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十一章 촉동(觸動) (3)
“누가 왔다고?”
주치균이 눈살을 찌푸렸다.
“본단에서 사자가 왔습니다.”
부단주 손철목이 대답했다.
“사자가?”
주치균의 미간이 더 깊이 찡그려졌다.
사자는 단주의 명령을 가져왔다. 서신으로 보내지 않고, 직접 사람을 보내왔다는 것은 당사자를 대면하고 확실하게 명령을 전달하겠다는 뜻이다.
이 명령은 그 어떤 명령보다 우선한다.
단주가 직접 얼굴을 맞대고 명령하는 것과 같다.
주치균은 사자를 들이지 않고 잠시 생각했다.
“어떻게 할까요?”
“지금 어디 있어?”
“밖에 대기시켜 놨습니다. 운공 중이시라 사람을 들일 수 없다고 말해놨습니다만.”
“잘했어.”
주치균은 찌푸렸던 미간을 폈다.
지금 이 시점에 사자가 왔다면 어떤 명령을 전할 것인지 대충 예상된다.
활동 중지 명령일 것이다.
호발귀에 대한 접근, 혹은 공격을 차단하겠다는 뜻이다.
“호발귀는?”
“구림(鳩林)에 머물다가 지금은 상안(上鞍)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놈은 혈마다.”
주치균은 딱 부러지게 말했다.
“네.”
“전임 단주의 몸에 창을 쑤셔놓은 놈이야.”
“알고 있습니다.”
“이대는 놓아줄 수 없다. 일단 그놈이 혈마라는 걸 모두가 알아야 해. 지금부터 놈이 본색을 드러내도록 움직여볼까? 부단주, 놈에게 삼당(三堂)을 보내. 누구를 보낼지는 알아서 하고.”
“네.”
“삼당을 보내는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해. 놈을 죽이거나 생포하라는 게 아니야. 놈이 흉성을 드러내도록 유도해. 놈이 마성을 드러내서 거침없이 살인하는 모습을 모두가 알게 해주는 거야. 이 목적을 분명히 주지시키고, 바로 출발시켜.”
“네, 알겠습니다. 사자는 어떡할까요?”
“지금 운공 중이잖아! 운공 중인데 어떻게 사자를 만나. 출발하는데 반 각이면 되지?”
“충분합니다.”
“그럼 사자는 반 각 후에 들여.”
“네. 알겠습니다.”
부단주가 힘차게 대답했다.
부단주가 물러나자, 주치균은 미간을 다시 찌푸렸다.
단주가 인편으로 명령을 하달하려고 한다.
활동 중지하라, 호발귀를 쫓지 말라는 명령일 것이다
틀림없이 그런 명령이다. 그래서 먼저 공격 명령부터 떨어뜨렸다.
이미. 출발한 자는 쫓아갈 수 없다. 잡랑이 어떤 경로로 움직일지는 오로지 당주가 선택할 것이기 때문에 추후 명령을 내리기도 불가능하다.
공격은 무조건 이루어진다.
역시 예상이 옳았다.
“살단은 모든 활동을 중지하시라는 단주님의 특별 명령입니다.”
사자로 온 자는 형당 무인이다.
이런 일은 보통 검벽 무인들이 도맡아 하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형당 무인을 보냈다.
명령을 어기면 당장 징계를 하겠다는 위협까지 섞었다.
“뭐라고! 활동을 중지하라고!”
주치균이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그 말이 사실인가!”
“네.”
오히려 형당 무인이 얼떨떨해서 주치균을 쳐다봤다.
“이런! 이런! 벌써 공격 명령을 내렸는데! 부단주! 부단주!”
주치균은 밖을 향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부단주 손철목이 급히 달려왔다.
“내가 내린 명령 어떻게 됐어!”
주치균은 손철목이 모습을 보이기 무섭게 물었다.
“시행했습니다. 벌써 한 시진 전에 출발했는데요.”
“안돼! 단주님의 명령이다! 중지해!”
“불가능합니다. 당주는 최종 명령만 받을 뿐, 일하는 모든 과정은 당주 재량입니다. 지금 어느 쪽으로 움직였는지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으음!”
주치균은 신음을 흘리면서 털썩 주저앉았다.
“이거 참 곤란하게 됐잖아. 휴우! 할 수 없지.”
주치균이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토해냈다.
“자넨 이 길로 단주님께 가서 보고 들은 대로 고해. 공격 명령이 이미 내려진 후라서 명을 받들지 못했다고.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내가 진다고 말씀드려.”
