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변화
“네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심은 없다.”
흑살문주의 얼굴에 살의가 감돈다. 최근 연이어 패배를 경험했다. 살수의 절대자. 어둠에 녹아든 혼돈의 중심이라 여겼던 흑살문주의 자존심이 부서졌다. 그런데도 눈앞의 유령을 보고 살수를 펼치지 않은 것으로 흑살문주의 인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끄르륵.
꾸룩!
수만 마리의 벌레가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다. 놈들은 지칠 줄 모르고, 중앙에서 흐르는 흑무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의 단상에서 한 사내가 가부좌를 튼 채로, 흑살문주를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 이건 용서하지 못하겠군.”
흑살문주의 말에 유령이라 불렸던 존재, 이영이 대답한다.
“괴물을 이기려면 너 또한 괴물이 되어야 한다.”
“…….”
“네놈은 용황신가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았다. 그러니 더한 마기를 받아 낼 수도 있다는 거지. 왜 더 취하지 않았지?”
흑살문주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힘은 제어할 수 있어야지만 힘이다.”
“틀렸다. 무림인 대부분은 자기 힘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단순히 단전에만 가둬 두고 조금씩 뽑아 쓸 뿐이지.”
새로운 관점.
흑살문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유령은 확실히 난놈이긴 했다.
“네놈의 정신이 분열되어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것도 알고 있었나?”
유령의 얼굴이 변한다. 정확히는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할까?
“그러니 당신 또한 유령의 길을 따라야 한답니다.”
목소리도 중성적으로 바뀌었다. 참으로 토악질이 나오는 놈이었다.
“무영심결, 그것은 사실 마기를 받아들이기 위해 유령이 창안한 무공. 그를 살수라고 칭하지만, 사실 그는 당대 최고의 권법가였지요.”
“그딴 헛소리를 믿을 것 같은가?”
“자, 받아라.”
또 목소리와 분위기가 급변했다.
유령이 소매 속에서 던진 낡은 서책. 표지에는 무영심결이라는 이름이 쓰여져 있다. 황당할 따름이다. 저놈도 무영심결을 가지고 있었나?
‘이건…….’
무영심결을 읽어 나가던 흑살문주가 눈매를 좁혔다.
조금 다르다. 그가 발견했던 것과는 말이다.
“네가 발견한 무영심결은 초안에 불과하다. 이건 완성본이다.”
“통로라고?”
“마기를 단순히 단전에만 담아 둔다면 그것은 소위 말해 ‘저주’라 불리는 체질과 병을 유발하게 된다. 그렇기에 하단전에서 중단전 그리고 상단전을 거쳐 순환시킨다. 자연스럽게 쌓이는 내력이 기경팔맥에 쌓이게 되는 이치지. 무영심결은 그러한 무공이다. 마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
하지만 흑살문주도 할 말이 있었다.
“그래서 네 정신이 분열된 건가, 사내도 여인도 아닌 존재여?”
“그런 도발은 통하지 않는다. 그 정도는 작은 부작용일 뿐.”
“작응 부작용이라.”
“네놈도 알고 있을 터. 결국 마기를 탐한 존재의 말로는 비극으로 끝맺지. 하지만 그 전에 정점에 오른다. 인간의 경계를 탈피하는 거다.”
“마경에 득실거리는 괴물처럼 되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그들은 무영심결이 없었으니까. 영물이 사람처럼 내공을 잘 다루는 경우를 보았나?”
흑살문주는 유령에게 설득되고 있다는 걸 인정했다.
연이은 패배 덕분에 그에겐 강렬한 갈망이 생겨났다.
힘.
부족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이 세상 만물을 뒤에서 이끄는 흑막이라 여겼다. 하지만 애송이라 생각했던 황극린에게 죽을 뻔했다. 북해빙궁의 궁주도 아닌 부궁주에게 팔 하나가 날아갈 뻔했다.
치욕.
평생을 감정을 숨겨 왔다. 그는 오롯한 절대자의 모습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왜 날 찾아온 거지? 제안할 게 무엇인가?”
“함께하자. 너와 내가 합치면 최초의 유령이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이겨 내지 못한다. 우리는 고금제일의 살수가 되는 거다.”
“목표는?”
“천화련주, 놈에게 빼앗긴 내 심력을 되찾아온다.”
“그런 제안이라면 혈마교주가 더 낫지 않았나?”
“아니. 너여야만 한다. 그놈은 우리와 핏줄 자체가 다르니까.”
흑살문주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런 선택을 할 때만 보름달이 떠 있다. 그림자가 더 밝아지는 때였다.
“황극린, 그놈도 죽인다.”
“그런 놈은 신경 쓸…….”
“잘 모르는군.”
흑살문주가 상의를 벗는다.
