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五章 만연개래(蔓延開來) (3)
뚜벅! 뚜벅! 뚜벅!
암동에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보폭이 일정하다. 땅을 딛는 소리가 가볍다. 발이 빨리 떨어지지 않는다. 진중하다.
발걸음 소리로 다가오는 사람의 무공 깊이를 엿볼 수 있다.
철컹!
묵직한 자물쇠가 열리고 평생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석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사람이 들어섰다.
“오셨어요?”
천원주는 기다리고 있다가 놀라지 않고 목례를 보냈다.
뚜벅! 뚜벅!
진중해 보이는 노인, 천살단주가 안으로 들어섰다.
“좀 지낼만한가?
“그럭저럭요. 오랜만에 혼자 있으니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많고…… 나쁘지 않아요.”
천원주가 활짝 웃었다.
천살단주가 다소 놀란 듯 천원주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풋풋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곱군. 자네는 어떻게 이런 데 있으면서도 이리 고와. 세상 남자를 눈이 다 삐었지 않나 싶네. 그렇지 않고서야 자네 같은 사람을 홀로 내버려 둘 리 없지.”
천살단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단주님은 설마 저 좋다고 달려드는 사내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있었나?”
“많았죠. 하지만 제 못된 성격을 끝까지 견뎌주는 사내는 없더라고요. 전부 진저리를 치면서 도망가던데요.”
“허허허! 이해해. 나 같아도 도망갔을 거야. 자네 성격이 워낙 차가워야 말이지.”
“어머! 못된 사람한테만 차가운데.”
“그만! 그만! 허허! 말로는 자네를 못 당하겠어. 이 늙은이, 그만 좀 봐줘.”
천살단주가 웃었다.
“그래요, 그럼. 무슨 일이세요?”
“봐달라고 했다고 당장 정색하고 용건을 묻나? 자네도 참. 도망간 놈들 심정 이해하겠어.”
“다시 시작하시는 거죠?”
“아니, 아니.”
천살단주가 아니라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리고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검벽.”
“네!”
석문 밖에서 검벽주 임명강의 대답이 들려왔다.
“지금부터 참회동을 폐쇄한다. 누구를 막론하고 기웃거리는 자는 참살해라.‘
“네.”
임명강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순간, 천원주의 눈가에 기광이 번뜩였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단주가 이렇게까지 절대적인 명을 내리는 것일까? 단주와 함께 지낸 지 삼십 년이 넘었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천원주가 정색을 하고 천살단주를 쳐다봤다.
“먼저…… 사과하지. 내가 잘못 생각했어.”
“네? 무슨 사과를……?”
“모든 걸 다 사과하지. 내가 한 모든 일을 잊어주게. 자네를 이런 데 넣은 것도 그렇고.”
“……”
천원주는 천살단주를 쳐다봤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금 앞에 앉은 천살단주는 예전의 천살단주가 아니다. 많이 늙었고, 힘이 빠졌다. 갑자기 십 년은 더 늙은 것 같다.
천살단주가 말했다.
“이것 받게.”
천살단주는 묵직한 종이뭉치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지도지.”
“지도요? 어디 지도요?”
천원주가 말을 하면서 지도를 풀려고 했다.
그러자 천살단주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등을 지그시 눌렀다. 지금 펼치지 말라는 뜻이다.
“천살단이 생긴 게 얼추 이백 년은 됐지? 그동안 천살단주에게만 내밀하게 전해지던 게 있지. 그게 이거야. 여기 있는 곳들을 직접 가서 보고 와.”
천원주는 살며시 인상을 찡그렸다.
천살단주에게 어떤 비밀이 있다는 것은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천원주는 그 비밀이 혈마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혈천방처럼 혈마를 재현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또는 혈마를 잡는다는 핑계로 마공을 창안하는지도 모른다.
천살단주의 비밀은 천살단 무인들에게는 공유할 수 없는 사악한 것일 거다.
이 정도는 이미 눈치챈 상태다.
그런데 단주는 이상한 전제를 붙였다. 천살단이 생긴 이래로 단주에게만 내밀히 전해진 것? 그런 게 있을 수 있나? 천원주나 되어서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눈치도 채지 못했나?
“여기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천살단주만의 것이야. 한 바퀴 돌아보고 와. 그리고 자네 결심을 말해주게. 자네가 어떤 결심을 하든 들을 테니까.”
“단주님, 이건 제가 볼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천원주는 지도 뭉치를 단주에게 밀었다.
