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一章 진기이상(眞氣異常)(3)
안 돼? 뭐가 안 돼? 혈마가 살심을 이겨내기 위해서 자해하다가 그것도 부족해서 자진을 선택했는데, 그게 안 돼? 그러면 어쩌라고? 아무나 죽이라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도 등여산은 자신도 모르게 ‘안 돼!’라고 고함쳤다.
본능적으로 터져 나온 소리일 뿐, 아무런 의미도 담겨 있지 않다. 고함에는 방법은 없지만 죽는 게 유일한 선택은 아니라는, 굉장히 모순된 말이 함축되어 있다.
등여산은 급히 호발귀 옆에 다가섰다.
호발귀는 태양혈을 터트렸다. 하지만 지력(指力)이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
‘진기를 제대로 쓰지 못했어!’
등여산은 어떻게 된 일인지 단박에 알아챘다.
호발귀 정도 되는 고수라면 잠자면서 휘두른 손길조차도 실수하지 않는다. 자진하겠다는 특정한 목적을 지니고 손을 썼다면 반드시 죽었어야 한다.
그런데 호발귀는 살았다.
살심이 진기를 끌어가는 바람에 자진하는 데 필요한 힘을 모으지 못했다. 호발귀가 드러내고 있는 살심은 죽음조차도 밀어낼 정도로 강력하다.
이런 모습은 일반적인 상식에는 어긋난다.
생사보다도 강하게 끓어오른 살기.
등여산은 재빨리 호발귀의 완맥을 움켜잡았다.
몸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보려는 것이었는데, 등여산의 안색이 곧 어두워졌다.
‘맥을 잡을 수 없어!’
맥이 너무 미약해서 잡히지 않는 것이 아니다. 너무 심하게 들끓어서 잡을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살아있다.
‘어떻게 살리지?’
그녀는 부랴부랴 태양혈을 꾹 눌렀다.
우선 피가 흐르는 것을 멈추게 한다. 뒤틀린 진기는 어쩔 수 없지만, 몸에 생긴 상처는 치료한다.
몸이 낫고, 정신이 들면 다시 혈마가 되어서 날뛸지도 모른다.
그래도 등여산은 목숨을 살리는 데 집중했다.
원래 호발귀는 이용 도구다. 혈천방을 끝장낼 수 있는 강력한 살인 병기다. 그가 끝장을 내지 못해도 혈천방만 끌어내면 천살단이 마무리할 수 있다.
그런 용도로 중원에 끌고 나온 것인데.
지금은 모든 생각을 잊었다. 오직 호발귀라는 사람만 생각했다. 마인이든, 악인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절대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에만 집중했다.
호발귀는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굴복하고도 남았을 마공에 끝까지 대항했다.
살기에 무너지지 않았다.
죽여야 하는 상대가 천살단 책사 등여산이라서 참은 것은 아니다.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이 세상에 이런 사내는 흔하지 않다.
어떤 선승도, 어떤 정인군자도 이토록 지독한 살기를 의지로 견뎌내지는 못한다.
호발귀는 살아야 한다.
“후우우!”
등여산은 깊은숨을 토해내며 두 손에 진기를 운집했다.
그녀는 태산금나의 전인이다. 점혈에 밝다.
호발귀의 경혈을 점혈할 생각이다. 일단은 혼절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를 치료할 마땅한 방법이 없으니, 일단은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게 나을 것이다.
타탁! 탁! 타타탁!
먼저 가볍게 혈도를 타격해서 경맥 상태를 살폈다.
점혈에 앞서서 호발귀가 어떤 상태인지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내부 상태를 잘 모르고 점혈하면 자칫 전신이 마비되거나 사망하기도 한다.
“아!”
등여산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쏟아냈다.
경혈 타진을 해본 결과,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
호발귀의 경맥은 바윗돌처럼 단단하다. 피부에 철판을 덮어놓았는지 경맥이 짚이지 않는다. 혈도를 타격하면 무서운 반탄력이 일어나면서 점혈을 밀어낸다.
호발귀가 정말 정신을 잃은 게 맞나?
등여산은 전신 진기를 모두 모아서 펼쳐낸 지공을 호발귀는 정신 잃은 상태에서 받아낸다.
