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종장
세상은 계속 변화해 왔다.
정확히 말하면, 세상을 받아들이는 인간들이 변화했다는 게 맞으리라. 구파일련이 생기기 전엔 무림맹이라는 조직을 상상했던 이들은 없었다. 그런 연맹이 필요하리라 생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교와 혈교의 위협에서 정파 무림은 뭉쳤고, 무림맹이 탄생했다.
다음으로는 사파와 정파가 합심하여 만무학관을 만들었다. 처음엔 대체 왜 정파가 사파와 손을 잡아야 하느냐며 소리를 치던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중원 밖의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알려지게 되면서 중원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인식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괴이한 사술들을 보며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주군을 뵙습니다.”
황극린은 만무학관을 찾았다.
그를 반겨 주는 건 무림맹주이자 만무학관의 관주인 계립이었다. 그는 황극린에게 충성하였고, 이전의 무림맹주들과는 달리 변화와 혁신을 공격적으로 밀어붙였다. 무림맹 최연소 군사이자 최초의 여성 군사를 임명한 것도 그 발걸음 중 하나다.
“황 공자님을 뵙습니다.”
계립의 옆에는 제갈소희가 있었다.
“오랜만이오.”
황극린은 자연스레 상석에 앉아 두 사람과 대화를 시작했다.
먼저 보고를 시작한 건 제갈소희였다.
“지도가 조금씩 완성되고 있다고 들었소.”
“예, 여기 있습니다.”
본래 중원인들이 보던 지도는 중원의 지형을 중앙에 박아 놓고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작게 ‘부족’처럼 표시했을 뿐이다. 중원을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했던 강호인들의 인식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중심은 중원이 아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바다. 아시다시피 그곳을 건넌다면… 더 큰 ‘대륙’이 존재하리라 판단하고 있답니다. 그곳엔 아마도…….”
“더 큰 마경이 있겠지.”
황극린은 서쪽의 거대 세력 중 하나인 바만 제국과 협동하여 마경을 수색했다. 그들은 중원과는 다른 방식으로 마경을 다루고 있었다. 그렇지만 상황은 중원보다 심각한 경우가 많았다. 중원의 마경은 바깥으로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례적으로 자금성에서 마경의 힘이 외부로 폭주한 적이 있다곤 하지만 그건 배교의 교주가 농간을 부렸던 것이었다.
천화련주는 마경을 세상을 멸망시킬 힘이라 보고 최대한 억누르려 했지만, 그걸 억누르지 않고 본인들의 사리사욕을 사용하는 이들이 서쪽에는 훨씬 많았다.
그리고 서쪽 국가들의 고문서에, 바다를 건너온 이들이 ‘흑마법’이라는 것을 전수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해석하자면 바다를 건넌다면, 더 큰 마경이 있으리라 보는 게 옳았다.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선박을 만들고 있습니다. 황 공자님께서 지원해 주신 묵철 덕분에 가볍고 튼튼한 것을 만들 수 있게 되었지요.”
“얼마나 걸릴 것 같소?”
“아마 이 년 정도는 걸릴 것으로 판단됩니다.”
당연하게도 먼저 바다를 넘어가는 건, 황극린이 아니었다.
일차적으로 정사를 막론하여 지원자를 받아 우수한 자들을 추릴 예정이다. 그리고 서쪽의 국가들도 대부분 황극린의 뜻을 따랐기에 꽤 대규모의 정찰대가 구성될 예정이다. 황극린은 정찰이 완료된 후,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마경에 대한 연구도 진척이 있었답니다. 만약 그 연구가 원활히 진행된다면 배를 타지 않고도 바다를 건널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경과 마경은 서로 연결되어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 점에 착안하여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게 성공한다면 황극린은 중원에 있으면서 넓은 공간을 굽이 볼 수 있으리라.
“고생했소.”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제갈소희가 고개를 숙인다.
그녀는 본래 제갈세가의 가주를 차지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던 여성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녀의 목표는 달라졌다.
‘이토록 넓은 세상에서 고작해야 제갈세가의 가주 따위는… 의미가 없다.’
세상이 변화한다.
이 변화의 끝이 어딘지는 알 수 없으나 제갈소희는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리고 그 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바로 황극린이었다. 그녀는 결국 황극린의 뒤를 따르며 원하는 것을 얻으려 했다.
황극린이 맹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서쪽의 국가들이 작정하고 힘을 합치면 중원과 황실의 힘을 뛰어넘을 것이라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만무학관의 중요도가 훨씬 높아졌습니다.”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오?”
“예, 오늘 서쪽 국가의 사신들과 친선전을 치렀습니다만… 그들 또한 중원의 무공을 빠르게 받아들여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저희도 그러한 길로 나아가려 합니다.”
