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314화 (314/316)

314화 근본 (2)

무림인들은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어느샌가 만뇌문은 무림 전체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문파가 되었다. 지금 무림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변화는 만뇌문이 주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교주가 즉위한 혈마교.

그들은 무림맹과 새롭게 정립된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과거처럼 단순히 무늬만 평화이고 언제든 서로를 공격할 수 있는 평화협정이 아니라, 지속적인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나의 기관을 만들게 되었다.

만무학관(萬武學館).

새롭게 탄생한 교육기관이다. 정파와 사파가 관계없이 서로 무공을 겨루고 담론을 나누며 서로 성장하고 이해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 만들어졌다. 지속 가능한 평화를 유지하려면 교류가 필요했다. 오래도록 이어진 악연이 고작 몇 번의 만남으로 해결되지 않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입관의 기회는 정파뿐 아니라 사파에게도 주어진다.

반대하는 목소리가 몇 있었지만, 사파에서는 혈마교와 북해빙궁 그리고 만독문이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명했다. 정파에서도 천화련을 필두로 구파일련과 육대세가가 강력하게 찬성했기에, 무난하게 만무학관이 만들어졌다.

만무학관은 여러 장소가 후보군으로 올랐지만, 결국 만뇌문과 가까운 중강현으로 결정됐다. 과거 무림은 소림사와 무림맹이 있는 하남성이 중심이라 평가받고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사천성이 정사를 막론하고 무림의 심장이라 불리고 있다.

“똑바로 뛰어라! 한 번을 뛰더라도 제대로 뛰어야 훈련이 된다!”

“검법을 수련하는 데 있어서 하체는 생명이다!”

만무학관의 수많은 연무장에서 무림인들이 수련하고 있다. 그리고 외성의 연무장에선 익숙한 얼굴이 학도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 그의 가슴팍에는 최근 만무학관에서 명성을 떨치는 ‘뇌룡단’의 상징이 수놓여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백건악. 만뇌문 출신이자 뇌룡단에 속한 교관이었다.

“백 조장님!”

“무슨 일이더냐?”

백건악이 달려온 학도의 얼굴을 훑어본다. 백건악의 날카로운 시선에 질린 학도가 쭈뼛쭈뼛 대답한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지금은 훈련 시간이니 기다리라 전해라.”

당연한 일이다.

백건악은 엄하기로 유명한 교관이었다. 어린 나이라고 무시하던 이들은 그의 독기에 호되게 당하기도 했다. 특히 만무학관의 배분이 높은 교관들도 쉬이 말을 놓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가 어떻게 교관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알 만했다.

그런데 학도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그런 호랑이 교관 백건악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을 드러내게 했다.

“그, 그게, 뇌신께서…….”

“어디에 계시지?”

백건악은 그 이름을 듣자마자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얼굴에는 기대와 흥분 그리고 긴장이 어려 있었다.

* * *

“부문주님을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부르셨다면 바로 복귀했을 텐데…….”

천화련주와의 싸움 이후 2년이 지났다.

황극린은 무림맹과 천화련 그리고 혈마교를 뒤에서 움직이며 그의 뜻대로 무림을 재구성했다. 정확히 말하면 패권 다툼에 눈이 먼 이들을 내치고, 무림을 발전시키기 위한 인재들을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아직 어린 백건악이 정사 무림 최초로 만들어진 학관의 교관이 된 것도 만뇌문 출신이라는 것보다는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바쁜 사람을 막 부를 순 없지.”

“그, 그건 아닙니다!”

당황하는 백건악에게 황극린이 묻는다.

“학도들을 가르치는 건 잘되고 있느냐?”

황극린이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흑살문에서 죽을 운명이었던 백건악과 백온후. 그들은 이번 생에서 자신들의 재능을 마음껏 뽐내며 살아가고 있다. 만뇌문에 틀어박혀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백건악은 진중한 목소리로 답한다.

“예,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들도 있지만, 적성에 맞는 것 같습니다. 노력한 만큼 성장하는 이들을 보면… 무언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보기 좋구나. 하종과 율명은 잘 지내고 있느냐?”

“만무학관에서도 최고의 기재로 꼽히며 비무대회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아이들이지요.”

하종과 율명.

만뇌문에서 마지막으로 거둬들인 문도들이다. 무공에 입문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압도적인 재능으로 만무학관에서 천재성을 발휘하고 있다.

만무학관에 정파와 사파 그리고 새외의 인재들까지 몰려들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실로 대단한 일이다.

“잘하고 있구나.”

“모두 부문주님의 배려 덕분입니다.”

“배려는 무슨. 너와 그 아이들이 잘하는 거지.”

“아, 아닙니다! 그건…….”

“그럼 내 배려라고 하지.”

백건악은 엉뚱한 부분에서 고집을 부릴 때가 있어 황극린이 농처럼 넘어갔다. 그런 황극린을 보며 살짝 부끄러움을 느낀 백건악이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만무학관에서 호랑이 교관이라 불리는 그도, 황극린 앞에서는 아이처럼 변하곤 한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 않았지만, 황극린이 아버지처럼 느껴졌다.