“혼절해도 이런데, 정신이 말짱했으면 어쩔 뻔했어. 경맥이 이러니 촌음명이 통할 리 있나.”
등여산은 탄식했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슈우우웃! 퍼억!
손가락에 진기를 끌어모아서 강하게 혈을 밀었다.
평소 같으면 호발귀를 점혈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호발귀가 혼절해 주었다. 마음대로 혈을 누를 수 있다.
그녀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다.
그녀는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를 놓칠 생각이 결코 없었다.
호발귀가 일으키는 반탄력보다 더욱 강한 힘으로 짓눌렀다. 서둘지 않고 한 군데씩 정성을 다해 점혈했다.
탁! 퍽! 타악! 퍼어어억!
혈도를 십여 군데는 점하고도 남을 시간에 겨우 두어 군데만 점한다. 그래도 점혈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계속 혈을 누르다 보면 혼절 상태를 유지 시킬 수 있을 것이다.
퍽! 슉! 퍽! 슈웃!
혈이 빠르게 점혈 되어 갔다.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는데, 여느 순간부터 평소와 다름없이 쑥쑥 점혈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신 경맥이 삼 할 이상 점혈 된 이후부터 반탄력이 현저히 감소하였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이르다.
호발귀는 저항을 포기한 게 아니다. 분명히 혈도가 점혈 되고 있는데, 완전히 점혈 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오직, 점혈하는 사람만 느끼는 감각이다.
뭔가 완벽하지 않다.
점혈은 깨끗하게 되는 것 같은데, 계속 찜찜한 기분이 든다.
이런 느낌이 들 때는 반드시 탈이 나기 마련이다.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놓치는 부분이 있다.
무엇을 놓쳤는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생각한다고 잘못된 부분이 찾아질 리 없다. 익숙할 대로 익숙한 점혈에서 탈이 생겼다면 손을 멈추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해도 찾아지지 않는다.
오직 온 정성만 쏟는다.
“하아!”
그녀는 점혈을 마치면서 큰 숨을 몰아쉬었다.
육신에 가할 수 있는 금제는 모두 가했다. 일단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남은 부분은 약으로 다스릴 생각이다.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혈마 무공이 일으킨 살기를 한낱 약물로 가라앉힐 수 있을까 의심된다.
느닷없이 살기가 일어난 것은 진기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이다.
특정한 혈도나 경맥을 자극하는 정도로는 정대로 살기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살기는 마음 영역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진기가 뇌를 자극해야 한다.
정상적인 사고 작용을 밀어내고, 비정상적인 사고를 정상적인 것처럼 오인시켜야 한다.
마약이라면 이런 작용이 가능하다.
혈마무공이, 혈마진기가 일종의 마약처럼 작용했다.
약물로 뇌를 평안하게, 정상적인 상태로 유도해야 한다. 이상반응을 보인 진기가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살기, 난폭함, 화남 등등의 마음 작용은 화(火)와 연관이 있다. 양기가 극상승하면 자신도 모르게 난폭함을 드러낸다. 혈마무공도 그런 작용을 했다면 보음(補陰)을 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대로 놔두는 것보다는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그녀는 동굴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아! 이런.”
입에서 당황스러운 음성이 새어 나왔다.
호발귀와 몇 차례 접전을 벌이면서 옷이 북북 찢어졌다.
당시에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벗은 것이나 다름없다.
가슴이 드러날 정도로 속살이 환히 보인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이런 몸으로 호발귀를 점혈했다. 알몸이나 마찬가지인데,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창피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등여산은 찢어져서 거치적거리는 옷을 벗고, 호발귀의 장삼을 벗겨서 걸쳐 입었다.
체격 차이가 워낙 많이 나서 장삼 끝이 발에 걸린다. 팔도 길고, 풍성하다.
동굴 안에서 달리 옷을 구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약초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동굴 입구로 걸어가서 살며시 밖을 살펴보았다.
도천패가 동굴을 지키고 있을 텐데, 보이지 않는다. 동굴 입구에서 버티고 있으면 발각되기 쉬우니 어딘가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 호발귀를 부탁하려고 했는데.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스으으읏!
그녀는 살며시 동굴 밖으로 나왔다.
몸에 맞지 않는 사내 옷을 걸치고 있어서 행동하기가 자유롭지 않다. 또 혹여 다른 사람 눈에라도 띄면 이상한 의심을 살까 봐 우려되기도 한다.
