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55화 (55/408)

# 55 < 백호 유적 (3) >

‘가문의 영원한 친구라···.’

그 말인즉, 가문끼리의 동맹보다 우선순위에 둔다는 말.

어려울 때 이유 불문하고 도움을 주겠다는 뜻.

“그전에 백호청혈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게 순서 아니겠습니까?”

“아. 청혈을 모르십니까? 이런···. 괜한 말로 가치를 높이기만 했군요. 하지만 신용의 자비에!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참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자비에의 설명이 이어졌다.

“영수족 중 소수의 종족은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특이한 영근을 타고나는 것처럼 영수들 역시 마찬가지지요.

그들은 마치 인간들의 DNA처럼 피를 통해 그 힘을 계승시킵니다. 물론 같은 부모를 가졌다고 같은 능력이 발현되는 것이 아니듯 영수들도 같은 종족 내에서 소수에게만 나타나는 힘입니다.”

“그 힘의 원천이 담긴 것이 청혈이다?”

“그렇습니다. 정혈에 그 힘이 담기면 그것을 청혈이라 부르지요. 다만 제가 수사께 그것을 요구하는 이유는 욕심 때문만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영근을 타고나는 게 아니듯, 청혈에 담긴 혈맥의 힘도, 모든 이에게서 발현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누군가에겐 독이 되고 말지요.”

“그럼 수사는 그 힘을 발현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저희 가문의 직계는 성인이 되기 전 극소량의 정혈을 몸 안에 주입해,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검사합니다. 영수의 정혈을 몸이 이겨내지 못하면 애초에 청혈은 발현될 수조차 없으니까요.”

준혁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말없이 듣고 있자, 자비에는 신이나 설명을 추가했다.

“저희 가문이 숭상하는 건 바람의 힘. 백호청혈을 구해간다면 다음 가주는 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도움을 요청드립니다. 선배님!”

자비에는 마지막 말을 끝내면서 다시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사실 준혁은 청혈이라는 말은 몰랐지만, 혈맥의 힘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식혈만복 공법에 그에 관한 언급이 있었던 것.

하지만 식혈만복에 적힌 내용과 자비에가 말하는 것은 크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자비에는 혈맥의 힘이라는 것이 인간의 영근처럼 영수족만의 특별한 힘이라고 했다. 하지만 식혈만복 공법서에는 인간들도 혈맥의 힘이 있다는 식으로 저술되어 있었던 것.

공법서엔 식인을 통해 정혈을 흡수할 경우 그것을 정제해 먹어 치우는 방법이 수록돼 있었다. 다만 우연히 혈맥의 힘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을 곧바로 봉혈하고 몸 밖으로 배출하라는 경고가 있었을 뿐.

즉, 누군가에겐 독이 된다는 자비에의 말엔 거짓이 없지만, 인간에게도 존재하는 힘이란 말.

게다가 준혁이 익힌 혈단법은 피를 흡수하는데 특화된 공법. 정혈이라 함은 원기가 가득한 별미 중에서도 별미였다.

다만 혈단법엔 혈맥의 힘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

‘잠깐! 설마 식혈만복에서 말하는 혈맥의 힘이···. 뇌영근이나 암영근처럼 극도로 희귀한 영근을 뜻하는 것인가?! 그럴 수 있다! 뇌영근자는 결단기에 이르면 크게 노력하지 않고도 뇌둔술이라는 천하제일의 둔술을 사용한다 하지 않았던가! 설마 그것이 혈맥의 힘?’

뇌둔술, 그것은 일반 둔술은 비교도 되지 않는, 마치 번개가 치듯 움직이는 술법으로 속도로는 그 무엇도 견줄 수 없는 둔술이었다.

준혁은 자신이 아는 정보를 바탕으로 빠르게 혈맥의 힘에 관한 생각을 정리했다.

“백호족 혈맥의 힘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그 정도는 알아야, 청혈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겠습니까?”

자비에는 준혁의 시선을 살짝 피하더니, 잠시 고민의 시간을 가지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선배님께서는. 저희 가문이 백여 년을 넘게 조사한 것들을 말 한마디로 얻으시는군요. ···. 바람을 타고 뇌성을 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람을 탄다?”

“원영기에 오른 백호족은 일정 영역의 바람을 수족처럼 부린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것을 뜻하는 거라 여기고 있습니다.”

“흠.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물건이군요.”

“제가 아는 건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부디 저에게 청혈을 양보해 주시겠습니까?”

준혁은 말없이 장고에 들어갔다.

식혈만복에 나온 대로라면, 혈맥의 힘은 피해야 할 독과 같은 것. 하지만 자비에의 설명대로라면 만에 하나 혈맥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체질일 경우, 엄청난 힘을 얻을 수도 있는 일.

‘흠···.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인가···.’

물론 식혈만복의 봉혈법을 사용한다면 위험한 일은 없을 수도 있었다.

‘공법서엔 극소량의 힘에 대한 언급만 있다. 만약 유적 안의 청혈이 그 가능성을 뛰어넘는 독이 되어 내게 온다면?’