천살단주는 품에서 영패를 꺼내 내밀어진 지도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다시 그녀에게 밀었다.
“단주님!”
천원주가 깜짝 놀라서 지도에서 손을 떼었다.
평범한 영패가 아니다. 천살령(天殺令)이다. 단주의 신물 중 최상이다. 천살령으로 내리는 명령은 불복불가(不服不可), 반드시 받들어야 한다.
“참고로…… 호발귀가 혈마가 되었지.”
“기어이!”
“후후! 예전의 혈마가 아니야. 진짜 혈마야. 이백 년 전 혈마. 이 세상은 진짜 혈마를 맞닥뜨리게 됐네.”
‘이거였어!’
천원주는 단주가 갑자기 늙은 이유를 알았다.
“낭견대가 몰살당했고, 살단이 어린애처럼 마구 두들겨 맞았어. 이번 싸움에서 살아남은 자가 몇이나 될지. 한 십여 명쯤 될 것 같은데.”
“십여 명!”
천원주는 또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천살단주를 만난 지 일다경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몇 번을 놀라는지 모르겠다.
살단은 천살단의 주축 세력이다. 천살단의 힘이다.
그들이 다 죽고 십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면, 천살단은 무장해제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떻게 그런 일이?”
천원주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혈마가 나타나고 반 시진도 안 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지. 후후후! 꼭 양 떼 우리 속에 호랑이가 뛰어든 격이었어. 혈마는 닥치는 대로 쳐 죽였고, 살단은 도망가기 바빴고.”
“음! 그랬군요.”
“나는 태산진군(泰山眞君)을 원망할 생각은 없어.”
태산진군은 전임 천살단주다.
“태산진군은 혈마의 실체를 보지 못했지. 그러니 실수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금라천검(金羅千劍)은…… 원망할 수밖에 없네. 혈마의 실체를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면서.”
천살단주가 탄식했다.
금라천검은 제사대 천살단주다. 혈마가 자진할 때, 천살단을 이끌던 무림 맹주다.
천살단주의 말처럼 혈마의 실체를 본 유일한 단주다.
“뭘 원망하시는데요?”
“혈마를 연구한 것. 그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대신에 다른 명령을 내렸어야지. 혈마를 보는 즉시 죽이라고 말이네. 그랬다면 혈마록이 우리 천살단에 왔을 때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태워버렸을 거야. 호발귀가 혈마록을 외웠다고 했을 때, 이 참회동에 가두는 대신 죽여버렸을 것이고.”
천살단주는 혈마에게 단단히 기가 질린 듯했다.
혈마에 대한 태도가 아주 단호해졌다. 누군가가 혈마에 대해서 변호라도 한다면 당장 쳐죽일 기세다.
천원주는 솔직히 아직 천살단주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낭견대와 살단이 무너졌다고 하지만 혈마가 어떤 식으로 싸웠는지 모르니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살단이 십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로 혈마가 얼마나 난폭했는지 대충 짐작만 할 뿐이다.
“혈마를 이길 자는 없어. 후후!”
“이길 자는 없어도 이길 방법은 있을 거예요. 지금부터라도 찾아볼게요.”
“후후! 그래. 자네의 그런 점이 좋아. 여기를 돌아보고 폐쇄할 것은 폐쇄하고, 남길 것은 남기고. 자네 마음대로 해.”
“단주님, 그건!”
“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내가 단주직을 내려놓겠다는 게 아니야. 나는 아직도 할 일이 있네. 그래도 천살단주를 맡고 있으니 혈마를 제거해야 할 거 아닌가.”
“네. 그러셔야죠. 걱정했어요.”
“하지만 역부족인 것도 사실이야. 나도 혈마 앞에서는 일초지적이나 될까? 나도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자네도 방법을 찾아봐. 천살단도 확 바꿔보고.”
“일단 말씀하신 대로 이곳들을 돌아볼게요.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돌아보고 난 다음에. 다시 뵙게 되면 그때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 친구, 뭐라고 불렀지?”
천살단주가 문득 말했다.
“밀운이라고 합니다.”
“내가 검벽주에게 내린 명령을 들었으면서도 물러나지 않았어. 자네를 정말 염려하는군.”
“죄송합니다.”
“자네가 왜 사죄해. 사죄는 저놈이 해야지. 검벽주 이놈도 명을 받아놓고는 베지 않아. 요즘 내 명령이 이래. 후후! 저놈, 자네 곁에 꽤 오래 있었지?”
