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四章 외도가족(外逃家族) (1)
- 밖으로 도망간 가족
쉬이이잇!
홀리는 빠르게 움직였다.
거칠 것이 없다.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다른 사람과 만날 일은 없다.
십 장 앞에 있는 사람도 알아챈다. 그러니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질주할 수 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
여덟 개의 횃불 그리고 마지막으로 외따로 떨어진 하나의 횃불.
불난 집에서 외따로 떨어진 횃불을 일직선으로 연결하면 만날 지점이 나온다.
마을을 벗어나서 일직선으로 연결된 선을 따라 쭉 달리다 보면 만나기 편한 장소가 나올 것이다.
이미 장소를 선정한 후에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쉬이이잇! 쉬잇!
홀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치달렸다.
마을을 휘돌며 어림짐작으로 마지막 횃불이 일어난 곳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신형을 쏘아냈다. 그때,
“여기다.”
나직한 음성과 함께 한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마을에서 벗어나 작은 숲을 휘돌 때였다. 숲에서는 밖을 살필 수 있지만, 밖에서는 숲을 보기 힘들다. 사방을 감시하기 딱 좋은 위치로 보인다.
‘큰 오빠……’
홀리는 웃음을 지어 보이려고 했다. 자신도 모르게 안도감이 떠오르기도 했다.
나타난 사람이 일자라서 다행이다.
일자는 말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형제들을 다독이며 보살피는 편이다.
개인의 사생활에 깊이 들어오지는 않지만, 곤란한 일이 생기면 암중에 도와준다.
그에 비하면 이자는 완전히 남남이다.
아버지는 같을지라도 어머니가 다른데 무슨 형제냐고 말한다.
형제들이 가까이 다가가려고 해도 본인 스스로 멀어진다.
그래도 음문촌 형제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사람을 꼽으라면 일자와 육자다. 육자는 동네 친구처럼 가깝고, 일자는 제대로 된 오라비 행세를 한다.
“왔구나.”
“오라고 했잖아요.”
홀리가 싸늘하게 말했다.
마음으로는 다정하게 말하고 싶다. 하지만 싸늘하게 대하는 것이 일자도 편할 것이다.
지금 이 자리…… 결코 좋은 뜻으로 온 것 같지 않아서다.
“화내지 마라. 우리가 이렇게 되리라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일 아니냐.”
“화내지 않아요.”
홀리가 여전히 싸늘하게 말했다.
“화났는데? 네 표정 보면 알지.”
“무슨 용건인지 말해줄래요?”
홀리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일자에게 굳이 이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
음문촌과 인연을 끊었지만, 그래도 우연히 길에서 만나면 차라도 한 잔 같이 할 수 있는 사이다.
일자와 육자에게는 악감정이 없다.
“후우!”
일자가 큰 한숨부터 내쉬었다.
역시 내키지 않은 일을 하러 왔다.
일자는 모든 명령을 다 받는다. 죽으라는 명령까지도 받을 사람이다.
아니, 그런 명령을 받으면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처럼 인상을 찌푸린다는 것은……
일자 자신도 내키지 않는 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스읏!
일자가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아버님 전갈이다.”
“아직도 내게 무슨 볼일이 남았나 보네요?”
“경고하는데, 이 서신은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일자가 무심을 가장하며 말했다.
“그러면 꺼내 보이지를 말았어야죠. 보라고 서신을 꺼냈으면서 보지 말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 서신을 보게 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될 거야.”
“무슨 내용인지 알아요?”
“모른다.”
“내용도 모르면서 겁부터 주는 거예요?”
“아버님을 알잖냐. 확신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분이다. 너에게 이것을 주면 너는 반드시 움직일 거라고 했다. 그만큼 자신 있다면 말씀이겠지.”
“그러면 불은 왜 놨어요?”
“명령이니까. 후후! 부모와 자식 간에 명령을 주고받아야 하는 사이라는 게…… 신호를 보내기는 했지만 네가 무시하기를 바랐다. 너라면 무시하리라 생각했는데…… 후후! 이 부분도 아버님 판단이 옳았네. 오고야 말았어.”