물론, 황극린이 나선다면 그런 것은 의미가 없다.
그는 규격 외의 무인이다. 천화련주 또한 홀로 무림 전체를 좌지우지하던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런데 황극린은 그를 뛰어넘었고,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 더 무서운 점은 황극린이 자신의 경지에 만족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는 혼자서 모든 것을 주도하려는 게 아니었다. 만무학관을 만든 것도 중원의 여력을 성장시키려 한 것이다. 황극린이 굳이 나서지 않더라도 마경에 대한 것에 대응할 수 있도록 말이다.
“더 보고할 게 있소?”
그 이후에도 황극린은 보고를 받았다.
보통 서신으로 받을 테지만, 황극린은 곧 떠난다. 서쪽의 마경 몇 군데를 완전히 폐쇄하기 위함이었다. 그와 더불어 어머니와 함께 그곳을 여행하려는 목적이다.
보고를 마친 무림맹주.
그를 보며 황극린이 말한다.
“바만 제국에 다녀올 것이오.”
“예,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인지 무림맹주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할 말이 있소?”
“그게…….”
맹주는 이게 자신이 말해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제갈소희를 바라본다.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황극린에게 미움받기 싫어하는 맹주. 그리고 제갈소희는 맹주의 직속 수하나 다름이 없었다.
“몇몇 이들이 걱정을 드러내고 있답니다.”
“걱정?”
“황 공자님은 명실상부 중원 무림의 상징이십니다.”
무공으로 따지더라도.
일군 세력으로 보아도.
그리고 황실과의 연을 생각하더라도.
그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었다. 그렇기에 명문거파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름 아닌 후계 문제였다.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서쪽 국가들의 공주와 영애들이 황 공자님을 맞이하려 한다고요.”
“음.”
고개를 갸웃한 황극린이었지만, 금방 이해가 됐다.
바만 제국을 제외하고, 다른 국가들의 절대자라 불리는 강자와 군대들과 황극린은 몇 번 더 충돌했다. 그 과정에서 황극린의 힘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당연히 그를 품으려 하는 세력이 넘쳐났다.
“그래서 제갈 소저의 생각은 어떻소?”
제갈소희는 이미 그 부분에 대하여 생각을 했다는 듯이 명쾌하게 답을 내놓는다.
“어떤 가문의 배경도 황 공자님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거기다 외모로도, 힘으로도 그건 마찬가지겠지요.”
제갈소희는 가끔 꿈에서 머리를 깐 황극린을 마주하곤 했다.
지금 그가 머리를 까지 않은 건 그녀에게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제갈소희는 황극린에게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그렇기에 그들이 어떤 농간을 부리든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강호의 늙은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중원의 목소리에 얽매일 필요도 없겠지요. 황 공자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가 중요하다고 판단됩니다.”
“……!”
깜짝 놀란 계립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게 맞았다.
그 또한 주군이 얼른 가정을 이루고 후계를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꾸 좋은 여인이 있다고 물어보는 늙은이들에게 혹한 것이다. 하지만 제갈소희의 말을 듣고 있으니 틀린 게 없다.
‘그래, 주군이 뭐가 아쉬워서?’
거기다 황극린이 여색을 탐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럼 내 마음대로 하도록 하겠소.”
황극린은 사실 혼인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건 두 번째 삶이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남궁운혜와 혼인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것은 창천뇌검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여차하면 대의적인 이익을 위해 혼인을 할 수도 있는 게 황극린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 * *
가족과의 나들이.
황극린은 어린 시절에도 그런 경험이 없었다. 마을의 친구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작은 뒷동산을 올랐다고 자랑하곤 했다. 하지만 황극린은 문득 그때 생각이 났다.
뇌불은 황극린이 보기에 칠칠치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아버지 같았다.
한소연은 그의 진짜 어머니였다.
두 사람과 함께하는 여정은 솔직히 즐거웠다.
마경을 없애기 위한 명분이 있긴 했지만, 황극린은 큰 걱정 없이 세 사람과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혼자 마구 경공을 펼치며 달려갈 때와는 다른 풍경이 보인다.
“이곳의 건물들은 신기하구나! 더 튼튼해 보이는걸?”
“그러게 말이에요. 음식도 꽤 다르군요.”
“으윽, 너무 느끼하구나! 극린아!”
“여기 있소.”
황극린이 챙겨 온 특제 양념을 고기와 국에 훌훌 털어 넣는다. 뇌불은 서쪽의 음식들이 입맛에 맞지 않는 듯하다.
“어머니는 입맛에 맞으십니까?”
