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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전인-372화 (372/500)

第八十五章 만연개래(蔓延開來) (2)

“앗!”.

등여산은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눈앞에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다.

굉장히 잔인하게 죽었다.

맨 처음. 방문을 열고 들어선 사내는 목에 나무젓가락이 꽂혀 있다. 머리는 탁자로 짓이겨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고, 척추도 반으로 꺾였다.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다. 팔다리가 완전히 꺾여서 너덜거린다. 목뼈도 분질러졌다.

죽은 자는 모두 다섯 명이다.

방안에서 세 명, 밖에서 두 명이 죽었다.

병기에 찔린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섯 명 모두 권각술에 맞아 죽었다. 단순히 급소를 때려서 죽인 게 아니다. 사지가 성한 시신이 한 구도 없다.

“이게! 이게!”

등여산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푸른 빛…… 털어주기만 했는데.

자신이 이들을 손댔다. 이들에게서 음심을 털어냈다. 흉악한 살심을 정화시켰다.

그럼 이들은 누가 이렇게 죽였나?

“난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야.”

등여산의 입에서 부정하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손대기 전, 이들은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이들이 불편하게 했고, 생기로 음심을 털어준 기억이 난다. 그 후…… 이들은 이런 모습을 죽어 있다.

“난 아니야!”

등여산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아침 산책을 하던 산 정상을 향해 치달려 올라갔다.

“내가 한 게 아니야!”

그녀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녀가 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생기에 침잠해서 저들의 몸에 깃든 푸른 기운을 털어냈다. 저들에게 손댄 건 자신이다.

저들을 왜 저런 식으로 죽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한 일은 맞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등여산은 어쩔 줄 몰라서, 이런 일이 처음이라서, 너무 황당한 일이라서…… 정신없이 뛰기만 했다.

등여산은 산정까지 단숨에 치달려 올라왔다.

산정은 변한 게 없다. 자신이 늘 앉았던 바위도 그 모습 그대로 놓여 있다.

휘이이잉!

차가운 바람이 분다.

밤이 깊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 떠 있고, 달빛도 환하게 비추고 있다.

그녀의 눈길은 자신이 머물던 운지암으로 향했다.

운지암이 어둠에 휘감겨 있다. 아무런 일도 없는 듯 완벽하게 살인을 감춘 채 적막하다.

‘내가 죽였나?’

등여산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아무래도 정황상 자신이 죽인 것 같다. 그런데 왜 죽인 기억이 전혀 나지 않지? 정말 죽였나? 안 죽였는데 죽인 것으로 착각하는 건 아냐?

그저 가볍게 푸른 빛을 털어준 기억은 나는데……

푸른 빛! 혈기!

“아!”

등여산은 혈마가 생각나서 불현듯 탄식을 토해냈다.

호발귀가 늘 입에 달고 살던 말이 푸른 빛, 생기였다. 혈마가 푸른 빛을 꺼뜨리라고 명령한단다. 푸른 빛을 꺼뜨리고 나면 사람이 죽어 있다고 했다.

자신도 같은 일을 했다.

자신은 누가 명령하지는 않았다. 푸른 빛을 꺼뜨리라거나 죽이라는 명령은 듣지 못했다. 다만 푸른 빛을 털어내면 사내의 그 음탕한 심성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는 생각은 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떨어져 나갔다. 푸른 빛을 털어내자 사내가 조용해졌다.

“아! 아!”

등여산은 털썩 주저앉으며 연신 탄식을 토해냈다.

이게 혈마였구나!

자신이 호발귀가 한 일을 그대로 하고 있구나!

등여산은 어떻게 된 일인지 단박에 깨달았다.

‘푸른 빛’이라는 말이 아니었으면, 그리고 푸른 빛을 보지 않았으면 도저히 연관 지을 수 없는데…… 호발귀가 늘 푸른 빛을 얘기했기 때문에 이 생각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저들은 자신이 죽였다.

“이걸 어떻게 해. 이제 나 어떻게 해!”

등여산은 망연히 별을 쳐다봤다.

하늘은 유난히도 밝다. 저 멀리서 별똥별이 떨어진다. 긴 호선을 그리며 별이 떨어지고 있다.

“아! 나 어떻게 해. 이제…… 내가 왜 혈기를…… 혈마 무공을 수련하지도 않았는데, 왜 혈기를……”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일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호발귀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에게서 떨어졌는데, 오히려 자신이 혈마가 되었다.

