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어느덧 심온과 허관걸은 소천봉 정상에 올랐다.
산을 오르는 데만 신경 쓰느라 간과했던 절경(絶景)과 풍광(風光)이 순간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저만큼 시선이 닿은 곳 아래로 기암절벽이 웅장하게 펼쳐졌고, 구름바다가 유유히 협곡과 암벽 사이사이를 출렁였다.
대자연의 위용에 한순간 압도당한 두 사람은 다시 크게 숨을 내쉬는 것으로 현실 감각을 되찾았다.
“대단하긴 대단하군요.”
심온은 무심결에 말을 뱉어내고는 아차 싶었다. 이제껏 팻말들로 인해 안정되었던 마음을 자극하게 된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염려스러운 마음에 얼른 허관걸의 표정을 살피니 역시 허관걸의 안색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후, 이곳에 서보니 과연 천하제일의 기연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군요.”
수습할 길이 없을까 빠르게 두리번거리던 심온이 뭔가를 발견하곤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저길 보십시오.”
심온이 가리키는 쪽을 보던 허관걸의 근심 어린 얼굴이 순간적으로 미소로 바뀌었다.
“아니, 저건……. 하하하하!”
두 사람이 웃음을 터뜨린 건 바위에 새겨진 여섯 글자 때문이었다.
―기연(奇緣) 절대(絶代) 전무(全無)
바위를 깎아내고 그 안에 검게 먹을 입혀놓았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고 비바람을 맞은 탓인지 검은 부분이 많이 떨어져 나간 상태였지만 그냥 지나치기 힘든 위치와 글자 크기 때문에 누구라도 보지 않고 지나칠 순 없을 것 같았다.
굳건한 의지로 뛰어내리려 마음먹은 자라도 한순간에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질 만큼 무뚝뚝한 필체가 인상적이었다.
돌 비석으로 다시 안정을 찾은 두 사람은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투신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반드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신발을 벗어놓고 몸을 던진다.
‘죽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야. 단지 기연을 얻기 위함일 뿐이라구’라고 부르짖는다 해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느낄 터. 만약 뛰어내렸다면 작은 흔적이라도 남겨놓았을 가능성이 컸다.
꼼꼼히 반 시진(약 한 시간) 동안을 둘러보던 두 사람은 다행스럽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이제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허관걸의 물음에 심온이 까마득한 절벽 아래를 보며 답했다.
“위에 없으니 아래를 살펴야겠죠?”
만일 소천봉에서 뛰어내린다면 닿게 될 지점에는 유유히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기연의 삼대 지형 조건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셈이었다.
‘막막하군.’
강변에 이른 심온의 솔직한 소감이었다.
거대한 산악이 양어깨를 떡 벌리고는 고고히 내려다보고 있는 가운데 그 아래 강물은 세상의 모든 번민을 쓸어가듯 고요히 흘러갈 뿐이었다.
허관걸이 얼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막막하구려.”
흐르는 강물은 어떤 증거나 흔적도 보여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조용히, 하지만 꾸준히 흘러가며 설혹 흔적이 있었다 해도 오래전에 쓸어가 버렸음을 소리없이 보여줄 따름이었다.
심온과 허관걸은 그 막막함에 빠져 점차 숨이 멎어가는 사람들처럼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강물만을 바라보았다.
그 뒤 두 사람이 망상에서 벗어난 것은 나룻배 한 척이 강물을 따라 내려가는 것을 보고 나서였다.
나룻배의 진행은 자연과 혼연일체가 된 듯 유유자적하였기에 허관걸은 그저 눈만 두어 번 깜박일 따름이었지만 심온은 문득 눈빛을 빛내기 시작했다.
‘그물이나 낚싯대가 없다. 그렇다고 사람을 태워 옮기거나 짐을 실어 나르기엔 배가 너무 작고.’
심온의 머리로 ‘만학서고’, ‘기연 총정리’, ‘소천봉’, ‘기연 장소의 지형 지세’, ‘추락’, ‘절벽 아래의 나룻배’ 등의 단어들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요소들은 차츰 서로 부딪치고 위로 올라섰다가 내려서고, 다시 톱니처럼 맞물렸다가 다른 쪽으로 연결되면서 결국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해 냈다.
‘음, 그런 건가?’
심온은 깨달은 즉시 허관걸에게 말했다.
“나룻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대화는 제가 나눌 테니 지켜만 보십시오.”
심온이 허관걸에게 나지막이 말하자 허관걸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지라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온이 눈앞을 지나는 나룻배를 향해 목청을 높였다.
“어르신! 잠깐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허관걸은 곁에서 심온이 외치는 것을 보고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에서는 사방의 공간이 탁 트여 있었기에 이런 식으로 고함을 지른다고 강물을 가로질러 소리를 전달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휴, 이 친구, 정말 한심하군.’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노인의 희미한 대답이 돌아왔다.
“왜 그랴?”
허관걸의 눈이 대번에 휘둥그레졌다.
‘소리를 들었단 말인가? 들릴 리가 없는데?’
하지만 곧바로 허관걸은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하아, 그렇군. 저 노인장이 범상치 않은 자인 게로구나.’
