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장
밤이 시작되면서 시작된 전투는 다행히도 아침 해가 뜰 무렵 끝이 났다.
하얀 지평선 위로 서서히 노란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은 충분히 감동적이었지만 지금 이 전장에 있는 이 들 중에서 그 모습을 보고 감상에 빠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원들은 시체들을 모조리 한데 모아 평상시처럼 태우기 시작했고 그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무너진 어느 목책의 귀퉁이에서 엉망이 된 옷을 입은 채로 천천히 대원들에게 다가오는 용악을 보며 웃는 한명의 사내가 보였다.
“킥킥킥킥.....아주 좋은 작전이었어.”
사내는 무너져 버린 목책 사이에서 숨어 간신히 화를 모면했는지 목책 틈새에서 몸을 일으켜 나오며 계속해서 웃어댔다.
“놀족이 잡은 포로입니다.”
주성무가 용악의 뒤에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 사신들이 인질로서의 가치를 잃게 되면 우리로 너희들을 막으려는 놀족의 사기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짐승 놈들이 생각할 수 없는 기막힌 작전 아닌가?!”
그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손을 하늘로 벌려가며 웃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훌륭해! 아암, 훌륭하고 말고! 크하하하!”
그는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 훌륭한 적전의 희생양이 누군가?! 황명을 받아 그대들의 지휘하러 온 네놈의 직속상관이다! 비록 죽은 것은 내 부관들이었지만! 그곳엔 내가 묶여 있을 수도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쓰러지고 다시 손을 짚고 일어나 용악에게 다가오며 소리쳤다.
“고육지계의 계책도 그에 걸 맞는 상황이 먼저 주어져야 하는 법이다. 너희들에게 겁먹어 나가지도 못하는 짐승 놈들 때문에 상관을 희생시킨단 말이냐!!”
그의 목소리는 흰색 아니 이제는 붉은색으로 변해버린 대지 위에 널리널리 퍼져나갔다.
하지만.
흑영기병대원들.
검은 유령들은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것은 황명과 대장군부의 군령을 무시하는 것. 너의 상관인 나는 결코 묵인할 수 없는 일이다. 흑영기병대장 용악!”
“대장군께 위임받은 권한으로 네게 주어진 지휘권을 박탈하겠다. 지금 즉시 무장을 해체 하고 본대에서 자숙하라!”
그의 말에 대원들이 약간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네놈... 네놈이 감히...’
하지만 용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이 열렸다.
특유의 삭막하고 싸늘한 말투와 함께
“너희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내 말을 듣지 않은 거지?”
용악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모든 대원들이 다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라 그들의 심장이 서서히 뛰기 시작했다.
“예전에 너희들에게 똑똑히 말했을 텐데?
너희들은 내 것이라고!
내 수족이 머리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인가? 분명히 길을 막는 것들은 모조리 치우라는 명령 이었을 텐데?”
“뭐시라?”
놀족에 잡힌 포로였던 자.
지금은 유일한 생존자인 그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들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대상없는 대꾸를 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서야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무.. 무슨 뜻이냐, 네놈! 감히 조비대장군님의, 대장군부의 명을 무시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그의 외침과는 상반되게 아무 표정 없는 한명의 대원이 자신에게 다가왔다.
“뭣들 하는가!, 당장 저 자를.”
시끄럽게 소리치며 용악을 향해 손을 휘두르던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자신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후끈한 기운을 느끼며 쓰러졌다.
“이렇게... 이럴 수는 내가...”
용악은 그자가 쓰러지는 모습을 바라보지도 않고 걸어 나가며 말을 이었다.
“주성무!”
"옛!“
“상황 보고서와 함께 사신을 후속 부대에 인계하도록. 보고서의 내용은 일임하겠다.”
“복명!”
살짝 고개를 돌린 그의 녹색의 눈이 방금 전 상황을 고민하는 흑영기병대원들을 날카롭게 바라봤다.
그 안에 타오르는 불꽃이 그들을 마저 태우려는 듯 타오른다.
‘잊었나? 너희들은 나의 것.
그 누구의 명령도 필요치 않다.’
그의 눈은 분명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
거대한 먹구름이 흰색의 평야를 지나쳐 흘러간다.
햇빛마저 구름에 가려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햇볕이 대지를 내리 쬐지 않는다고 대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시체,
시체,
시체...