“네 알겠습니다.”
사자가 급히 일어섰다.
주치균의 싸늘한 눈가에 한광이 번뜩였다.
활동 중지하라는 명령은 호발귀를 이용하겠다는 뜻이다.
호발귀를 어떻게 이용하나? 천살단에서 호발귀와 연결된 사람은 등여산밖에 없다.
등여산이 온다. 그녀가 호발귀에게 간다.
“엄청난 악연이네. 그렇게 끊고, 끊고, 끊어도 계속 이어진다는 건가? 단에 처박아 놨으면 그대로 있어야지. 왜 또 나와서 속을 뒤집어 놓나. 정말 이런 식으로 흘러가자는 건가?”
주치균이 주먹을 불끈 쥐며 부르르 떨었다.
* * *
호발귀는 호랑이다. 굉장히 강한 맹수다. 지금까지 강자라고 불렸던 사람들을 거칠게 물어뜯었다. 귀무살을 종이호랑이처럼 다루는 사람은 호발귀밖에 없다.
함부로 공격할 수가 없다
도천패는 힘센 곰이다. 엄청난 힘으로 칼을 휘두른다. 폭풍이 휘몰아친다.
웬만한 초식이나 병기쯤은 가볍게 짓뭉개버린다.
당홍은 독술 대가다. 셋 중 가장 경계를 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 목숨을 위협할지 모른다.
해자수는 여우처럼 민첩하다.
강한 자는 분명히 아닌데, 좀처럼 쓰러지지 않는다. 목숨을 빼앗기는 더 힘들다.
홀리는 무척 빠르다. 몸도 빠르고 검도 빠르다. 특히 중원 무학에서는 볼 수 없는 난해한 초식을 구사한다. 변화가 매우 낯설어서 대응하기가 어렵다.
호발귀와 같이 움직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당백이다.
이들을 공격하려면 곰도 산채로 찢는 괴력이 있어야 한다. 거친 칼을 짓뭉개는 난폭한 칼이 있어야 하고, 독에 중독되지 않는 기공도 필요하다.
공격하는 말은 떨어졌지만 공격할 방도가 없다.
“저거 뭐야?”
도천패가 인상을 확 찡그렸다.
길을 가는 도중에 이상한 사람들을 봤다. 아니, 이상한 광경을 봤다.
사람들이 한 줄로 묶여 있다.
한 사람이 묶인 줄에 다음 사람이 묶이고 또 다음 사람이 묶였다. 이렇게 십여 명이 할 줄에 굴비 꿰이듯 쭉 엮여 있다.
“뭐지?”
도천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고로 뭔가 특이하다 싶으면 딱 안 좋은 법이지. 저런 건 신경 쓸 것도 없어. 그냥 무시하고 가는 게 제일 속 편해.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골치만 아프다니까.”
해자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줄에 꿰인 사람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모두 지금과 같은 광경을 본 적이 없다.
줄에 꿰인 사람들은 기력이 탈진했는지, 사람이 몰려와도 고개를 들지 않는다.
호발귀는 그들에게 걸어갔다.
사람이 묶여 있는 것을 봤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기라도 해야 하지 않나.
“거참 그냥 지나치는 게 제일 좋다니까.”
해자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
호발귀도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무심히 지나칠 수 없다. 혹, 산적이나 비적에게 잡혀가는 것이라면 구해줘야 한다.
저벅! 저벅!
호발귀는 그들에게 다가서면서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숨어있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 포로만 남겨둔 채 도주했다고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분명히 주위에 누군가는 있다.
그때, 줄에 묶인 사람들이 발을 쿵! 하고 내디뎠다. 순간!
패애애애앵!
무엇인가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호발귀 앞에 있던 땅이 벌떡 일어섰다.
촥! 촥촥촥촥촥! 촥촥!
사방에서 땅이 일어섰다.
이들은 땅에 방패를 깔아놨다. 방패 위에 흙을 얕게 덮어서 흔적을 지웠다.
줄이 당겨지자 방패가 일어서며, 호발귀 일행을 가둬버렸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해자수와 홀리는 재빨리 뒤로 쭉 빠져나갔다.
호발귀처럼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것이 다행스럽게도 몸을 빼낼 수 있게 해줬다.
타탁! 촥촥촥! 타타탁!
땅은 계속 뒤집혔다.
줄에 연결된 방패가 일찍 일어서면서, 호발귀 일행을 사방에서 에워쌌다.
“쏴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늘에서 화살 한 무더기가 새카맣게 날아들었다.
쏴아아아아! 쒜에에엑!
