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서막
대공자도 당했다!
하북팽가에 전해진 비보. 팽여해는 하북팽가 장로들의 허락을 맡지 않고 진실을 알아내겠다며 떠나갔다. 그를 어리석다고 하는 이들은 없었다. 아버지가 죽은 상황에서 하북팽가 장로들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으니까. 무림에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오히려 하북팽가는 팽여해의 죽음을 숭고한 희생으로 여겼다.
당연히 그들은 복수를 획책했다.
“전 무림에 퍼져 있는 하북팽가의 방계들은 들어라. 우리는 복수를 위해 북해빙궁과 싸울 것이다.”
북경으로 팽씨를 가진 무인들이 집결한다.
북해빙궁이 사흑련 중 하나라고?
하북팽가는 무림육대세가 중 하나였다. 복수는 무인들이 가장 활약하기 좋은 명분이었다.
무림맹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북해빙궁뿐 아니라 다른 사흑련의 문파들도 경계 대상으로 올렸다. 정사대전의 발발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영웅호걸들이 북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하니 사흑련의 경계도 강화되었다. 비단 북해빙궁뿐만이 아니었다. 흑살문의 살수들과 대막의 광풍사가 활동을 시작했다. 혈마교의 흑마질풍단도 오로목제를 떠나 청해성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전쟁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지만, 황실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오십만 관군이 무림맹을 지원하겠다고 했습니다.”
무림맹의 총군사 제갈서운과 임시 무림맹주로 발탁되어 업무를 수행하는 만묘신수(萬妙神手) 계립.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대화한다.
“관군 말입니까.”
“예, 금의위와 용성은 모두 북경으로 불러 모았다고 합니다. 특히 신기영과 같은 특무 부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황실의 권력은 북경에 집약되어 있었다.
웬만한 명문거파조차도 쉽사리 건드리지 못할 거대하고 은밀한 세력. 그 중심에 있던 것이 황제였다. 연로한 나이였지만, 최소한 10년은 더 치세를 이어 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그런 황제가 죽었다. 수백 겹에 달하는 호위를 뚫고 황제가 죽었으니, 황족들과 관료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무림인이라는 존재.
전쟁을 위해 그들을 바깥으로 내보낸다면 일이 어떻게 꼬일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기에 그들은 50만 관군의 지원을 약조하며 무림맹에 천하칠대고수 반절 이상을 요구했다.
“황실이 단단히 겁을 먹었군요.”
“그럴 만도 합니다. 그 누구도 아닌 황제께서 붕어하셨으니까요.”
“그것이 정말 흑살문의 소행이라 보십니까?”
“중원에 여러 살수 단체가 있지만, 황실을 뒤흔들 수 있는 문파는 흑살문뿐이지요.”
“그들이 그럴 이유가 대체 뭐라 생각합니까?”
“여러 가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 흑살문이 정사대전을 일으키고 혼란을 가중하기 위해 황제를 해했다. 둘, 황제를 죽이는 살행 의뢰를 받았다. 셋, 흑살문인 척 다른 세력이 개입했다.”
무림맹 또한 흑살문과 북해빙궁이 이렇게 대놓고 적을 만드는 행위를 하는 것에 의심했다. 증거가 너무 명백하다. 무림맹주는 ‘빙공’에 당했으며, 황제는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그림자와 같은 살수에게 당했다.
“절대고수의 숫자가 중요합니다. 적재적소에 그들을 배치해야 합니다. 목적을 알 수 없으니 고수의 숫자를 분산하는 건 위험한 행동이지요.”
“각 장문인이 나선다고 했습니까?”
“맹주령을 발동하시지요.”
제갈서운의 말에 만묘신수가 어색한 얼굴을 했다.
그는 임시 무림맹주였다. 맹주령을 발동하는 건 부담이 됐다.
“임시가 아니면 되지 않습니까?”
“예?”
“전 부맹주님, 아니 맹주님을 지켜보았었습니다. 무림맹을 개혁하고 싶어 하셨지요. 개혁하십시오. 위기란 곧 기회입니다.”
“제가 무림맹을 이끌 능력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무림맹엔 수많은 인재가 있습니다. 그들을 활용하시지요. 저도 그중 하나일 뿐입니다.”
일어나서 허리를 숙여 인사한 제갈서운.
총군사가 현 임시 맹주인 만묘신수를 밀어주겠다는 말이다. 제갈서운은 언제나 무림맹을 위해 싸워 온 군사였다.
‘기회라…….’
고민하던 만묘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모든 것을 하지 않아도 된다. 능력이 있다면 그 능력을 펼칠 수 있게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무림맹주다.
