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장
용악이 강백호와 헤어진지도 벌써 10일이 지났다. 정확히 10일인지도 몰랐다. 그저 오늘 불귀동 안으로 들어왔기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용악은 생각했다.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맞아.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들어오지 않고 용악은 혼자서 하루 일찍 들어올 수 있었다. 불귀동에 오래 있었으니 그 정도는 해도 된다는 의미로 해적들을 별말 하지 않고 사다리는 내려 주었다. 짜증스럽게도 불귀동을 지키는 해적들은 계속해서 바뀌었기에 그 동안 용악이 해적들에게 찔러준 돈만해도 정말 엄청났다.
‘그 빌어먹을 놈들은 그저 주는 것만 처먹고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고 말이야. 뭐, 해적들에게 많은 것을 바란 것이 잘못이지.’
그들이 아무리 기강이 잘 잡혀 군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본질은 해적이다. 해적이 괜히 해적이겠는가. 남들 등쳐먹고 사는 바다의 도적놈들을 해적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용악은 누군지도 모를 해적을 욕하며 불귀동 안을 정리하며 함정을 좀 더 가다듬고 땅속에 숨겨둔 젠국도를 꺼내 날을 간 다음 다시 묻고 난 뒤에 다시 땅에 묻고 그 위에 누워 잠을 잤다.
용악이 깨어났을 때는 사람들이 막 사다리를 타고 들어오고 있었다.
언제나 같은 모습이다.
어떤 자는 겁에 질린 모습.
어떤 자는 삶을 포기한 모습.
어떤 자는 누구든지 베어버리겠다는 모습.
어떤 자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모습.
지금까지 보아온 바로는 가장 먼저 죽는 자는 누구든지 베어버리겠다는 표정으로 살기를 흘리는 자들이었고 끝까지 남아 있는 자들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 자 들이었다. 그들이야 말로 자신의 실력에 확신을 가진 자들이다. 용악은 불귀동 한 귀퉁이에 누워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았다.
‘흐음. 이번에는 좀 힘들 것 같네.’
무표정한 얼굴을 한 사내들이 꽤 있었다.
한 오,육명 정도.
그들의 나이는 각각 다르지만 글쎄. 왠지 모르게 군인의 냄새가 난다고 할까. 그것도 예전에 허승대장군과 함께 있을때 느꼈던 그 특수공작군과 비슷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어려워, 어려워, 일단은 두고 봐야겠지.’
그리고 어느새 10일은 훌쩍 지나갔고 아니나 다를까 불귀동 주위가 시끄러워 지면서 해적들이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젠국어와 곤제국어 그리고 한제국어가 뒤섞여 있어서 뭐라 하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용악이 비록 이곳에서 젠국어와 곤제국어를 익혔기는 했지만 저렇게 술을 먹고 난 후 표준어가 아닌 익숙하지 않은 발음으로 빠르게 말하는 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불귀동 한가운데로 천천히 바구니가 내려왔고 하나씩 무기들을 꼬나 쥔 사람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난 10일간 아니나 다를까 3명이 죽었다.
이번에는 그래도 조금 적게 죽은 편이 이었다. 10명 가까이 죽은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용악은 오래전부터 죽은 듯이 누워 사람들이 하는 짓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있으면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잊어 먹고는 했다.
그리고 용악은 그 허점을 노렸다.
바구니가 땅에 떨어지자마자 한사람이 뛰쳐나간다.
역시다.
이곳에 온 뒤로 한 번도 저렇게 뛰어들지 않은 적을 본적이 없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과연 다 똑같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비명소리와 칼부림 소리가 불귀동을 가득 채웠고 바구니 주변에는 수북이 시체가 쌓였다. 역시나 용악이 살아남을 거라고 짐작 했던 이들은 모두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이가 든 중년도 혈기 왕성한 청년도 이제 노년에 접어든 장년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고수라는 점.
자신의 실력에 확신을 가질 정도의 고수라는.
하지만 다행이도 그들이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이들은 아마도 불귀동의 규칙을 모를 것이다. 그 동안 이곳에 있어보면서 알게 모르게 안 사실은 10일간 불귀동안에서 버티기만 하면 누구나 살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지막 날 해적들이 음식을 불귀동에 집어넣는 것은 그들의 유희를 즐기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불귀동 안에 있는 사람들을 서로 상장하게 만들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용악과 이련, 아저씨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그런 묵시적인 규칙을 모르기에 저 바구니를 향해 달려 들을 것이다. 한쪽 구석에 검을 무릎에 올려놓고 가만히 쓰다듬고 있던 중년인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드디어 말을 꺼냈다. 이 곳에 온 후로 처음 하는 말이다.