이 일이 호발귀에게, 그리고 무림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등여산은 일이 너무 커서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정암사와 운지암에 불이 환히 밝혀졌다.

시간이 자정에 가까워졌는데, 갑자기 대낮처럼 불이 밝혀졌다. 그리고 횃불을 든 사람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바쁘게 움직였다.

웅성대는 소리도 들렸다.

운지암에서 말하는 소리가 산정까지 들리는 것을 보면 상당히 놀란 듯하다.

‘시신이 발각된 모양이네. 대사님 미안해요. 암주님도 미안하고요.’

등여산은 광운대사와 운지암주에게 미안했다. 미안함을 넘어서 죄스러웠다.

그들은 무공을 모르는 선승이다. 일절 무공 같은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 분들의 청정을 자신이 깼다.

운지암주는 천일 묵언 수행까지 결행하는 중이었는데, 모든 수행이 오늘 하룻밤에 깨졌을 것이다.

광운대사는 또 무슨 죄인가. 절에서 살인이라니.

“후유!”

등여산은 한숨을 토해냈다.

아직도 저들을 자신이 죽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어디 티끌만큼이라도 기억이 나야 인정을 하고 말고 할 게 아닌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움직인 느낌조차 없는데 어떻게 시인하라는 말인가.

푸른 빛! 푸른 빛!

푸른 빛이라는 말이 발목을 잡는다.

분명히 푸른 빛을 봤으니, 그리고 자신이 푸른 빛을 털어냈으니…… 저게 만약 혈마가 한 짓이라면 그 혈마는 호발귀가 아닌 자신인 것이다.

등여산은 조용히 일어섰다.

저 일을 자신이 했든 하지 않았던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 이대로 수도만 하는 스님들에게 살인 사건을 맡길 수는 없다. 시신이라도 치워줘야 한다.

등여산은 어두운 산길을 저벅저벅 걸어 내려갔다.

“아미타불! 무사했군. 도대체 이 늦은 밤에 어디 갔다 오는 건가! 한참 걱정했잖아!”

광운대사가 한달음에 달려와 등여산의 손을 잡았다.

“네?”

등여산은 얼떨떨해서 되물었다.

“자네 방에서 살인이 벌어졌어. 살인이.”

“네?”

등여산은 다시 물었다.

“죽은 사람은 오늘 낮에 불공을 드리러 온 시주로 확인됐네.”

“불공이요?”

“재무 스님이 무심코 자넬 말한 모양이야. 우리 절에 절세가인이 머문다고 떠든 모양인데, 그 말을 듣고 얼굴이나 보겠다고 왔다가 변을 당한 것 같네.”

“아, 네……”

등여산은 말끝을 흐렸다.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 광운대사는 등여산을 추호도 의심하고 있지 않다.

“시신을 볼 텐가?”

“아뇨. 보지 않을래요.”

등여산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시신을 보라는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등여산이 무인이고, 천살단 책사였기 때문에 보라는 말을 했던 것이다.

시신을 보고 사인을 파악하면 흉수가 짐작되지 않겠나. 일종의 도움 요청이었다.

“굉장히 잔혹하게 죽였네.”

광운대사가 말했다.

“사람을 저런 식으로 죽일 곳은 혈천방밖에 없지. 아무래도 혈천방에서 사람을 보낸 것 같은데. 자네가 여기 있던 말을 입도 뻥긋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허!”

“혈천방이 아니어도 잔인하게 죽이는 사람은 많이 있어요.”

등여산이 말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 같아서 이렇게라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시신은 보지 않더라도 운지암주 좀 만나주시게. 운지암주가 괴소를 들었다고 하는데.”

“괴소요?”

“만나보고 뭐라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말해주시게. 일단 살인이 벌어졌다고 관부에 연락하기는 했는데……”

“네. 암주님을 만나볼게요.”

등여산은 차마 자신이 이들을 죽였다고 말할 수 없었다.

운지암주는 이번 일로 천일 묵언 수행을 깼다. 자신도 모르게 말을 하고 말았다. 낯선 자들에게 주먹질을 당할 때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살 떨리는 괴소를 듣자 그만 수행이 깨져버렸다.