하지만 약초를 구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호발귀는 매우 위험한 상태다. 터지기 일보 직전인 용암 덩이나 마찬가지다. 휴화산이 아니라 활화산이다. 아직도 내부에서는 불길이 이글거린다.
빨리 약초를 구해서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
낯선 산이라서 약초가 어디 있을지 모른다. 또 원하는 약초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삼, 맥문동, 천문동, 석곡, 옥죽, 황정, 백합, 구기자, 상심자, 한련초, 여정자, 구판, 별갑, 흑지마, 저실자 등등 음기를 보하는 약초는 많다.
어느 것이라도 몇 가지는 있을 것이다.
스으읏!
등여산은 약초를 찾아서 움직였다
* * *
등여산이 몹쓸 짓을 당했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아주 안 좋은 일이 동굴 속에서 벌어졌다.
검벽주 주치균은 옷이 묻힌 땅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어서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땅만 보게 된다.
동굴 밖으로 나온 등여산은 제일 먼저 땅부터 팠다. 그리고는 잠깐 주위를 살펴보더니 북북 찢어져서 누더기가 되어 버린 옷을 땅에 묻었다.
옷이 찢겼다.
등여산이 호발귀의 장삼을 입고 있다.
주치균은 일부러 나서지 않았다.
지금 나서면 서로가 무안해진다. 등여산이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르는 척하는 게 낫다.
그런데 등여산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한다.
옷을 땅에 묻은 후, 주변을 살핀다. 약초를 채집한다. 마치 아무런 일도 겪지 않은 여인처럼 태연히, 차분한 모습으로 약초들을 채집하고 있다.
- 이거 먹을래?
- 뭔데?
- 보음단(補陰丹).
- 보음단? 여자들의 음기를 보충해주는 뭐 그런 약인가?
- 맞아.
- 그걸 내가 왜 먹어?
- 남자에게도 좋거든.
- 보음단이? 보음단은 여자에게 좋은 거 아냐? 남자에게 좋은 건 보양단이라고 알고 있는데?
- 안에 틀어박혀서 무공만 수련하는 사람이 양기는 강해서 뭐하게? 오히려 양기를 죽여야지. 안 그래? 빨리 먹어. 이걸 먹으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 빨리 먹으라니까.
석곡, 옥죽, 구기자…… 그녀가 보음단을 만드는데 필요한 약초들을 채집하고 있다.
호발귀의 양기를 죽일 생각이다.
등여산이 보음단을 내밀었을 때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사실 보음단은 사내가 복용해도 좋다. 보음단은 여자의 음기만 보해주는 것이 아니다. 음양의 기운을 조화롭게 조율해준다.
왕성하게 양기를 쏟아낸 호발귀를 위해서 음양의 조화를 일궈주려는 것이다.
옷이 발기발기 찢어졌다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을 당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무자비하고, 난폭한 사내를 위해서 보음단을 만들어 주려는 것인가.
“네가 괜찮았을 때, 난 아무래도 괜찮았다.”
얼굴에 자상(刺傷)을 당했다.
백옥처럼 매끄러운 얼굴에 흠이 생겼다. 이제는 미장부라는 소리를 듣기 힘들다.
그래도 괜찮았다. 등여산이 있었으니까.
“네가 흔들리니 내 마음에 악마가 일어난다. 후후! 호발귀…… 죽여야겠다.”
주치균의 눈빛에 암울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처음으로 등여산이 자신의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때가 되면 등여산을 아내로 맞이할 줄 알았는데.
그녀가 겁탈당한 일은 신경 쓰지 않는다.
등여산이 원해서 겁탈당한 게 아니다. 호발귀가 무력으로 밀어붙인다면 당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녀는 아끼고 감싸주어야 할 어린 사슴이다.
그런 것에 마음 상해서 꽁해 있을 좀팽이는 아니다.
문제는 등여산의 행동이다.
그녀는 나쁜 일을 행한 호발귀를 위해서 약초를 뜯는다. 옷이 발기발기 찢기고, 욕된 일까지 당했으면서 원망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호발귀를 미워하지 않는다.
주치균은 물끄러미 등여산을 쳐다봤다.
숲 깊은 곳에 숨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지켜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