“착한 척하지 마세요. 어울리지 않아요.”
“그렇지. 지금에 와서……”
일자가 서신을 내밀었다.
홀리는 서신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일자는 즉시 뒤돌아섰다.
곁눈질로라도 서신 내용을 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일자 스스로 이런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내용을 보지 말라는 것도 아마 음문촌장의 명령일 것이다.
‘고지식한 사람.’
일자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홀리는 일자를 흘깃 쳐다보면서 서신에 눈길을 주었다. 하지만 소신을 읽은 그녀의 낯빛은 대번에 확 변했다.
눈썹이 일그러졌다. 눈꼬리가 상큼 추켜 올라갔다.
어금니가 꽉 깨물어졌다.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서신을 들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린다.
“이 늙은이…… 지금 어디 있어?”
홀리가 잘근잘근 씹어뱉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음!”
일자는 신음부터 흘렸다.
서신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 있게 내민 서신이지 않나.
서신을 보면 홀리는 움직이지 않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맞는 것 같다.
“돌아가거라.”
일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이 늙은이, 어디 있냐고!”
“음문촌에서 벌어진 일들…… 너하고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안 되겠니?”
“늙은이가 어디 있는지나 말해!”
홀리가 이를 악다물며 말했다.
“휴우!”
일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돌아가기는 틀렸다. 홀리가 분노에 가득 차 있다. 도대체 무엇이 홀리를 이토록 분노케 할까.
글 몇 줄로 사람을 이렇게 바꿔 놓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일자는 음문촌에서 벌어진 일은 낱낱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알기로 홀리를 이렇게까지 만들 일은 없다.
단연코 없다. 무엇이 홀리를 분노케 하나.
“홀리, 이건 정말 마지막으로 하는 말……”
“안내나 해. 그 늙은이, 나 어쩌지 못해. 날 건드리면…… 이번에는 나도 용서 없이 죽여버릴 거야. 음문촌에서 혈마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어림도 없어.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기면 오라버니는 빠져. 내 옆에서 알짱거리는 놈들은 모두 죽어. 이번에는 정말 용서하지 않아. 음문촌을 아예 뿌리 뽑아버릴 거야.”
홀리가 이를 부드득 갈며 악담을 늘어놓았다.
홀리는 정말 분노하고 있다.
그녀는 아버지 때문에 죽음 직전까지 치 몰린 적이 있다.
그녀를 정말로 죽일 생각이었다. 그때도 홀리는 아버지를 ‘늙은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늙은이’라는 말은 홀리가 하는 말 중 최악의 욕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죽여버리겠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어쩌면 음문촌은 피로 물들지도 모른다.
“가자.”
일자가 뒤돌아섰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홀리도, 음문촌도.
아마도 이 길이 홀리와 음문촌이 함께 걷는 마지막 길일 것이다. 이 갈의 끝에는 한 사람만 서 있게 될 것이다.
홀리든 음문촌이든. 아버지가 생각한 대로 혈마가 된 홀리를 음문촌이 부리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끝이다.
‘그래. 끝은 네 손으로 맺는 것도 좋겠지. 후후!’
일자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홀리를 만난 후에 알았다. 그녀가 정말 무서운 고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홀리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척을 읽지 못했다.
두 눈 부릅뜨고 신호를 지켜보지 않았다면 홀리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홀리 앞에 서니 주눅이 든다.
이런 일은 결코 없었는데…… 무인이 다른 사람에게 기세에서 밀린다. 싸우면 질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런 마음이라면 검초인들 제대로 펼칠 수 있겠나.
홀리는 이미 음문촌이 상대할 수 없는 고수가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사용하는 것은 무공이 아니다. 서신 몇 줄이다. 그것으로 이미 홀리가 동요했다.
서신 내용에 글 몇 줄 더 보태면 홀리라도 옭아 매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누가 이길까? 이 싸움은.
쉬이이잇!
일자가 신형을 쏘아냈다.
홀리가 따라온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인기척이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하지만 쫓아오고 있을 것이다.