수많은 놀족시체가 평원을 가득 매웠다.
수많은 창이 땅에 박혔고 수많은 검이 부러졌으며 수많은 갑옷이 평원에 널브러져 굴러다닌다.
그리고 그 시체들을 탐욕스럽게 먹어치우는 수많은 검은 까마귀들이 평원으로 날아든다. 몇몇의 사람들은 그런 평원을 지나 이제 막 함락되어 불타고 있는 점령지를 향해 다가갔다.
그 참혹한 모습을 피해 빨리 왔던 그들은 그곳에서 더욱 참혹한 모습을 보고 오히려 후회했다. 사방에서 시체들이 모여 타고 있었고 무너져 버린 성벽들 사이에는 아직도 시체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편에서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고 있는 알록달록한 색의 갑옷의 병사들이 보였다.
평원을 지나왔던 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 동시에 입과 코를 가려 역겨운 냄새를 몰아내려 애를 썼다.
‘으음. 시체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곳에서 태연히 식사를 하다니.. 마치 지옥에서 날뛰는 놈들 같군...’
그런 모습을 보며 헛구역질을 참아내던 일단의 문관들은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 막사 안으로 서둘러 들어갔다.그리고 그들이 들어간 막사에서 조금 떨어진 한 막사에는 대장군부에서 온 호위병들이 흑영기병대원들의 접근을 막으며 호위를 하고 있었다.
“대장군부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조정에서도 이런 저런 말들이 많아. 군사 고문으로 파견한 사신이 시체로 돌아 왔기 때문이지.”
용악과 단둘이 마주 앉은 조비대장군은 주위를 한번 훑어보고는 찻잔을 들어 한입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 멍청한 놈을 이곳에 보낸 것은 내 의도가 아니다. 끝이 보이는 전쟁, 그것도 이기는 전쟁에는 승냥이들처럼 몰려드는 놈들이 있기 마련 천황기갑단에 있을 때도 그런 경험을 했을 터.”
그는 뜨거운 찻잔을 조심히 들어 마시고는 다시 내려놓고는 말을 이었다.
“더욱이 이렇게 빠르게 전쟁이 마무리 되고 숙적이나 다름없는 곤제국의 영역에서 이렇게 승리를 거두니 전쟁 그 자체를 반대하던 조정의 무리들이 오히려 숟가락을 올리느냐 바쁘지.”
“거기에 더 뻔뻔한 자들은 이런 시체 타는 냄새도 맡아보지 않고서 서류에 붓 몇 번 긋고서 모든 공을 자신들이 가로채 버리기도 하지.”
조비대장군은 말을 마치고 찻잔을 들어 차를 좀 더 따른 다음 말을 이었다.
“군사고문의 파견을 추진했던 무리들이 바로 그 부류다. 그렇기에 군사고문을 처리한 자네의 방식을 특별히 탓하고 싶진 않아.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알고 있지만 나 역시 한제국의 대장군. 한제국의 영광이 바로 나의 영광이다.”
조비대장군은 그렇게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서 용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너나 나나 모두 새로운 시작일 것이야.”
용악은 전과는 다르게 살기도 내뿜지 않고 오히려 담담히 녹색안광을 뿜어내며 조비대장군을 바라보았고 조비대장군은 그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놈... 이제 정말로 끝을 봐야겠군.’
*****
약간 따사로운 햇살이 빛나는 오후.
아침에 몰려 왔던 그 먹구름은 어느새 사라졌다.
그리고 그런 푸른 하늘 아래, 흑영기병대의 대원들 모두 나와 열과 오를 맞추고 가지런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들 앞에 몇몇의 사내가 말에 오르려고 하고 있었고 그들 중 마지막에 말에 오르려는 이를 향해 주성무가 입을 열었다.
“대장군님께 감히 한 말씀 여쭙고 싶습니다.”
주성무는 말을 마치고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용악은 그런 주성무는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이런 무례한....”
조비대장군을 말에 오르게 도와주던 이가 주성무의 말을 듣고 주성무를 호통을 치려하던 찰라 조비 대장군은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말을 건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누군고?”
“옛! 백호부장을 맡고 있는 주성무라 하옵니다!”
