 얼음이 놓여있었고, 얼음 주위엔 제관을 쓴 백호 형태를 띤 진묘수(鎭墓獸)가 사방을 점하고 위용을 뿜어댔다.
거대한 얼음 안엔 주먹만 한 무언가가 몸을 웅크린 자세로 있었는데, 반투명한 얼음으로 인해 그 모습을 정확히 판별하긴 어려웠지만, 누구라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백호!! 이럴 수가! 백호족 영수가 봉인돼 있었다니!”
자비에는 흥분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얼음에 다가가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자비에와 달리 준혁은 얼음 주위에 설치된 진묘수를 살펴보았다.
‘진묘수라는 것이 죽은 자의 혼을 선계로 인도한다는 동상일진데···. 이것들은 반대로 혼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되었구나.’
진법 지식이 있던 준혁은 어렵지 않게 백호 형태 석상의 기능을 파악했다.
그때 준혁의 눈에, 네 방위를 점하고 있는 진묘수의 발들이 들어왔다. 기이하게 비틀려 다른 방향을 향해 있는 모습.
마치 특정 이동수법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였다.
‘혹시?’
준혁은 얼음 주위를 돌며 네 석상의 발 모양을 유심히 관찰한 후 머릿속에서 순서를 조합했다.
동, 서, 남, 북으로 이어지는 발의 움직임은 하나의 보법(步法)이 분명했다.
‘무리구나. 어떤 의도가 숨어있는 보법임은 틀림없으나, 네발을 가지지 않은 이상 펼칠 수가 없겠어.’
그랬다. 석상을 통해 알아낸 보법은 처음부터 백호족처럼 네발 동물이 사용하도록 만들어져 있던 것.
준혁은 빈 옥간을 꺼내 석상에서 알아낸 보법을 기록하고는 관심에서 지워버렸다.
그러다 얼음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자비에를 보고는 문뜩 무언가가 떠올랐다.
“자비에 수사. 혹시 변신술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까?”
뜬금없는 준혁의 질문에 자비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오래전 가주께서 키우던 영수의 정혈을 얻어, 바람 늑대로 변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여기 진묘수 석상의 발을 보십시오. 아마 네발 영수로 변한 뒤 보법을 밟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준혁의 말에 석상들을 유심히 관찰하던 자비에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리곤 곧바로 발 모양을 외우더니 이해할 수 없는 주문을 중얼거렸다.
잠시 후 피부위로 옅은 광채를 뿜어내던 자비에는 2미터가량의 몸체를 가진 거대한 늑대로 변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자비에는 조금 긴장한 모습으로 석상 앞으로 걸어가더니 천천히 보법을 밟았다.
하지만 한참을 움직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준혁이 동쪽에 석상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동서남북 순서로 할 때 가장 매끄럽게 이어집니다. 이쪽에서 다시 해보시지요.”
그리고 준혁의 말대로 자리를 옮겨 보법을 밟자.
쿠르르릉-
석실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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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진동이 끝나자, 석상들이 바스러지듯 모래로 변해 바닥에 흩어졌고, 그동안 꼼짝하지 않던 얼음이 빠르게 녹았다.
동시에 석실 천장이 갈라지며 돌계단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살짝 긴장한 상태로 상황을 지켜보다 모든 변화가 멈추자, 빠르게 녹아버린 얼음 앞으로 움직였다.
얼음이 있던 자리엔 주먹만 한 하얀 생명체가 작은 배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잠든 듯 누워 있었다.
“아!”
자비에는 탄성과 함께, 조심스럽게 축축이 젖은 주먹만 한 백호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수사! 보십시오! 백호입니다! 살아있는 백호 말입니다! 하하하!”
자비에는 천하를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자비에를 향해 준혁이 당연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렇군요. 그럼 이제 제게 넘겨주시지요.”
그 말에 자비에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넘겨주라니요?”
“약속 잊으셨습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어···.”
자비에는 참담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두 눈을 치켜떴다.