그는 강호상에 은거기인이 많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곤 틀림없이 노인장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심온이 고함치듯 째지는 소리로 외쳤다.
“보답으로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시간 낭비는 아닐 겁니다!”
강호의 속설 중엔 ‘뇌물(賂物)은 지름길의 약도(略圖)를 제공하고 사례금(謝禮金)은 친절(親切)을 보장한다’는 말이 있다. 이 노인도 돈은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어? 그랴그랴! 조금만 기다리게나!”
희미하게 들리긴 했지만 노인의 목소리에 꽃이 핀 것만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룻배가 십 장(약 30미터) 정도로 가까워졌을 무렵, 문득 심온이 허관걸의 허리를 감았다.
순간 허관걸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뭐지? 이 애송이가 설마 십여 장의 거리를 건너뛰겠다는 건가? 그것도 나를 끼고서? 흠, 정녕 내가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일까?’
아주 잠깐이지만 혹시 능력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으나 설마 이 정도의 무공을 가졌을 거라곤 짐작조차 하지 못한 허관걸이었다. 이 정도의 거리라면 뛴다기보단 난다고 표현해야 옳을 정도였다.
배는 그사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심온이 진중한 표정을 유지한 채 꿈쩍도 하지 않자 허관걸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의문스럽게 물었다.
“나는 준비되었소. 이제 배 위로 가야 하지 않소이까?”
“네?”
심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경공을 펼쳐 배로 날아가려고 내 허리를 감지 않았소?”
심온이 두 눈을 사정없이 깜박거리고는 답했다.
“하하, 무슨 말씀을……. 다정하게 보이잖습니까?”
허관걸의 안색은 즉시 푸르뎅뎅하게 변했고, 그는 허리에 감긴 심온의 팔을 사정없이 뿌리쳤다.
‘미친 새끼……. 어휴,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어느덧 배는 지척에 이르렀고, 노인장이 뱃머리에 선 채로 물었다.
“그래, 뭐가 궁금한 겐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대단하십니다.”
심온이 뜬금없이 포권의 예를 취하며 하는 말이었다.
허관걸은 이 무슨 생뚱 맞은 소린가 하고 미친 닭 보듯 심온을 바라봤다. 그는 속으로 자신이 후흑문에 아들을 찾아달라고 의뢰한 건 아무래도 큰 실수를 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무슨 헛소리냐고 반문할 것이라 여겼던 노인장이 껄껄 웃음을 짓는 것이 아닌가.
“허허, 젊은 친구가 뭔가 아는군. 그래, 어디에서 나왔나?”
“저희는 관(官)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죄인을 쫓고 있지요.”
“관(官)?”
노인의 얼굴은 ‘관(官)’이란 말에 찜찜한 기색이 떠올랐다.
“죄인을 쫓는 데 이 늙은이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라고…….”
“그 죄인은 현상금이 붙어 있습니다.”
“오호? 현상금이라?”
“꽤 큰돈이죠. 저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극한 상황을 기연을 통해 뒤바꾸어 놓으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소가 바로 이곳입니다.”
노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지. 요새 젊은 것들은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모른다니까. 내가 오죽 답답했으면 절벽 아래를 왕래하면서 목숨을 구할 생각을 했겠나?”
“그저 존경스럽습니다. 이 세상이 아직 존재하는 이유도 다 소리없이 의를 실천하시는 어르신 같은 분이 계시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심온은 말과는 달리 노인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흥, 또 한 명의 기연 장사꾼이라 이거지?’
기연을 얻겠다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철없는 젊은이들을 구하고는 보상금을 요구하는 한편, 충격을 받아 죽은 자들에게서는 그 품을 뒤져 패물이나 돈을 거둬들이는 것이 틀림없었다.
“허허허, 그렇게 보아주니 고맙군. 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이때쯤 되자 허관걸도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비로소 심온이 왜 관(官)이나 현상범을 운운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거 완전히 신종 직업(新種職業)이군. 이 애송이 녀석, 그래도 눈치 하난 빠른걸.’
“혹시 요 근래 뛰어내린 자가 있는지요? 큰돈이 걸린 현상범과 대조해 보고 싶습니다만…….”
심온은 큰돈이라는 말을 굳이 강조했다.
“있었지. 범인의 나이가 어느 정도인가?”
“이십 세가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 어쩌면 한 달 전에 요절한 젊은이일지도 모르겠군. 음, 그러니까 그 녀석을 발견하게 된 날은 다른 날과는 달리 바람이 세찼다네. 지난밤의 꿈자리도 뒤숭숭했던지라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지.”
허관걸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정신없이 요동쳤다.
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늦은 오후였어. 흰 덩어리 하나가 절벽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니겠나. 나는 최대한 빨리 배를 몰아가기 시작했지. 아무리 땅바닥이 아닌 강물에 떨어진다고 해도 워낙 높은 위치에서 추락하는 거라 그 충격이 살인적이거든. 한데 전혀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게야.”
“뭡니까?”
심온과 허관걸이 입을 맞춘 듯 동시에 물었다.