마치 조각처럼 만들어진 듯한 아름다운 육신이 보인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뚫린 구멍.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고, 미세한 뇌기가 일렁이고 있다.
“이게 황극린이라는 놈에게 당한 거다.”
“신기하군. 황씨 가문의 출신이라고 했던가. 그쪽은 용황신가에서도 버림받고 제대로 힘도 키우지 못한 방계 중의 방계일 텐데.”
“아니. 용황신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혈통은 중요하다.”
“그런 문제가 아니다. 놈은 선경일 가능성이 있다.”
“터무니없는 소리를 믿고 있군.”
마경이 있으니까 선경이 있다.
그건 혈황마제의 추측에 불과하다. 하지만 중원의 역사를 연구해 온 유령은 알고 있다. 그런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이걸 보고도 모르겠나? 놈의 뇌기는 마기를 갉아먹는다.”
“놈의 무공이 특별하다는 말인가?”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흑살문주는 혈풍뇌전신공을 본 적이 있다. 유령 또한 마찬가지였다. 뇌불과 싸웠던 경험이 있는 유령이다. 뇌기를 다루는 무공 중에서 특별한 것은 맞지만 그리 대단한 가능성을 목격한 바는 없다.
그렇지만 유령은 흑살문주의 상처를 만져 보고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확실히 기이한 힘이 담겨 있었다.
“살펴볼 만한 가능성은 있군.”
흑살문주가 말한다.
“놈의 무공이 천화련주를 이길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다.”
“황극린을 결국 잡지 못하고 후퇴한 게 아닌가?”
“천화련주가 움직여서 어쩔 수 없었다.”
“…….”
천화련주라는 말에 유령의 눈동자에 살기가 어렸다.
놈에게 빼앗긴 힘. 그것을 반드시 되찾아야 했다.
“협력할 텐가?”
유령의 물음에 흑살문주가 손에 쥔 무영심결을 바라본다. 이게 진짜 무영심결이라고 했던가? 확실히 그가 본래 가지고 있던 것과 다르게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상당히 실전적인 부분만 수록되어 있으며, 간결한 편이었다.
이걸 제대로 체화한다면…….
‘천화련주, 황극린, 네놈들을 뛰어넘어 주마.’
유령을 믿지 않는다.
놈은 출신을 알 수 없는 놈이다. 언제부터인가 천화련주가 유령이라 자칭하는 놈을 수하로 두고 있었다. 실력은 흑살문주와 동급 내지는 더 강하다.
이놈에게 얻을 수 있는 건 모두 얻는다.
그리고 다시금 살수의 정점으로 올라설 것이다.
“네가 알고 있는 걸 모두 말한다면 협력해 주도록 하지.”
중원 최고의 살수라 불리는 흑살문주와 유령이 손을 잡았다.
* * *
소문은 금세 퍼져 나갔다.
혈마교, 북해빙궁 그리고 흑살문까지.
만뇌문 하나를 처단하기 위해 모였던 사흑련의 정예들이 결국 만뇌문에 밀려 후퇴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혈마교주, 빙궁주, 흑살문주까지 참전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파천뇌권께서 그들을 다 물리치신 게지!”
“허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황 대협이 아무리 경지가 높다 한들, 천화련주보다 강하겠는가?”
“맞네. 만뇌문에 소림과 화산을 비롯하여 온갖 문파가 지원을 갔다는 걸 모르는 겐가?”
“자네는 그런 지원이 있다고 한다면 사대마제의 합공을 받아 낼 수 있나?”
“아, 아니! 당연히 안 되지, 이 사람아! 왜 나한테 그러는가!”
황극린이 이미 천화련주를 넘어섰다고 설레발을 치는 사람도 있었고, 최대한 만뇌문을 깎아내리려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중원 무림에서 황극린의 위상은 거의 천화련주와 비등할 정도로 상승했다.
“정말 대단하군. 역시 내 호적수인가.”
“소련주님, 이미 그는 선인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합니다. 황 대협은 소련주님을 호적수로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계빈, 천화련의 소련주는 만뇌문을 도와주기 위해 나섰다가 급히 무림맹으로 회군했다. 천화련주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해 돌아온 것이다.
그의 옆에는 계빈의 쌍둥이 동생 계지향이 있었다.
그는 오라버니를 어려워했다. 어릴 적부터 그는 남들과는 다른 재능을 품고 있었다. 언젠가 천화련주가 될 존재.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인간 위에 올라서야 한다.
계빈의 성격은 잔혹했다.
인간의 생명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계지향이 인간의 피를 탐하지 않고, 동물의 피만 먹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오라버니는 참으로 두려운 존재였다.
가끔 보여 주는 광기에 한 번도 살갑게 대한 적이 없었지만, 왜인지 요즈음 계빈은 사람 같았다.