“맞습니다! 그리 약속했지요! 허나 청혈이 없으니, 훗날 청혈을 구할 수 있는 이 영수를 제가 가지는 게 맞지요!! 하하!”
어색하게 웃는 자비에를 보며 준혁은 손가락으로 천장에서 내려온 계단을 가리켰다.
“그리 주장하신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단 살아있는 영수를 얻은 만큼, 저 위에서 청혈이 나오든 무구가 나오든 어느 것도 양보해 드리지 않겠습니다. 겨우 청혈과 살아있는 영수의 가치는 그만큼 다르니까요. 그렇겠지요?”
“어···? 어, 그건···.”
준혁의 말대로 새끼 백호의 가치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단, 중요한 건 청혈을 얻기 위해선 정혈을 만들 수 있는 결단기까지 키워야 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랄까.
자비에의 반응에 피식 웃어 보인 준혁은 개운하다는 표정으로 돌계단으로 향했고, 자비에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급히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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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벽에 새겨진 거대한 백호의 모습.
2층에 올라온 두 사람이 처음 마주하게 된 장면이었다.
십여 미터는 넘을듯한 거대 벽면 한쪽에 그려진 백호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벽에서 튀어나와 모든 걸 찢어발겨 버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림을 본 순간,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공법을 운용하다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만큼 벽면 그림이 주는 위압감은 압도적이었다.
그림이 그려진 벽면 반대쪽엔 거대한 제단이 놓여있었고, 제단 양옆으로 석제 단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쪽 단상 위엔 그토록 바라던 하얀 자기병 세 병이 아름다운 굴곡을 자랑하듯 요염한 모습을 한 채 준혁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고.
반대편 단상엔 성인 머리만 한 옥돌과 이빨을 엮어 만든 목걸이, 그리고 금으로 만든 머리띠가 진열된 채 반짝반짝 빛을 냈다.
준혁은 뒤따라오던 자비에는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기감으로 단상 위 물건들을 살핀 후 걸어가며 손을 크게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손짓에 따라 물건들이 차례대로 날아오더니 공간대 안으로 빠르게 사라져갔다.
“저, 수, 수사! 잠시만!”
다급한 목소리에 준혁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신지?”
“청혈이 있는지 확인해 보면 안 되겠습니까?”
“...수사. 한가지 태도만 취하십시오. 자꾸 이랬다저랬다 하면 곤란합니다.”
“죄송합니다···.”
한껏 낙담한 자비에를 바라보다, 짧게 혀를 찬 준혁이 공간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자기병 세 개를 꺼내 자비에 앞에 내밀었다.
자비에는 탐욕 가득한 눈으로 자기병을 바라보다, 백호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빠르게 병 속을 확인했다.
“청혈!! 그것도 세 방울이나!”
청혈을 발견한 자비에는 나머지 자기병은 준혁에게 넘기고, 청혈이 든 자기병을 꼭 쥔 채 심각한 듯 이마를 한껏 찡그리고는 눈을 감고 장고에 들어갔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결정을 내린 듯 두 눈을 번쩍 떴다.
“처음 약속대로 청혈과 무구를 선택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준혁에게 단상 위에 있던 목걸이와 머리띠, 옥돌까지 건네받아 확인한 후, 1층에서 발견했던 4쌍의 팔찌를 선택했다.
사실, 자비에의 변덕을 전부 받아준 건 준혁의 노림수였다. 몸 안에 받아들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청혈보다는 든든한 지원군이 돼줄 영수를 원했던 것.
준혁에게 청혈이든 자기병과 팔찌를 건네받은 자비에는 만족스러운 듯 웃더니, 빈 자기병을 꺼내며 말했다.
“수사, 저와 한 번 더 거래하심이 어떠십니까? 옥돌에 적힌 술법을 복사해갈 수 있게 허락해주신다면, 여기 청혈 한 방울을 드리겠습니다.”
준혁은 고민할 것도 없이 수락하려 했다. 술법을 복사한다고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아까울 게 없었다.