한참을 고민하던 준혁은 위험보다는 안전을 택했다. 그렇다고 자비에에게 청혈을 쉽게 넘길 생각은 없었다.

몰랐으면 모를까. 상대방이 간절히 바라는 물건이 있는 걸 알게 된 이상, 그냥 허락해 줄 수는 없는 일.

“자비에 수사. 수사의 부탁은 한가지 맹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예? 그것이 무엇입니까?”

“석탑에서 나오는 다른 보물들은 전부 가지라고요? 만약 청혈을 제하고 아무것도 없다면 어찌하실 겁니까?”

“그, 그것은···.”

“물론 수사가 이곳을 발견하고 그동안 애써왔다는 건 압니다···. 만. 결과적으로 마지막 문을 연 건 내가 아닙니까? 수사는 우연히 따라 들어왔고?”

“...”

머뭇거리는 자비에를 보며 목소리에 힘을 줘 말했다.

“그러니, 이렇게 하시지요. 석탑 안에서 나오는 것 중 청혈은 수사에게 드리고 나머지는 전부 내가 갖겠습니다. 또한 그전에! 내게 성의를 보이십시오. 청혈을 양보하고 수십 년은 더 고생했어야 할지 모르는 유적을 열어준 값으로.”

자비에의 표정이 밝아져 오자 준혁은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나를 신경 써준다면, 나도 윈드라스 가문을 내 친구로 여기겠습니다.”

+++

자비에는 감동한 듯, 애정이 듬뿍 담긴 눈을 한 채 준혁이 내민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았다.

“감사합니다. 수사! 첫걸음이 꼬여 일이 잘못되나 했는데. 이렇게 나를 이해해 주다니! 신용의 자비에! 수사를 평생 친구로 여기겠습니다.”

한동안 준혁의 손을 잡고 양팔을 세차게 흔들던 자비에는 아차 싶은 표정으로 공간대에서 몇 가지 물건을 꺼냈다.

“당장은 드릴만 한 게 얼마 없습니다. 혹시 이 중에서 필요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준혁은 자비에가 꺼낸 물건들을 쓰윽 훑어보고는 기감으로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중급, 상급 법기가 그나마 가장 좋은 것.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협곡에 펼친 진법들. 그에 관한 건 없습니까?”

“아! 수사께서도 진법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이래 봬도 저희 가문은 진법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답니다. 바람에 힘이라는 게 쉽게 머무르지 않는 탓에 진법으로 힘을 가두···. 아이고. 제가 기쁜 나머지 제 얘기를 너무 했나 봅니다.”

자비에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다 빈 서책을 하나 꺼내 이마에 잠깐 댄 후, 준혁에게 넘겨주었다.

서책을 확인해 보자 그 안엔 자비에가 알고 있거나 가지고 있는 진법에 관한 내용을 이름별로 간추려 놓은 것이었다.

“관심이 있는 것이 있으십니까? 몇 가지는 서책으로 가지고 있고, 대부분은 머릿속에 있습니다. 하하.”

빠르게 서책 속 내용을 확인하던 준혁은 하나의 이름을 보고 깜짝 놀라야 했다.

‘만월강하진(滿月江下陳)! 진짜 다른 것도 있었다니!’

대라멸진(大羅滅陳)을 알고 있기에 혹시나 하고 떠보았는데 차경수의 거처에서 나온 또 다른 진법 원반에 관한 정보가 있었다.

이제 정체를 알지 못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혹시 오성빙둔봉인진(五星氷遁封印陳)에 대해선 모르십니까?”

“흠···. 처음 듣는군요.”

“그렇습니까? 그럼, 여기. 표시했으니 이것들만 전수해 주신다면, 성의로 보아 청혈을 드리겠습니다.”

받았던 서책을 건네주자, 자비에는 그 안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준혁을 바라보았다.

“이, 이 많은 걸 전부 다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시간은 오래 걸려도 되니 제가 표시한 진법 지식을 전부 전수해 주십시오. 그거면 만족할 것 같습니다.”

공간대를 뒤적이던 자비에는 난처함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수사. 미안하지만. 그 많은 양의 정보를 담을 서책이 부족합니다···. 다른 건 안 되겠습니까? 여기 이 상급 법기로 말할 것 같으면.”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준혁은 고갤 저었다.

“친구라 말하더니, 첫 거래부터 또 약속을 어기실 작정이십니까?”

자비에는 똥 씹은 표정이 되더니 한참을 고민하다 누런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종이는 언뜻 보기엔 평범했는데, 자세히 살피니 마치 옥간처럼 영기가 흐르고 있었다.

“수사. 이건 저희 가문의 보물 중 하나입니다···. 정말 큰 출혈을 감수하는 것이니. 청혈에 관한 약조 외에도, 만약 백호족의 무구가 나온다면, 하나만 양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게 무엇인데 그러십니까?”

“혹시 만통방이라고 아십니까?”

준혁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설마! 보패! 만통방!”