“하겠습니다.”
만묘신수는 숭고한 마음으로 제갈서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의 도움이 있다면 현명하게 처리할 수 있으리라.
“하나, 만약 저보다 더 뛰어난 자가 있다면 언제든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총군사인 제가 모든 것을 걸고 맹주님을 보필할 테니까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제갈서운이 무림맹주 만묘신수에게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 * *
관군들이 북쪽에 경계선을 만들었다. 무림맹에선 만묘신수가 정식 맹주가 되었다. 구파일련의 정예들도 합류했다. 그들의 힘은 북쪽으로 집약되고 있었다. 무림맹과 황실이 힘을 합쳤으니 사흑련 따위는 금방 제압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뭐라?”
“그게 무슨!”
황산파, 해남파, 종남파, 점창파, 거기다 무당파까지.
무림맹의 지원을 위해 정예를 파견했다고 하지만 본산에도 무인들이 즐비했다. 그런데 그들이 당했단다. 본거지가 점령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꽤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대체 어떤 놈이!”
뒤를 친단 말인가?
무당파의 대청진인(大靑眞人)이 콧수염을 파르르 떨며 소리쳤다.
“혈마교입니다.”
“역시 그놈들이!”
각 문파를 습격한 무인들은 마인(魔人)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으며, 온몸의 혈관이 튀어나와 징그러운 몰골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옛 문서를 살펴보면 마교에서 사용했다던 무공과 비슷했다.
“어찌해야 합니까? 맹의 분위기가 뒤숭숭합니다.”
현재 무림맹 내에 모인 전력은 어지간한 명문거파라도 하룻밤 새에 멸문할 수준이었다. 자신감에 충만했던 무림맹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바뀐다. 애초에 무림맹은 정파 무림 문파의 연합이었다. 사문이 공격당했다는 소식에 흔들리는 게 당연하다.
그런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만묘신수가 맹원들을 불러 모았다.
“무림맹주 만묘신수입니다.”
수많은 무인 앞에서 당당히 섰다. 그는 합리적으로 무림맹을 운영하며 개편했다. 실력 위주로 편제를 개편했기에 무림맹에서 꽤 평이 좋았다.
“모두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들이 원하는 건 바로 무림맹의 혼란입니다. 이곳에 모인 영웅호걸들이 흩어지게 된다면 사특한 사파 무리는 그걸 역으로 노릴 겁니다.”
“그렇군. 양동작전인가.”
“비열한 사파 놈들!”
사파에 대한 적개심에 극에 달한 상태였다.
“오늘 아침 감숙성으로 파견된 청룡단이 사파 문파인 광풍사의 정예들과 맞붙어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오오오오!”
“청룡단! 청룡단!”
“청룡단은 북상을 시작했으며 조만간 광풍사를 모두 처단한 후, 북해빙궁과도 대치할 것입니다.”
북해빙궁!
무림맹주를 죽인 원수. 그들과 드디어 맞붙게 되는 것이다.
“오늘 구파일방과 육대세가 그리고 중원 곳곳의 영웅호걸이 모여 편제된 질풍금룡단(疾風金龍團)이 출정할 예정입니다. 그들은 청룡단을 도와 북해빙궁도의 남하를 막을 것이며, 종국에는 북해빙궁을 처단할 것입니다.”
맹주의 말이 끝나는 순간.
단상 위로 질풍금룡단의 단장 낙일검(落一劍) 유지광이 올라섰다.
“우리는 승리를 쟁취할 것입니다!”
“우아아아아-!”
“북해빙궁뿐 아니라 혈마교와 흑살문까지 중원 무림을 위협하는 사파들을 모두 쓸어버릴 겁니다!”
거대한 함성이 무림맹의 내성과 외성을 뒤흔든다.
각 문파가 공격당하여 혼란스러운 와중이었다. 거기에 승전보를 울리고, 새롭게 편성된 전투단을 출정시킨다. 사흑련 자체를 쓸어버리면 비겁하게 뒤를 공격하는 놈들도 발을 뺄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맹주는 그 부분에도 확실히 못을 박았다.
“맹의 부맹주와 각 문파의 장로분들로 구성된 현월대(玄月隊)도 이미 출정을 했습니다. 그들은 비겁하게 뒤를 치는 혈마교의 교도들을 쳐부술 겁니다.”
“우아아아아아!”
무림맹주 만묘신수는 모두 계획이 있었다.
“여러분도 곧 제대로 된 전투단에 이름을 올리고 출정할 수 있을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혼란은 적이 원하는 것입니다.”