“잠시 떠날 것이다.”

황극린은 보통 만뇌문에 머물며 연구를 진행했다.

대부분 마기에 대한 연구였다. 어떻게 하면 마기를 효율적으로 없앨 수 있는가? 활용할 방법은 있는가? 다른 이들에게 마기가 미치는 영향은 어떤 것이 있는가?

성과는 꽤 있었다.

황극린의 곁에는 수많은 인재가 있었으니까.

연구를 진행하며 황극린은 자주 자리를 비우곤 했다.

하지만 황극린이 이리 직접 백건악에게 찾아와 떠날 생각이라고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백건악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린다.

“혹… 멀리 가시는 겁니까?”

“십만대산을 넘어 더 멀리 나아가려 한다.”

중원의 마경들은 어림잡아 총 스무 곳.

위험한 마경들은 어느 정도 안정화가 이루어졌다. 황극린은 이제 슬슬 중원 밖의 마경에 눈을 돌렸다.

“십만대산을 넘는다면…….”

“그곳은 중원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를 다룬다고도 하더구나.”

미리 알아보니, 그들은 육신을 갈고닦는 무공보다는 술법을 위주로 사용한다고 했다.

중원인들은 중원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황극린도 알게 되었다. 그런 세상을 경험한다면 마기를 정복하는 것도 먼 미래는 아니리라.

“돌아오시기 전까지 더 정진하여 성장하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나 걸리는지 따위는 묻지 않았다. 그를 걱정하는 발언도 내뱉지 않는다. 황극린은 백건악에게 믿음 그 자체인 존재였다.

“그래, 선물도 사 오도록 하마.”

황극린의 말에 백건악은 불길함을 완전히 떨쳐 냈다.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그게 황극린이 원하는 길이기도 했으며, 자신이 추구해야 할 방향이었다.

“예!”

* * *

“지팡이가 없는데, 저 힘은 뭐지?”

“룬도 외치지 않고 어떻게……!”

끝을 알 수 없는 넓은 초원. 그곳에서 로브를 둘러쓰고 기괴한 문양의 가면을 쓴 수십 명의 존재가 쉴 새 없이 조잘거린다. 단순히 불평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말’을 매개로써 기를 움직이고, 자연의 힘을 부리고 있었다.

[프로즌 패터]

[버닝 파이어]

얼음이 바닥에서 솟구쳐 사내의 발을 묶으려 한다. 또한,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니, 대형 길드의 길드장들도 쉬이 상대할 수 없는 고위의 마법이 터져 나온다.

그러나 사내는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 그들의 ‘기’를 소멸해 버렸다.

“그나마 괜찮긴 하지만…….”

사내는 혀를 찼다.

기대했던 것보단 훨씬 약했다. 십만대산을 넘어 황극린은 수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중원에선 보지 못했던 건축물들이 보였고, 무림맹보다 더 높은 성이 나타났다. 이젠 좀 괜찮은 이들인가 싶었는데, 황극린의 입장에선 별것 아니었다.

“흑주, 통역하거라.”

순식간에 제압된 이들.

놀랍게도 황극린은 저들을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

“뀨우!”

인간의 모습을 한 흑주. 정확히 말하면 흑주는 ‘환골탈태’를 겪었다. 아직 하반신은 거미의 그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흑주를 데려오길 잘했군.’

흑주는 어린 영물일 때부터 황극린의 말을 잘 알아들었다. 중원 밖에서는 다른 언어를 쓴다는 정보가 있었기에, 흑주가 도움이 되리라 판단한 것이다.

거의 ‘신수’에 근접한 흑주의 모습을 본 마법사들이 경악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는데, 괴물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황극린의 신위에 경악한 마법사들은 금세 흑주의 심문에 답했다.

“마경? 그게 뭐지?”

“몰라. 그런데 정말 괴물이군……. 마력도 거의 소모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저런 괴물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황극린은 이 지역에서 꽤 강한 존재들도 마경을 모르는 것을 보고 확신했다. 이곳에서 마경의 정보는 중원처럼 감추어져 있었다. 천화련이 의도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나라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 누군지 물어보아라. 그가 어딨는지도.”

제일 강한 놈을 족치면 실마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황극린이 직접 경공으로 뛰어 보며 느낀 건데, 이 세상은 정말 너무 넓었다. 이대로 달리기만 할 수는 없다. 적당히(?) 강한 놈들이니, 그들이 뱉는 정보는 어느 정도 믿을 만하리라.

흑주의 물음에 그들이 ‘오스왈’이라는 이름을 뱉어 냈다.

“그렇군.”

황극린을 막아 세운 마법사들은 오스왈이라면 저 괴물 같은 사내를 막아 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오스왈이라…….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야겠군.”

중원을 떠난 지도 1년이 넘었다.

황극린은 어머니와 만뇌문의 문도들이 슬슬 그리워졌다. 과거였다면 느끼지 않았을 감정이다. 마경을 없애는 것도 중요하지만, 황극린은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일단 지도를 그리며 달려왔으니, 다음번에는 더 빨리 이 장소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흑주, 가자.”