“자네들도 모두 군인이군. 아. 내가 나이가 많으니 말은 놓기로 하지. 자네들도 라고 한 이유는 나도 군인이기 때문이지. 큭큭. 비록 버려진 군인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하아. 늙으면 죽을 때를 안다고 하던가? 나는 지금이 내가 죽을 때라고 느껴지는 군.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세. 죽을 때 죽더라도. 왜 자네들은 왜 죽었는지 알고 죽어야 하지 않겠나?”
‘저건 또 무슨 말이야......’
용악은 군인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설마 진짜로 군인일 줄을 몰랐다. 용악은 무림인 보다는 군인이 더 상대하기 까다로워서 사실 군인이 아닌 무림인이기를 바란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군인들은 적을 죽이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한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명예라는 것을 쫒는다. 그랬기에 무림인이 상대하기 편했다.
‘그나저나 이 사람들 모두 버림받은 군인들이란 말이지. 그럼. 과연 싸울까 안 싸울까? 싸울 것 같기는 한데. 그들은 이곳에서는 오직 한 사람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 말이야.’
용악은 자신이 알고 있는 불귀동의 규칙을 말해 줄까 하다가 참았다. 묵시적인 규칙은 묵시적이기에 효력을 갖는 것이었다. 만약 자신이 뭐라고 말을 한다면 해적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그러면 오히려 더욱 살아날 확률은 적어진다.
‘그냥 말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용악이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그 중년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이곳은... 동해군도는 복마전이야. 이곳에 온 이상 누구도 살아 돌아 갈 수 없어. 왜 그런지 아나? 이곳에는 3국의 아니. 이제는 5국이라고 해야겠군. 5국에서. 쿨럭.”
‘아니!’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목을 붙잡고 옆으로 쓰러졌다.
‘누가? 어떻게 한 거지?’
용악이 놀란 눈으로 죽어가는 중년인을 바라볼 때 그의 뒤쪽의 거무튀튀한 벽이 껍질이 벗겨지듯이 벗겨지고는 구속에서 누군가 튀어 나왔다.
‘아... 나보다 일찍 들어온 자가 있었던가? 저것이 바로 자객의 은신술인가? 놀라운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왜 자객이 그를 노린 거지? 자객도 해적들에게 잡혀 들어왔나?’
용악은 빠르게 자객의 몸을 훑어보았다. 흔히 볼 수 있는 검은 옷이다. 손에 쥔 단검 빼고 다른 무기는 없었다.
‘그렇다면 해적들에게 잡혀 온 자객일 수도 있겠군.’
용악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 중년인 옆에 앉아 있던 자는 중년인이 고개를 떨어뜨리자마자 검을 날려 자객의 심장을 꿰뚫었다. 다른 이들 모두 그 자객의 출현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동안 그는 마치 자객이 그렇게 행동하리라는 것을 안 것처럼 자객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자객을 죽여 버렸다.
용악은 자객을 살펴보다가 갑자기 날아온 검에 자객이 찔리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이들은 모두 진짜 고수다.
용악이 상대 할 수 없을 만큼.
심기도 예측할 수 없다.
모두 무표정에 한마디 말도 하지 않으니.
“쥐새끼 한 마리가 어디 있나 했더니 거기 있었군.”
그는 낙막한 목소리로 약간 어눌한 한제국어로 말을 했다.
‘젠국인 인가? 목소리가 젠국인 인 것 같은데.’
“너희들 모두 어딘가에서 파견된 놈들이겠지? 나는 너희들을 정말 증오하고 너희 나라를 증오한다. 이리저리 우리 젠국인들을 이간질 시켜 통일을 막고 있는 너희들을 말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큭큭큭 거리며 손으로 머리를 집으며 웃었다.
‘뭐가 웃긴다는 거지? 그런데 한제국이 젠국의 통일을 방해하고 있었나? 왜? 라는 질문은 조금 어리석군. 당연한 건가. 그런데 저 녀석도 결국은 자기 나라 아. 아니군 나라는 없으니깐. 자기 주인에게서 버림받은 것 아니야? 그런 주제에 저런 말을 하다니.’