무림맹에 집결했던 무인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소리치고 있다. 이미 전쟁은 벌어졌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모르겠으나 사흑련과의 평화가 그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빨리 놈들을 쳐부수고 정파의 세상을 만들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모르는 사실.
아직 전쟁은 제대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 * *
- 황실 소집 명령.
용성에 묶인 대가. 황극린과 뇌불은 황실의 소집 명령을 받았다. 내용인즉슨 북경으로 와서 황족을 지키라는 명령이다. 두 사람 다 그 소집에 참가하진 않았다. 움직인 건 뇌불이었다. 그는 흑주의 근황도 확인하고 황실의 근황을 확인하기 위해 만뇌문을 떠났다.
처음엔 황극린이 가려 했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혈마교가 아니로군.”
“예, 장로님이 보내 주신 정보를 확인하여 취합했지만, 아닌 것 같습니다.”
멀찍이 서서 상황을 지켜보면 보이는 게 있다.
중원 무림의 거대한 흐름에 무언가가 개입했다. 그 무언가가 어떤 세력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죽고 난 후의 일이었을지도 모르겠군.’
당시엔 생존밖에 생각하지 않았으니 무림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군데군데 혼란의 징후가 보이고 있었다.
이리 상황이 급격하게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언가는 왜 전쟁을 원하는 걸까?
그때, 황극린을 찾는 존재가 있었다.
“장로님! 그 여자가 난동을 피우고 있습니다!”
백온후가 찾아왔다.
그 여자라고 할 존재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뇌옥에 가둬 놓고 신경 쓰지 않았었다.
뇌옥으로 향한 황극린.
그곳에선 검후신제가 거미줄에 손발이 묶인 상태로 발광하고 있다. 이마를 몇 번이나 땅에 박았는지 피가 흥건하다.
“모두 다 네놈 때문이다! 네놈이 아니었다면! 죽어서 귀신이 되어 네놈과 함께할 것이다. 지옥까지 따라가 주마! 꺄하하핫!”
“…….”
황극린이 검후신제에게 다가간다.
그녀를 용서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사실을 알려 줘야 할 듯하다.
“네 아들은 살아 있다.”
“꺄하하핫-! 죽어서도 네놈을 저주… 뭐?”
심마에 걸린 듯 혼탁했던 검후신제의 눈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바다의 정수가 다시 바닥에서 샘솟고 있다.”
“그, 그게 무슨!”
믿지 못하는 게 아니다. 검후신제는 그 말이 사실이었으면 하고 믿고 싶었다. 하나,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선뜻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서문세가의 재건을 돕고 있다. 네가 한 짓 때문에 평생 속죄하며 살아가야 하지.”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겁니까?”
심마에 걸린 척 연기했던 건가.
금방 정상(?)으로 돌아온 검후신제다.
“믿지 않아도 좋다.”
“아, 아닙니다! 믿겠습니다! 부디 아이의 다른 소식을 알고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황극린이 혀를 차다가 물어본다.
“용왕궁과 비슷한 놈들이 있나?”
“예?”
그녀는 과거 용왕궁의 정체를 끝까지 들키지 않는다. 하나, 그게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그녀에게 다른 연줄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의문이 생겨났다.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검후신제가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다.
황극린이 대충 상황을 설명하자 검후신제가 뭔가 떠오른 듯이 감탄성을 터트렸다.
“그치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군요.”
“뭐라고 했지?”
“언젠가 비정상적인 무림을 뒤집어엎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빨라질 줄은 몰랐군요.”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황극린의 물음에 검후신제가 처량한 얼굴을 한다.
“제 아들이 확실히 살아 있다는 것만 알려 주신다면…….”
“서신을 보내라고 하지. 네 아들의 필적은 알아보겠지?”
“예! 예! 물론입니다! 제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지요!”
검후신제는 아들의 서신이 도착하면 나머지 내용을 말해 주겠다고 했지만, 황극린이 그럼 그냥 됐다고 떠나려고 하자 결국 그녀가 아는 것을 토해 낸다.
“제가 용성에 들어가려 했던 이유는 황실의 ‘금군’을 장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금군?”
“예,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황실에는 꽤 많은 비밀이 있습니다. 그들이 숨긴 비처에는…….”
검후신제의 말에 황극린의 표정이 진중하게 변한다.
“근데 네게 접근하여 용성을 장악하라 했던 게 누구라고?”
“자신을 배교의 부교주라 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육금연.”
제갈소희를 도와 회계산의 마경을 연구하고 있는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