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장 비사 3
눈이 수북하게 쌓인 산.
태초의 순수함에 아직도 간직되고 있는 곳.
곤제국인들이 백산이라 부르는 산의 꼭대기에 누군가가 앉아 자신의 앞에서 재롱을 피우는 투명한 무언가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덩치를 가진 그는 전형적인 서대륙 북부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밤이라도 샌 것 마냥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금발은 촉촉이 물기를 머금고 있었고 마치 가을 하늘 만큼이나 깊고 푸른 눈동자는 정령들의 재롱을 보며 웃고 있었다.
대륙이 소멸하고 지각이 찢어지는 대 격변을 겪었음에도 온전히 그 모습을 지키고 있는 이곳.
타 차원의 힘이 조금씩 흘러나와 이 세계를 오염시키는 이곳.
차원의 통로(Entry of Plains)에 걸어둔 봉인을 다시금 확인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그는 정령계를 넘어와 이 세계에 적응해 버린 소나무정령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렇게 웃고 있는 그의 뒤로 조심스럽게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사박,사박
태초의 순결함을 짓밟는 무자비한 발걸음이 눈이 가득 쌓인 백산의 꼭대기에 천천히 발자국을 남겼다.
“어쩐 일로 소인를 부르셨사옵니까?”
곤제국 특유의 복식인 검은색 갓을 쓰고 펑퍼짐한 푸른색 장포를 입은 노인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말을 건넸다.
“십 수년 전 서대륙에서 사막을 지나 동대륙으로 오던 중에 너희들이 서축이라 부르는 지방에서 용의 기운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에 대해 알고 있느냐?”
“자세히는 알지 못하오나 서축용가라는 유명한 장군가문이 있다는 것만 풍문으로 들었사옵니다. 혹여나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요?”
“서축용가라....”
서대륙인은 손가락으로 투명한 정령의 이마를 가볍게 때려 자리를 비키게 한 후에 몸을 일으켰다.
앉아 있을 때도 거대했지만 자리에서 일어서자 마치 산악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의 뒤에 선 노인도 작지 않은 체구였지만 그의 앞에 서자 마치 어른과 어린아이가 서 있는 모습이었다.
“동대륙에서, 서대륙에나 있을 법한 용의 기운을 가진 자를 만나 잠시 상념에 빠졌을 뿐이다. 비록 변덕스러운 마음에 경솔하게 선물을 주긴 했으나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구나.”
“예... 혹여나 소인들이 해야 할 일이라도...”
“아니다. 고작해야 말(馬) 한 마리를 주었을 뿐. 사막을 넘어와서 그런지 말이라는 동물이 참으로 반갑게 느껴지더구나.”
“예...”
“잠시 걷자구나.”
사내는 그렇게 말을 하고서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허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의 뒤를 따라 걷는 노인의 발자국에 촘촘히 눈길에 밟히는 반면에 그 보다 덩치가 배는 큰 그 서대륙인의 발자국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허공에 떠다니는 것처럼.
“내가 동대륙으로 온 이유를 알고 있느냐?”
“예. 서대륙의 마법사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언가를 느끼셨다고만 듣고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습니다.”
“음... 십 몇 년 전에 차원의 틈이 잠시 열린 일이 있었다. 그 차원이 어떤 것인지는 정확히 느낄 수 없었지만 기억을 쫒아 오랜 규칙(The Old Rulebook)을 찾아 확인해보니 지옥의 왕이 탄생할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혹시 이것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
꽤나 심각한 어조로 말을 한 까닭에 노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몇 년 전, 황태산의 주술사와 서대륙에서 온 마법사가 종남신전의 신물을 빌려 결계를 쳤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러고 보니.....”
“종남신전이라... 종남신전이면 생명의 신-아이넬라를 믿는 자들인가.”
“예. 그 봉인 결계를 쳤던 법사들의 말이 지옥의 신전이 있었다고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렇군... 이미 씨앗은 뿌려졌던 것인가.”
서대륙인은 그렇게 말하고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결계를 친 것은 잘 한 일이나 이미 씨앗은 이 세계로 뿌려지고 말았구나. 얼마 전에 기이한 기운을 느낀 적이 있었다. 비록 전쟁터에서 느껴진 기운이긴 했지만 지옥의 향이 났던 것으로 기억. 역시 씨앗은 전쟁터를 떠돌고 있는 것인가...”
“소인이 알기로 최근에 있었던 큰 전쟁은 한제국과 오크족 간의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래...”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허공에 뜬 채로 다리를 모으고 앉아 품속에서 알 수 없는 형태의 물건을 꺼냈다.
마치 자명종시계처럼 생긴 물건이었으나 알 수 없는 문양과 빛을 스스로 뿜어내고 있었다.
노인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사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이라는 그 사실하나 만으로 경외의 눈으로 그 물건을 바라보았다.
“쯧쯧..”
잠시 그 물건을 살피던 그는 가볍게 혀를 차고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나 혼자서 해결하기에는 일이 가볍지 만은 않구나. 신전, 아니 9대신전과 동방10도의 신물을 모두 모아 가지오고 주술사와 도사들을 모아라. 이제 곧 큰 혼란이 다가올 터 너희들은 그 때를 대비하여 백산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내가 이곳에 머무는 것을 허 하겠다.”
“정말이시옵니까? 감히 분부를 받들겠사옵니다. 소인들에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노인은 사내의 말에 크게 격동했는지 눈 속에 파묻히듯이 사내를 향해 크게 절을 하고서 머리를 들지도 못했다.
“아니다. 이 번 일은 그 만큼 중요한 것. 이곳에서 너희들이 얻어갈 수 있는 것을 얻어가는 것도 너희 들의 몫 일터...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시작하도록 하거라.”
백산은 이 세계에 몇 남지도 않은 차원의 통로가 위치한 곳
타 차원의 존재가 형체를 이루고 지낼 수 있는 곳이니 세계의 비의를 익히고 신의 뜻을 쫒는 자들이 이곳에서 지낼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값진 대가였다.
그랬기에 노인은 그에게 거듭해서 감사의 인사를 했다.
용악은 전혀 상상하지도, 짐작 할 수도 없는 곳에서 그를 둘러싼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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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 - 흑영기병대 - 257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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