“사실 나도 이 강물을 수없이 오갔지만 그런 암초가 있을 줄은 몰랐다네. 저기 저쪽이었지.”
노인이 손으로 강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특이점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노인은 두 사람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직접 가서 보지 않고는 실감하기 힘들 거네. 저기 저 지점엔 어이없게도 끝이 송곳처럼 뾰족한 암초가 수면 바로 밑에 자리하고 있었던 걸세. 쉽게 말하자면 고드름이 거꾸로 자라난 것처럼 말이네. 이해가 되나?”
허관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노인의 설명이 워낙 사실적이라 어마어마한 속도로 추락하다 송곳 같은 암초에 머리부터 내다 꽂히는 상상을 하니 온몸으로 소름이 돋아났다.
“결과는 너무나 끔찍스러웠어. 여기서 추락한 녀석들의 별의별 모습을 다 봤지만 그런 참혹한 광경은 처음이었다니까. 그 뾰족한 곳에 머리 정수리부터 꽂혔으니 몸이 어떻게 됐겠나? 그대로 꼬챙이에 사방팔방 아주 갈기갈기 찢어져 버리고 만 게야. 어찌나 충격적이었던지 그걸 목격한 후 열흘가량은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단 말이네.”
심온은 노인의 이야기가 끝나는 대로 품에서 허융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꺼내려고 했으나 그냥 접어두기로 했다. 그런 상태였다면 필시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고, 괜히 허융의 얼굴을 보여 허관걸에게 암초 추락의 장본인이 아들일 것이라는 암시를 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시신에서 뭔가 수습한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수습? 농담 말게. 온몸이 떨리고 정신을 차리기도 힘든 판에 뭘 수습할 수 있었겠나?”
“그럼 요 두 달 사이 다른 추락자는 없었습니까?”
“음, 그렇다네. 어떨 땐 하루에 두세 명씩 떨어지기도 하고 또 어떨 땐 몇 달씩 조용하다니까. 특히 요즘처럼 날씨가 화창할 때에는 아주 특이한 성격이 아니고서는 뛰어내리는 사람은 없지. 아무리 위에서 바라볼 때 안개가 짙어 아래를 볼 수 없다고 해도 화창한 날씨엔 좀 어색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저길 좀 보게. 얼마나 화사한… 엇!”
“앗! 저, 저건?”
노인이 말을 하다 말고 탄성을 터뜨렸고, 노인의 말에 따라 절벽 쪽을 바라보고 있던 허관걸도 곧바로 탄성을 내질렀다.
거기엔 화창한 날씨엔 뛰어내리는 자가 없다는 노인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기연을 노리는 것이 분명한 하얀 물체가 추락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허관걸은 곧바로 더 큰 경악성을 내질러야만 했다. 추락자에 대한 놀람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눈앞에 버젓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방금까지 옆에서 대화를 나누던 애송이가 믿을 수 없게도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뭐, 뭐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정녕 현실이란 말인가?’
이 광경은 흔히 무림인들이 경공을 펼친다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날아간다고 해야 적당할 것 같았기에 이제껏 자신이 얼마나 큰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자신의 의식 전반이 지각 변동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그, 그럼 아까 고함을 치던 소리도 사실은……. 하아, 후흑문…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구나!’
“허어, 저 젊은이 혹시 샌[鳥]가?”
꼭 질문이라기보단 스스로 어이없어하는 마음을 달래기 위한 중얼거림이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허관걸은 너무 놀라 노인이 뭐라고 하는지조차 듣지 못한 상태였다.
두 사람이 놀라 입을 쩍 벌리고 있을 때 심온은 첫 번째 도약의 정점(頂點)에서 강의 중간에 이르렀고, 거기서부터 다시 하강하여 강물에 발이 닿는 순간 극미한 물의 저항을 이용, 튕기듯 다시금 솟구쳐 올랐다.
후흑문에는 ‘되도록 무공을 드러내지 않는다’라는 규율이 있었지만 이 경우에는 한 생명이 사느냐 죽느냐가 걸린 문제였기에 심온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후흑문의 규율은 달리 오불율(五不律:다섯 가지 하지 말아야 할 규율)이라고 불리는데 나열하자면 이러했다.
첫째, 강호를 제패하지 않는다.
둘째, 억만금의 의뢰라도 살인 청부는 받지 않는다.
셋째, 되도록 무공을 드러내지 않는다(단, 필요하면 가차없다).
넷째, 한 대 맞으면 다섯 대를 갚지 않으면 파문이다.
다섯째, 여자를 멀리하지 않는다(단, 추녀는 예외).
심온이 가공할 속도로 솟구쳐 추락하는 백색 인영에게 닿아갈 쯤에는 거의 수면에서 칠 장(약 20미터) 정도의 높이였다.
심온은 추락자의 허리를 독수리가 먹이를 채듯 낚아서는 쭉 뻗어가 암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런 썩을 놈을 봤나!’
황당하고 어이없어 심온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기분 같아서는 확 패버리고 싶었다. 그러다 어떤 놈인가 보자 하고 얼굴을 확인한 순간 심온은 그만 뜨악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