“그건 아니고... 이건 만통방을 흉내 내 만든 천통방이라는 물건의 일부입니다. 이 종이 한 장에 백 가지 진법을 담을 수 있지요. 그럼 수사께서 약조해주신다 믿고 진법을 복사해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자비에는 준혁이 싫다 좋다를 말하기도 전, 종이를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입술을 달싹였다.

+++

8시간 가까이 진법 내용을 복사하는 데 소비한 자비에는, 꽤 지친 듯한 안색을 한 채, 준혁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여깄습니다. 수사께서 표시해놓은 서른 한가지 진법. 확인해 보십시오.”

종이를 건네받아 확인한 준혁은 만월강하진을 포함한 처음 보는 진법들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안에서 어떤 무구를 양보해야 할지 모르지만, 종이 법기는 수많은 진법 옥간을 가지고 다니던 준혁에겐 꽤나 도움이 되는 물건이었다.

“그럼 들어가실까요?”

입구에서 시간을 낭비한 것이 아까운지, 자비에는 조급함이 가득한 모습을 한 채 석탑을 향해 발을 옮겼다.

준혁 역시 종이 법기를 공간대에 넣은 뒤 그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

성인 세 명은 줄지어 세워놔야 할 것 같은 거대한 석문은 자비에의 손짓에 가볍게 열렸다.

두 사람이 석문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다. 유적 안은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저벅저벅-

자비에가 앞장서고, 준혁이 따랐다.

석문 앞 통로를 지나치자 곧이어 텅 빈 석실이 나타났고, 석실의 좌, 우 그리고 전면엔 또 다른 통로로 이어져 있었다.

준혁은 빠르게 기감을 퍼트려 각각의 통로를 살폈지만, 무언가에 가로막혀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자비에 역시 마찬가지인 듯,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리다 준혁과 시선이 닿자, 민망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수사. 아무래도 직접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왼쪽부터 살펴볼 테니, 수사께선 오른쪽을 살펴보시겠습니까?”

자비에의 제안에 준혁이 답했다.

“무슨 일이 있을 줄 모르니 함께 움직이시지요. 우선 왼쪽부터 가보면 될 것 같습니다.”

“...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석실 왼쪽으로 이어진 통로를 지나치자 또 다른 석실이 나타났다. 그곳은 중앙의 텅 빈 석실과 다르게 벽면엔 수많은 족자가 걸려있었다.

석실 중앙엔 조그마한 진열장이 놓여있었고, 그위엔 돌돌 말린 족자들이 수십 개가 놓여있었다.

석실의 벽면을 가득 채운 족자는 세 가지로 분류되어있었는데, 한쪽에는 풍경을 그린 산수화가, 나머지 양쪽 벽면엔 하얀 털에 귀밑은 청색 털을 가진 호랑이 그림이 마치 초상화처럼 그려져 있었다.

“오호! 이곳은 백호족의 옛 모습을 남겨놓은 곳이었나 봅니다.”

자비에는 벽면에 다가가 백호가 그려진 족자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콧노래를 부르며 그것들을 돌돌 말아 공간대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준혁이 차갑게 말했다.

“수사. 지금 무얼 하시는 겁니까?”

“예?”

“청혈을 제외하곤 손대지 않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이건 그저 그림인데. 이런 것도 포함이란 말입니까?”

고개를 끄덕여준 준혁은 무감정한 눈빛으로 자비에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행동에 자비에가 언짢은 기색을 나타내다 족자를 전부 꺼내 건넸다.

물건을 돌려받은 준혁은 곧이어 벽면에 걸린 족자와 진열장에 쌓여있던 물건까지 전부 공간대에 쓸어 담아버렸다.

진열장 위에 있던 족자들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빈 족자였다. 그리고 빈 족자를 전부 치우자, 그 밑엔 붓과 벼루가 있었는데, 영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평범한 물건이 아닌 법기류로 보였다.

하지만 괜히 자비에의 시기 질투심을 불러올 필요가 없었기에, 준혁은 내색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공간대 안에 물건들을 전부 집어넣어 버렸다.

“... 기념으로 하나만···.”

자비에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린 준혁은 들어선 통로를 보며 말했다.

“이곳에 따로 통로는 없는 듯하니, 다른 곳으로 이동하시지요.”

두 사람은 첫 번째 석실을 나와, 곧바로 반대편에 뚫린 통로를 통해 두 번째 석실에 들어섰다.

두 번째 석실은 첫 번째 석실과 또 달랐다.

“오! 세상에!”

자비에는 석실에 들어서자마자 감탄을 내질렀고, 준혁 역시 놀란 눈을 해야 했다.

석실의 한쪽 벽엔 생전에 백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호랑이 가죽이 걸려있었다. 그 크기와 위압감이 전신을 자극했다.

죽은 몸에서 도축한 껍데기일 뿐일 텐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영기를 내뿜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죽이 걸린 벽면 아래쪽엔 작은 제단이 있었고, 제단 위엔 팔찌 네 개와 기다랗게 자란 발톱, 그리고 성인 남성의 팔뚝보다 두꺼운 이빨이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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