“네.”
“사람을 너무 음지에 두는 것도 좋지 않아.”
“네,”
“참! 호발귀가 적어준 혈마록은 내가 불태웠네. 혈마록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마물이야.”
“네, 알겠습니다.‘
천원주가 대답했다.
”밀운, 단주님 말이 사실이야?“
“네. 사실입니다.”
창밖에서 밀운이 대답했다.
“어떻게 된 건데? 사실대로 말해봐.”
밀운은 천원주가 참회동에 갇힌 순간부터 탄광에서 살단이 몰살당하기까지의 긴 이야기를 차분히 말했다. 눈으로 본 듯이 자세히 보고했다.
“혈마가 갱도에 갇힌 것은 사실입니다. 단주님께서 사실 그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후에는 귀무살이 운집하고 있습니다. 귀검은 여전히 왕홍탄광에 있고, 혈마와 함께 있던 홀리, 해자수, 도천패, 당홍은 귀검과 합류한 것 같습니다.”
“책사는?”
“한수에서 홀로 떨어져 나와 정암사로 갔습니다. 운지암에 머물고 계십니다.”
“가서 책사를 불러와.”
“책사님을요?”
“책사도 호발귀가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아. 이미 혈마가 됐으니까. 단주님도 마음을 돌리셨고…… 책사도 호발귀가 혈마가 되어서 떠도는 것은 원하지 않아. 지난 일은 다 덮을 때야.”
“알겠습니다. 다녀오긴 하겠습니다. 하지만 오실지……”
“내가 오란다고 해.”
“그 말씀도 전하겠지만……”
밀운이 영 자신 없어 했다.
천원주는 천살단주가 내준 천살령을 먹물에 묻혔다. 그리고 종이에 꾹 눌러 찍었다.
“이걸 보여줘. 그러면 돌아올 거야.”
“네. 그럼 원주님께서는 정말 그곳을 돌아보실 생각이신지? 제가 모시고 싶은데요.”
천원주는 지도를 만지작거렸다.
“여기 뭐가 있는지 모르지만…… 단주님이 금라천검을 원망하셨어. 그러니 혈마에 대한 것일 거야. 그동안 단주님이 우리한테 비밀로 했던 것들, 혈마에 대한 모든 게 다 있을 거야. 단주님이 큰 결정을 하셨어. 이건 나 혼자 처리해야 해.”
“알겠습니다. 그럼 무사히.”
“책사를 데려오는 일이 날 따라오는 것보다 중요해. 반드시 데려와. 묶어서라도.”
천원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천원주는 떠나기에 앞서서 약전에 들렸다.
“살단주는 어때요?”
“상처가 워낙 심해서. 아직 생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약전주가 공손히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내세요.”
“허어! 인명은 재천인데…… 최선은 다하겠습니다.”
“절대로 죽으면 안 돼요. 약전에 있는 약을 모두 써서라도 살려내세요. 정 안 되면 염라대왕에게 사정이라도 해서 명줄을 되찾아 오세요.”
천원주답지 않게 강경한 말이다.
“죄송하지만 살단주를 왜 반드시 살려야 하는지 이유라도 말씀해 주시면.”
“살단주는 천살단 제일 무인이에요.”
천원주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시 말했다.
“살단주가요? 허허! 제가 무공은 얕습니다만, 그래도 저 역시 무인인데.”
천원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주치균의 무공 잠재력은 그 누구도 따를 수가 없어요. 단주님이 가장 껄끄러웠던 무인이 전임 살단주 오택골일 것 같아요? 아네요. 주치균이에요.”
“네에?”
약전주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약전주는 누구보다도 사람 골격에 대해서 일가견이 있다. 무재(武才)를 알아보는 눈이 높다. 그의 눈에 주치균의 무재는 상중(上中)이다. 뛰어난 편에서 중간이다.
“주치균은 아직 알 속에 잠들어 있는 용이에요. 무령환살공을 써서 혈마를 잡았다고 했죠?”
“네.”
“무령환살공이 아무나 수련할 수 있는 건가요? 천살단에서 무령환살공을 수련한 사람은 단주님하고 주치균뿐이에요. 그것도 단주님은 십 년 동안 터득한 것을 주치균은 단시일에 성취했죠.”
“몰랐습니다.”
“살단이 무너진 지금 주치균이 없으면 우리 천살단은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 반드시 살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약전주가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