“흐음.. 그래 무엇이 궁금한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조비는 주성무에게 물었고 주성무는 놀라며 황급히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조비대장군의 말을 듣고서 얼굴을 약간 굳힌 채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 전쟁 끝나면 저희들에게 면죄부가 주어지고 원하는 것을 하나씩 들어준다는 칙명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대장군님께 직접 다시 한 번 확인 받고 싶습니다.”
주성무의 말에 대장군 뒤에 서 있던 문관들이 흠칫하면서 놀라는 표정을 지었고 주성무의 뒤에 있던 다른 대원들은 긴장된 모습을 보였다. 이 문제는 주성무 뿐만 아니라 흑영대원들 모두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문제이니까.
모두가 조비대장군의 입을 바라보고 있자...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조비대장군의 입이 열렸다.
“물론이다.”
주성무를 비롯해 대원들의 표정이 단숨에 환해졌다.
“그 것은 나 조비의 이름을 하늘에 걸고 맹세한다. 전쟁이 끝나는 순간부터 제군들은 더 이상 그림자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과거는 모두 말소됨은 물론! 막대한 포상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땅을 원한다면 땅을! 장사를 원한다면 종자돈을!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전쟁으로 희생된 대원들에 있어서는 그 유가족들에게 모든 혜택을 돌려주겠다.”
조비대장군의 말이 끝나자 잠시 머뭇거리던 대원들이 모두 하나같이 소리 쳤다.
“와아아아아!!!”
지금까지 유령이라 불리던 모습과는 다르게 그들은 너무나 천진한 표정으로 서로가 서로의 어깨를 감싸며 즐거워했다. 다른 대원들이 듣지 못하게 조비대장군은 말에 오르면서 용악에게 나지막하게 말을 했다.
“이제 끝이다. 새로운 시작을 할 준비를 해라.”
그의 말을 들은 다른 대원들과 다르게 용악의 표정은 여느 때 보다도 오히려 더 굳어 져 있었고 주성무는 그런 대장을 잠시 바라보았다.
‘왜... 당신은...?’
주성무는 멀어져가는 대장군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용악을 보며 의아해 했다.
오후에 대지를 달구던 태양은 이미 저물어 대지 저편으로 사라져 가고 대원들은 모두 막사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쉬고 있을 때
주성무는 용악의 막사에 들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동은 내일 아침 입니까?”
“식사 후에 출발 한다.”
‘이 시간에? 전투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 알겠습니다.. 그럼...”
용악에게 목례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주성무은. 마치 무언가 어려운 것을 묻듯이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대장군님께... 무슨 말씀이라도 들으셨습니까?”
용악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주성무를 바라보았다.
‘네 녀석. 조비의 그 목소리를 들었나? 아님 그냥 단순한 추측인가? 뭐. 상관없지.’
“전쟁 끝나면 면죄부가 주어진다. 너도 듣지 않았나?”
“...”
주성무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물론 듣기는 했지만...’
“그 것 뿐입니까?”
주성무의 물음을 듣자, 용악은 아침에 조비와 나누었던 대화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
‘한 달... 한 달이라...’
“그 이상 끌게 되면 내가 개입할 수밖에 없다. 곤제국의 눈치와 제국 동쪽의 해적들과 이종족의 반란과 소요를 진정 시킬 수 있는 방법은 그 것 뿐이니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
“물론. 그렇게 되지 않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지만. 큭큭.”
‘조비! 크윽... 지금 화를 내봤자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그래. 훗날. 그 때...’
“다만 한 가지. 패전으로 끝나지 않은 이상. 이 전쟁 후 본 부대의 입장이 토사구팽의 신세가 되는 것은 거절한다.”
조비는 싸늘하게 눈길로 용악을 바라보았다.
‘네놈. 한 낱 장기판의 졸 주제에 감히. 허나 지금은 네 장단에 놀아주마.’
“당연하다. 적어도 너만은.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나? 내 왼편의 자리가 남아 있다고 그나저나 내 선물은 어땠나? 하하하하!”
*****
“몇 마디 듣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주성무는 갑작스럽게 흘러나오는 살기에 약간 놀라면서 용악의 대답을 새겨들었다.
‘별일 아닌데... 당신의 표정이 그렇게 굳은 것입니까. 휴우... 당신이 알아서 하겠지요. 적어도 이 전쟁이 승리 할 때 까지는’
“알겠습니다.”
“이 전쟁 한 달 안으로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