그래서 은근슬쩍 농을 걸어 볼 정도로 가까워졌다.
과거의 계빈이었다면 이런 말을 듣는 즉시 계지향에게 불호령을 내렸을 테지만, 지금은 싱긋 웃고 말았다.
“그래도 좋지. 그가 강해진다면 내가 올라가야 할 지향점이 되는 거니까.”
“련주님이 소련주님의 지향점이 아니셨나요?”
그 말에 계빈이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버지는 따라갈 수 없는 종류의 강함이니까.”
“그렇지요…….”
“아버지는 친우의 형제를 데리고 떠나셨다고 하더구나.”
“예, 그에게 무언가 있는 걸까요?”
“잘 모르겠군.”
의아했다.
그에게 무엇이 있길래 천화련주가 데려간 걸까? 솔직히 계빈도 천화련주를 두려워하는 건 마찬가지였기에, 감히 의중을 여쭙지 못했다.
“우리는 천화련으로 돌아간다. 아버지께서 그곳을 지키고 있으라 하시더군.”
“무엇에게서 말입니까?”
계빈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사흑련.”
천화련은 미래를 대비하고 있었다.
* * *
훌쩍 석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달라진 점이라면 만뇌문에 새로운 직책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호법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북해빙궁의 부궁주였던 한소연.
그녀는 만뇌문의 호법이 되었다. 황극린이 건네준 혈석을 결국 받아 들었다.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제자들을 불러들여 무공을 가르쳤다. 빙궁도에 선입견을 가진 이들은 한소연이 엄하고 무서울 거라 생각했지만, 차가운 인상과는 달리 매우 따뜻한 사람이었다.
거기다 황극린의 친모이기도 하니 제자들이 그녀를 잘 따르고 있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네, 많이 나아졌습니다.”
혈석은 완벽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한소연의 단전에 깃든 마기가 너무 강했다고 할까? 완전히 마기를 없애지는 못했다. 다행히도 점차 차도를 보인다는 걸까?
그렇기에 한소연은 황극린만 보면 세상 걱정을 다 끌어안은 표정이 되었다.
“저 하나를 치료하는 데에 너무 많은 피를 뽑는 게 아닌가요? 이젠 혈석을 취하지 않아도…….”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래도…….”
황극린이 가진 피.
그것에 담긴 힘이 얼마나 대단한 종류의 것인지 한소연도 알게 됐다. 문제는 하나였다. 황극린의 피에 담긴 힘을 아는 자들은, 결코 황극린에게 ‘혈석’ 따위를 뜯어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황극린의 심장이나 골수를 원하리라.
한소연은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황극린을 위해 죽으리라 다짐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최대한 만뇌문의 전력을 강화하는 데 힘쓰고 있었다. 그녀가 가진 북해빙궁의 절기들은 뇌불과 황극린과의 상의를 통해 뇌정신공과 혈풍뇌전신공을 개선하는 데 쓰이고 있다.
빙궁주가 알면 노발대발할 일이었지만, 부궁주 한소연에게 빙궁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천화련주가 천화련으로 복귀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한소연은 황극린이 교특범에게 받는 정보를 모두 전달받았다.
“황씨 가문의 아이와 함께 돌아갔다고 들었는데…….”
“우려되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빙궁주가 하는 말을 들었답니다. 천화련주는 괴물이라고. 천화련의 선조들은 힘을 키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해요. 그건 빙궁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어쩌면 중원에서 영웅이라 칭하는 천화련주가 적이 될 가능성도 있답니다. 황 공자님의 그 힘을 알게 된다면 말이에요.”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문제다. 한소연은 문도들 앞에선 미소를 지었지만, 그 이면으로는 걱정으로 잠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석 달 동안의 평화가 오히려 너무 두려웠다.
황극린이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 그녀는 황극린을 공자라고 부른다. 그게 더 편하리라. 하지만 그녀의 걱정이 귀찮거나 하지 않았다. 언젠가 황씨 가문에 홀로 찾아갔을 때의 설움. 누군가 자신의 편이 있었다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 그것이 이루어졌다. 그에겐 과거엔 없던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인지 그는 최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심기체의 조화를 이루어야 무공이 완성된다.
황극린은 기와 체를 거의 완성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심적인 부분이 새로운 방향으로 물꼬를 트자 기와 체도 심을 따라오기 시작한다.
“이젠 괜찮습니다. 최근에 깨달은 게 있습니다.”
“그런가요? 그럼 다행입니다만…….”
사실 황극린은 어머니를 찾아오기 전, 정보를 얻었다.
사대마제가 모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극린은 태평했다. 과거처럼 진법을 개조하거나 하는 것에 집중하거나 주위 문파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머니.”
한소연도 황극린이 무언가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