암주는 불당에서 부처님께 절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승복을 바꿔입고, 안색도 경건했다. 가슴에 차고 있던 ‘묵언(默言)’이라는 푯말을 내려놓았지만, 여전히 입은 굳게 다물었다.

등여산이 조용히 다가가서 앉았다.

절을 하던 암주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등여산을 봤다.

암주는 안도의 표정을 지으면서 다가와 합장을 했다.

“무사해서 다행이네.”

운지암주도 등여산이 저지른 일을 알지 못했다. 자신을 보고 안색이 확 풀리는 것을 보면 안위를 염려했던 모양이다.

등여산은 암주의 수행 중단부터 염려했다.

“묵언 수행이 깨지셔서 어떡해요?”

“그거야 다시 시작하면 되지. 내 수양이 부족해서 깨졌는데 누굴 원망하나. 아미타불.”

“대사님께 들었는데 괴소를 들으셨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운지암주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 생전에 그런 섬뜩한 소리는 처음 들었지. 뭐라고 할까? 귀신이 키득거리는 소리? 귀신 소리를 들어봤어야 알지. 키키키! 크크! 뭐 그런 종류의 소리였는데, 웃음소리도 아니고 비명도 아니고.”

운지암주가 다시 치를 떨었다.

“보지는 못하셨고요?”

등여산이 자신 없게 말했다.

“보진 못했지. 그때 난 막 혼절에서 깨어나는 중이라.”

운지암주는 죽은 신도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이유 없이 두들겨 맞고 혼절했다.

하지만 괴소는 분명히 들었다. 막 정신을 수습하는 중에 들은 소리라서 의심도 했지만, 괴소가 너무 섬뜩해서 바로 생각났다. 괴소는 분명히 울렸다.

등여산은 바로 산에서 내려왔다.

광운대사는 혈천방에서 천살단 책사를 제거하기 위해 무인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등여산이 인제 그만 떠나겠다고 해도 잡지 않았다. 오히려 용채까지 넉넉히 주면서 부디 몸조심하라고 염려해 주었다.

죽은 사람은 관원이 와서 수습했다.

만석지기 신분이 만만치 않아서 일반 살인으로 쉽게 묻힐 것 같지는 않다.

관원도 흉수를 찾는 척은 해야 한다. 하지만 관원도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광운대사와 운지암주의 증언에 의하면 흉수는 혈천방일 것으로 생각된다. 혈천방을 건드릴 관원은 없다.

관원들이 시신을 수습해서 옮겨갔지만, 이 사건은 흐지부지될 것이다.

계속 머물고자 하면 머물 수도 있다.

등여산이 운지암을 떠난 것은 강한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천살단주는 자신의 움직임을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 주변에서 살인이 일어났다.

천살단주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살인이 어떤 식으로 벌어졌는지 알 수 있다. 죽은 사람들의 시신도 거둬 갈 수 있다. 그러면 당장 심상치 않은 죽음이라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이 죽음을 등여산이 일으킨 것이라고는 천살단주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주검은 그만큼 잔혹했다.

등여산의 손속은 이렇게 잔혹하지 않다. 사람을 죽이더라도 급소를 베어서 깨끗하게 쓰러뜨리는 편이다.

권각술을 사용할 때는 혼절만 시키지, 죽이지도 않는다.

죽일 상대에게는 검을 쓴다.

이들의 시신은 무지막지한 자가 몹시 화가 나서 마구 짓이겨 놓은 수준이다.

도저히 등여산이 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등여산 하면 떠오르는 게 혈마다.

등여산 곁에서 잔인하게 짓이겨진 시신이 발견됐다면, 혈마가 생각나는 것은 당연하다.

등여산 주위에 혈마가 있다.

당장 수많은 눈길이 따라붙을 게 뻔하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면 그런 점은 염려하지 않는다.

등여산은 자기 자신을 염려한다.

자신의 몸에서 혈마가 튀어나왔다. 호발귀 말처럼 푸른 빛이 보이면 혈마가 튀어나온다.

푸른 빛을 보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광운대사와 운지암주를 만났을 때는 푸른 빛을 보지 못했다. 천만다행이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많은 스님을 만났다. 역시 푸른 빛을 보지 못했다.

후우! 가슴을 쓸어내린다.

하지만 푸른 빛은 언제든지 튀어나올 수 있다.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

그것이 무서웠다.

‘이제 어디로 가지?’

그녀는 갈 곳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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