그는 웃음을 그치고는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자를 향해 검을 날렸다.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는지 공격을 받은 자는 머리로 날아오는 검을 살짝 피하고는 자신의 검으로 젠국인의 다리를 노렸다.
하지만 뒤로 날아가던 검은 갑작스럽고 완벽하게 거의 한 바퀴를 돌듯이 방향을 바꾸고는 검을 막던 자의 머리를 뒤에서부터 앞으로 뚫어 버렸다.
“이걸 바로 제비자르기라고 하는 거지.”
젠국인은 그의 머리를 관통한 검을 뽑아내고 검에 묻은 피와 뇌수를 죽은 자의 옷에 닦아 내면서 조용히 말했다.
아마도 아무도 자신의 말을 못들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 저게 제비 자르기구나. 용악은 언젠가 곽철에게 들었던 젠국의 십대검객의 기술 중에 제비자르기 라는 기술이 있다고 들은 것 같았다. 대체 곽철형은 어떻게 그런 것을 다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저 자는 십대검객 중 하나는 아닌 것 같아 보이니 아마 그의 제자쯤 되리라. 용악은 그가 펼쳐 냈던 그의 검로를 다시금 되새겼다.
알아두면 언젠가 필히 도움이 되리라.
용악이 그렇게 그의 검로를 되새기는 동안 그 자는 다른 자에게 다시 검을 날리고 있었다. 그 검을 받은 사람은 꽤 젊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는 능숙하게 그의 검을 받아 치고 있었다.
‘어? 저건. 그 청년이 펼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사관관에서 배운 육가창식과 비슷했다. 아마도 육가도식이나. 육가검식 정도 될 것이리라. 그러면 흠... 저 사람은 한제국에서 파견된 사람이라는 말인가? 그것도 사관관 출신이? 무엇을 위해서?’
용악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자리에 앉아 있던 나머지 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 젠국무사를 상대하던 그 청년에게 검을 던졌다.
말 그대로 검을 던졌다.
하지만 꽤 잘 던졌기에 검은 정확하게 그의 다리에 꽂히며 깊숙이 다리를 뚫고 나가 땅에 박혔고 젠국무사는 손쉽게 그의 목을 갈랐다.
그는 검을 뽑아 옷에 닦으면서 검을 던지 자를 바라보았다. 마치 왜 그랬냐는 듯 표정 이였다.
“아. 저 녀석은 한제국군이거든. 그리고 나는 한제국군에 불만이 많으니깐 쉽게 죽이는 게 낮지.”
그는 땅에 떨어져 있는 주인 잃은 도(刀)를 주워 들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했다.
‘설마 그게 다야? 어차피 죽일 거면 힘이 빠진 다음에 죽이는 게 낮지 않을까?’
용악은 그런 의문을 가지기는 했지만 저 사람이 저렇게 행동한 것은 저사람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용악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다른 생각들을 정리하고 이제 둘 밖에 남지 않은 전장을 살폈다.
‘훗. 전장이라. 그래 이곳이 바로 전장이지. 죽고 죽이는 전장. 죽여야만 살 수 있는 전장 이지. 그래도 다행이네. 나한테 신경을 쓰지 않으니깐 말이야.’
둘은 용악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서로서로 검을 맞부딪혔다.
한 발짝 나아가면서 한 번 공격.
한 발짝 물러서면서 한 번 방어.
대단했다.
둘 모두 이곳에서 나가면 고수소리를 들을 만한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한번 움직일 때 마다 한칼을 휘두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용악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노리고 날아오는 검을 바라보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용악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아니 하기는 한다. 하지만 오래 버티지 못한다. 많이 버티면 한 10합이나 20합정도.
하지만 저들은 계속해서 그렇게 맞부딪히고 있었다.
젠국무사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흐르는 듯 했다.
‘역시 저 녀석도 무사라는 건가? 칼을 휘두르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지독한 놈들.’
얼마나 시작이 지났을까.
두 사람의 옷이 엉망이 되고 두 사람의 몸에는 이리저리 칼이 남긴 핏자국이 마치 선을 긋듯 그어져 있었다. 잠시 공방을 멈춘 두 사람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있을 때. 위에서 뭐라뭐라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니다.
소리치는 소리는 아까부터 계속 들려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목소리의 느낌이 다르다. 이번에는 공포에 질린 목소리다.
‘공포? 공포라고? 무엇에? 무엇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