수많은 화살이 방패 안쪽으로 빨려들 듯 스며들었다.
호발귀는 재빨리 방패 뒤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저들은 마치 그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방패 사이사이로 날카로운 창을 불쑥 끼워 넣었다.
방패로 다가서면 창이 기다리고, 가만히 서 있자니 하늘에서 화살이 떨어진다.
“이것들이!”
도천패가 단단히 화났는지 대도를 뽑아 들고 마구 휘저었다.
창대가 잘리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살이 퉁겨졌다.
도천패는 방패를 잡초 뽑듯이 와락 뽑아 들고는 대뜸 하늘로 들어 올렸다.
쏴아아아! 타타타탁!
화살 한 무더기가 방패 위로 떨어졌다.
“괜찮아?”
도천패가 물었다.
“괜찮아.”
당홍이 즉시 대답했다.
도천패는 방패를 뽑아내자 제일 먼저 당홍부터 가려주었다. 호발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정도는 충분히 알아서 하니까. 당홍도 알아서 하겠지만, 그래도 챙겨주고 싶으니까.
우둑!
호발귀는 두 발로 창대를 차서 부러트렸다. 그리고 몸을 방패에 바싹 밀착시켰다.
다다닥다닥! 타타탁!
화살이 방패 안으로 속속 밀려들었다.
‘응?’
호발귀는 문득 방패 안쪽으로 떨어진 화살 무더기 속에서 심지 타는 냄새를 맡았다.
‘화약?’
이제는 이 냄새가 무슨 냄새인지 잘 안다. 귀문 폭발 때문에 심지 타는 냄새에 민감해졌다.
“폭발!”
호발귀가 빽 소리쳤다. 하지만 그가 소리를 치는 것과 화살 무더기 안쪽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은 거의 동시였다.
꽈앙! 꽈꽈꽈꽝!
거센 폭발이 일어났다.
호발귀는 폭발을 느낌과 동시에 신형을 날렸고, 도천패는 방패 뒤로 몸을 숨겼다.
퍼엉!
거센소리와 함께 도천패와 당홍이 실 끊어진 연처럼 훌훌 날아가 떨어졌다.
도천패는 폭발 소리를 듣자마자 당홍을 꼭 끌어안고 납작 주저앉았다. 일단 두 사람 몸을 방패로 가렸다. 일차 방패로 화약을 막고, 이차 자신의 몸으로 폭발을 막았다.
그렇게 당홍을 보호했다.
“너 바보야!”
당홍이 재빨리 도천패의 상처를 살피며 물었다.
“사내자식이 제 여자는 보호해야지.”
도천패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도로 지팡이 삼아 꾹 누르며 일어섰다.
“이것들 가만 안 둬!”
당홍도 화가 치밀어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공격할 사람이 없었다. 기습을 감행한 잡랑은 이미 썰물 빠지듯 빠져나갔다.
잡랑은 미도회랑 오택골이 총주로 있을 때처럼 저돌적으로 돌진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굶주린 늑대처럼 달려들었지만, 지금은 치고 빠지는 작전을 능숙하게 구사한다.
총주가 바뀌자 잡랑 전법도 바뀌었다.
“이것들 뭐지?”
도천패는 폐허로 변한 주위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뭐긴 뭐야? 잡랑 잡졸들이지. 전에 이놈들 한 번 본 적 있어. 꼴이 더럽고 후줄근한 게 영락없이 노숙자야.”
뒤로 빠졌던 해자수가 다가오며 말했다.
“잡랑? 그럼 아직도 그때 원한을 잊지 않은 건가?”
해자수는 호발귀와 살단 총주의 싸움을 떠올렸다. 한데, 그 싸움…… 엄밀히 말하면 총주가 먼저 싸움을 걸어왔다. 멀쩡히 있는 호발귀를 먼저 쳤다.
“하참! 이렇게 되면 천살단하고 좋게 지내기는 틀린 거 아닌가? 그럼 책사라는 그 여자하고도 끝난 거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혈천방 공격하고 마누라도 생기고. 품앗이 다시 생각해 볼 때 아닌가?”
해자수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호발귀가 사나운 눈길을 보내자 움찔하며 물러섰다.
홀리가 말했다.
“앞으로는 그런 말 하지 마. 나도 자존심 있어. 먼저 사정하기 전에는 절대 말하지 마! 알았지!”
홀리가 해자수를 노려봤다.
“하! 왜 다들 나만 갖고 그러나? 이거 힘없는 놈 서러워서 살겠나. 큭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