게다가 옥돌에 적힌 술법은 백호족 영수 전용 술법이었기에, 누군가 술법을 파악하고 있다고 해서 준혁이 불리해질 것도 없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눈빛에 서린 간절함을 읽은 준혁이 그냥 지나칠 리 없는 일.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드리지요. 단, 수사가 알고 있는 영수 키우는 방법을 공유해준다면 말이지요.”
“... 그렇게 하시죠.”
거래가 끝나자 자비에는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백호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그러다 욕심 가득한 눈빛을 애써 감추며 1층을 향한 계단 쪽으로 이동했다.
“이제 밖으로 나갈 전송진이나 공간 비틀림을 찾아야 하니 아래로 가보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곳부터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자비에는 계단을 내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혼자남은 준혁만이 골몰히 생각에 잠겨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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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에가 1층으로 내려간 지 한참 후, 준혁은 2층에 방음진을 설치했다. 그리곤 공간대에서 깃발 3개와 영석 무더기. 붉은 기운이 맴도는 광석 3개와 붉은 흙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깃발 3개를 품(品)자 형태로 배치하고 깃발 아래 붉은 광석을 놓은 후, 주변 땅이 보이지 않게 흙을 덮었다.
그리곤 흙 위에 잠들어 있는 새끼 백호를 조심스럽게 올렸다.
지금 준혁이 하려는 건, 영수를 키우는데 가장 기본적인 준비인 ‘종속의 인’을 새기는 작업.
자비에에게서 영수 키우는 법을 습득한 준혁은 공간대에 재료가 있는 걸 확인하고는 곧장 술법을 준비했다.
영수의 인지능력이 낮을수록, 수행이 낮을수록 종속의 인의 효과가 좋았기에, 굳이 시간을 늦출 이유가 없었던 것.
준비를 끝낸 준혁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뒤, 깃발을 꽂아둔 세 방위로 영기를 쏘아 보냈다.
직후 깃발을 통해 영기가 광석으로 전해지며, 백호를 둘러싸고 있던 붉은 흙 주위에 붉은 광채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준혁은 즉시 수결을 맺으며 술법을 실행했다.
착착착-
기억하기도 힘들 것 같은 수십 번의 수결을 끝내자, 백호를 둘러싼 붉은 흙이 담뱃재가 타들어 가듯 빠르게 소멸했다.
동시에 흙 위로 붉은 기운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다 백호의 몸속으로 천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러길 한참, 붉은 흙이 전부 사라지자, 잠들어 있던 백호가 부들부들 짧게 떨었다.
준혁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잽싸게 수결을 바꾼 후 백호의 이마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백호의 이마 위로 기이한 문양이 진하게 나타나다가 머릿속으로 파고들며 사라졌다.
동시에 준혁의 심장 어림에도 똑같은 문양이 나타났다가 빠르게 스며들었다.
“후우···. 다행히 한 번에 성공했구나.”
종속의 인이 어려운 술법은 아니지만, 타이밍이 중요했기에 준혁은 꽤 긴장한 상태였다.
만약 시간을 맞추지 못해, 술법이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시전자는 상관없지만, 어린 영수는 이지(理智)에 손상이 갈 수도 있는 일.
맘졸이던 작업이 수월하게 끝나자 손을 저어 깃발들을 거두고는 방음진도 해제했다.
붉은 광석이나 흙은 일회용이었기에 손을 저어 흩트려 버렸다.
“한 사람 몫을 할 때까진 열심히 키워줄 테니, 무럭무럭 자라거라.”
준혁은 주먹만 한 백호를 가슴 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자비에를 도와 유적 밖으로 나갈 방법을 찾아야 할 때.
“자! 찾아볼까!”
호기롭게 외치며, 기감을 넓게 퍼트리는 준혁.
다만 이때까진 모르고 있었다.
이 좁은 유적을 빠져나가는 것이 생각보다 수월하지 않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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