“네에엡!”

중원에서 온 절대자가 제국의 절대자에게 향하는 순간이었다.

* * *

황극린이 돌아왔다.

진귀한 선물들을 잔뜩 가지고 말이다. 만뇌문은 연회를 벌였고, 황극린은 새로운 세상에서 본 것들을 모두에게 알려 주었다. 다른 이들이 말했다면 믿을 수 없었겠지만, 황극린이 말했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거긴 흑마법이라는 게 있다고 했습니다. 중원에서 말하는 마공과 비슷한 것이지요.”

“그들도 마기를 사용하는 것인가요?”

아직 황극린에게 존대하는 어머니 한소연이었다. 하지만 과거보다는 훨씬 친근한 말투였다. 그것으로 황극린은 족했다.

“예. 맞습니다. 제국의 술법가 중에서도 제일이라는 놈이 그런 흑마법을 사용하더군요.”

오랜만에 황극린이 만든 양념구이를 먹던 뇌불이 묻는다.

“제국이라는 게 혈마교 같은 곳이냐?”

“비슷했소.”

황극린은 극도로 짧은 시간에 제국의 암덩이였던 오스왈을 제압하여 수하로 만들었다. 그에게서 약간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기를 사용하며 생긴 부작용을 다른 방식으로 소모하고 있다고 했다.

“흑마법으로 남의 생명력을 강탈하여 ‘저주’를 해주 했다고 하오.”

“그런 방식으로 마기의 저주를…….”

북해빙궁은 시도조차 하지 않은 방법이다.

정확히 말하면 배교가 그와 비슷한 심법을 개발하긴 했었지만, 오스왈이 보여 준 그들의 ‘무공’은 황극린의 입장에선 획기적인 방식이긴 했다.

“그들은 중단전을 하단전처럼 사용하더군요. 그러한 방식이 기를 다루는 방식의 차이를 불러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혈풍뇌전신공을 더 발전시킬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황극린의 말을 듣던 뇌불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한다.

“거기서 더 발전하면 넌 어떻게 되는 게냐?”

“더 강해지지 않겠소?”

“지금보다?”

지금도 중원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황극린의 말이니 부정할 수도 없었다.

“쩝, 난 평생 가도 널 따라잡긴 힘들겠구나.”

“노력하면 되지 않겠소?”

황극린의 말은 진심이었다.

세상을 겪다 보니 느꼈다. 황극린은 한 번 죽음을 겪은 후, 사고의 폭이 확장되어 같은 무공을 익히더라도 틀에 박혀 있지 않아 성장이 빨랐다. 물론, 이미 익힌 것들을 다시 익혀 손에 익은 탓도 있었지만, 돌이켜 보니 ‘경험’이라는 건 정말 중요한 요소였다.

전투 중 오스왈이 보여 줬던 기의 운용들을 떠올려 보면, 굳이 엄청난 내력을 단전에 쌓지 않아도 위협적인 공격을 할 수 있었다. 그런 방향이라면 뇌불도 가능하지 않을까? 황극린은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뇌불은 그런 황극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됐다. 이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고기나 더 다오!”

뇌불의 심통에 황극린이 피식 웃으며 고기를 구워 주었다.

그러다 뇌불이 황극린의 옆에 놓인 사람 머리통만 한 구슬을 집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이건 뭐냐?”

“전음석과 비슷한 것이오.”

“으음? 그런데 너무 매끈한데……. 마치 보석 같은…….”

그때, 자줏빛의 구슬에서 번쩍 빛이 났다.

그리고 그것에서 강렬한 눈빛을 가진 중년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뭐, 뭐야! 색목인의 머리통이 왜 여기에?”

“그게 제국의 황제요.”

“뭐? 이 구슬에 담아 왔다는 말이냐?”

“그들은 운철을 다루는 방법이 우리보다 훨씬 발전했소.”

흑주를 통해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전달하고, 황극린이 구슬을 가져왔다.

“이제 여기서도 저들과 연락할 수 있소. 황제의 말로는 제국 옆에도 더 많은 나라가 있다더군. 그 나라들의 수뇌가 각각 마경을 관리하고 있다고 했소.”

“으음, 나라가 여러 개라고?”

“대충 구파일련이 각 지역의 나라라고 생각하면 되오.”

“그래? 신기한 곳이로군.”

중원인들에겐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구파일련이 각 지역에서 어떤 명성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는 감이 잡혔다.

황극린이 한소연을 바라보며 말한다.

“언젠가 한번 모시고 가겠습니다, 어머니.”

“어머나, 정말인가요?”

언젠가 어머니를 모시고, 그곳에 갈 생각이었다.

중원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지닌 장소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그 장소를 보고 싶었다.

그것을 듣던 뇌불이 먹던 고기도 놓고 외친다.

“이놈아, 나는!?”

뇌불의 분노와 당황에 황극린이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문주도 같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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