“네, 북해야 원래 먹을 것이 그리 다양하지 않다 보니 뭐든 맛있게 느껴지네요.”
“거참, 넌 정말 입맛이 독특하구나! 후룩, 양념장을 섞으면 훨씬 맛있는데?”
뭐, 뇌불이 워낙 황극린표 양념에 혀가 길들여져 있었기에 서쪽의 음식에 불평하는 것은 그밖에 없었다. 황극린이나 한소연은 새로운 음식을 맛보며 새로운 경험이라 생각했다.
세 사람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느끼고 들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중원과는 완전히 다른 서쪽의 나라들. 그리고 나라마다 그 특색이 조금씩 달랐다. 볼거리가 넘쳐났다.
제갈소희가 말한 대로 여인들의 추파도 있었다.
뇌불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황극린이 좋은 여식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를 부채질했지만, 황극린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여정을 즐기면서도 마경을 차례로 정리한 후.
황극린은 바만 제국에서 제공한 숙소에 도착했다.
밤중에 황극린은 어머니 한소연의 방을 찾았다.
“어머니.”
“들어오세요.”
여정을 하며 황극린과 한소연은 꽤 가까워졌다. 과거엔 황극린의 얼굴만 보면 슬픔을 참는 얼굴이었다면, 자연스레 미소를 짓는다는 게 달라진 점이다. 황극린은 그 변화가 좋았다.
과거엔 충족되지 못한 감정.
살수로서 살아갔던 황극린에겐 참으로 어머니가 소중했다.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뭘 말인가요?”
“제가 혼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한소연은 조금 당황한 듯했으나.
금세 진지한 얼굴로 황극린을 마주했다.
“솔직히… 어미의 마음으론 좋은 여인을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렇군요.”
“하나, 그보다 중요한 건 황 공자님의 마음이겠지요. 이곳으로 오면서 보았던 여인 중에서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었나요?”
솔직히 말해 얼굴만 보았을 뿐이다.
마음에 들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감정을 말하니 한소연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중원에는 있나요?”
중원에는 꽤 가까운 여인들이 있다.
그렇지만 이성으로 그녀들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이를 처음 만났을 때,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답니다.”
“……!”
그러고 보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떻게 만났던 걸까?
처음으로 한소연은 황극린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과거였다면 그럴 용기조차 없었겠지만, 여행을 통해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물론, 어릴 때부터 길러 준 어머니와 아들처럼 친숙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것만이 모자의 관계라 할 수는 없으리라.
“솔직히 말해서 외모도 제 기준에선 별로였고, 말투와 성격도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그이는…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북해에서 있던 기억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그냥 푸근했답니다.”
한소연은 말을 이어 나갔다.
“전 그이와 평생 함께하고 싶었답니다. 지나고 보니 그게 연모의 감정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지요. 지금도 가끔 그이가 생각이 난답니다.”
황극린은 생각에 잠겼다.
‘연모의 감정…….’
혼인은 결국 수단 중 하나라 생각한 황극린이었지만, 어머니의 말을 들으니 확실히 생각이 달라진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사랑하여 그를 낳았다. 물론, 그 이후에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인간답게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
황극린은 아버지와 같은 뇌불 그리고 어머니 한소연과 여정하며 더욱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가… 그래도 되겠습니까?”
두서없는 황극린의 질문.
그렇지만 많은 감정이 담긴 질문에 한소연이 간단한 답을 내놓는다.
“안 될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하하하, 그렇지요.”
황극린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그에겐 혼인할 여인도 없다. 물론, 황극린에게 관심을 표하는 여인들은 중원에도 많았지만… 황극린은 그에 응답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갑자기 그 여인들의 이름이나 얼굴을 떠올리는 건, 막돼먹은 자만일 뿐이다.
그런 황극린의 미묘한 표정을 살피던 한소연이 문득 말한다.
“전, 제 아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답니다.”
“…….”
부끄러운지 한소연이 고개를 숙였다.
매번 ‘황 공자’라는 호칭으로 그를 불렀다. 내 아들이라 칭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건 한소연에게 크나큰 도전이었을 것이다. 그게 황극린의 감성을 자극했다.
“예, 저도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황극린은 솔직하게 소망을 말했다.
감정을 숨기는 건 그에게 능숙했다. 무슨 일이든 시큰둥하게, 무심하게 반응하는 게 당연했다.
살수로서 그렇게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삶의 방식은 부모님이 죽고 황씨 가문으로 가서 노예처럼 살아갈 때부터 자연스레 터득한 것이었다.
그런 삶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황극린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가 위험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꾸역꾸역 감정을 속이고 숨길 필요가 있을까?
‘아니.’
매번 차가운 눈초리와 무심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던 황극린.
그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