뛰는 소리를 완전히 감춘 채,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조차 숨긴 채 뒤쫓아온다. 그것도 바로 등 뒤에 있을 것이다.
‘혈마가 무섭긴 하군. 후후!’
일자는 피식 웃었다.
스읏!
해자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길! 음문촌하고 또 엮이네.”
해자수는 못마땅한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음문촌하고 엮어서 좋은 게 하나도 없다.
그 사람들은 악의 뿌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에 찌들어서 개선의 여지가 전혀 없다.
“그것참…… 이런 일이 있으면 상의 좀 하실 것이지.”
해자수가 툴툴 웃었다.
해자수는 음문촌의 신호 방법을 알고 있다.
일자와 홀리는 해자수가 가족 간의 신호 방법을 모를 것으로 생각한 모양인데…… 천만에!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음문촌이 하는 일이라면 숨만 쉬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마을에서 불이 났을 때, 해자수는 한 가지 생각만 했다.
‘무시하세요. 무시. 무시가 최곱니다. 아예 신경 뚝 끊어버리고 잠자리에 들어요.’
해자수는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안다.
홀리를 모를까.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는 혈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숨어있다.
아버지를 믿고, 형제를 믿는다.
싫어하고 증오하면서도 믿는다.
홀리는 신호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만나자는 부름에 기꺼이 응할 것이다.
만나보기만 하는데 무슨 일이 있겠냐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불행의 시작이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 홀리가 움직였다.
해자수는 홀리가 감지하지 못하도록 거리를 뚝 떼어놓고 미행했다.
미행? 불가능하다. 혈마는 혈마를 미행하지 못한다.
이쪽에서 감지하는 거리와 저쪽에서 감지하는 거리가 같다. 특히, 혈마는 기척을 탐지하는 게 아니라 생기를 탐지한다.
생명체의 존재 여부를 알아챈다.
혈마 간에도 무공 차이는 존재한다. 호발귀가 다른 혈마보다도 훨씬 강하다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등여산이나 홀리, 해자수는 판수나 여괴보다 강하다.
하지만 홀리와 등여산의 무공은 비등하다.
무공의 깊이로 해석하면 안 된다. 무공으로 논하면 혈맥참을 감당할 수 없다.
홀리가 손끝만 움직여도 해자수 같은 사람 서너 명은 쓰러진다.
하지만 생기를 탐지하면 그 차이가 일순간에 좁혀진다.
무공이라는 기존 틀을 벗어나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병기로 무장하게 된다.
해자수가 홀리를 뒤쫓았다면 산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발각되고 말았을 것이다.
해자수는 홀리를 쫓지 않았다. 신호가 터진 마을로 곧장 내려왔다. 신호를 환히 꿰뚫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홀리와 음문촌이 어디서 만날 것인지도 짐작한다.
홀리와 일자의 만남,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다. 홀리는 다시 음문촌하고 엮이기 시작했다.
“불길한데. 지금은 그 늙은이가 별것 아니어도…… 치명적인 수만 둔단 말이야.”
해자수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음문촌장은 이번에도 분명히 치명적인 함정을 팠을 것이다.
아니, 이번에는 조금 다르려나? 홀리가 혈기를 다룰 수 있으니.
“그래도 상의는 하고 움직이셨어야지. 섭섭하네.”
쉬이이잇!
해자수는 일자를 쫓아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해자수는 홀리를 미행하지 않는다. 홀리를 따라가다가는 당장 발각된다.
홀리의 감지 거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자의 생기가 가물가물하게 느껴질 정도로 거리를 뚝 떼어놓은 채 천천히 뒤쫓아간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슈.”
해자수는 이령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산에서 내려오기 전에 급히 궁충에게 말 몇 마디를 남겼다.
- 음문촌에서 아씨를 불러. 난 아씨에게 가야 해. 호발귀 보고 빨리 움직이라고 해.
워낙 시간이 촉박해서 횡설수설했지만, 호발귀라면 알아들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자신의 뒤를 쫓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벌써 앞서갔거나.
스스스! 스스스슷!
해자수는 일자를 쫓아서 빠르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