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67화 (267/316)

267화 찾아가다

무림맹주가 죽었다.

당연히 모두가 경악할 일이다. 천하칠대고수이자 하북팽가의 가주였던 그가 죽었다. 감히 누가 그를 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범인이 북해빙궁으로 지목되는 순간, 납득하는 자들도 있었다. 대개 사흑련에 대하여 분노를 표출했지만 말이다.

직접적인 사인은 심장을 관통한 검격이었지만, 그의 몸 이곳저곳에 남은 건 동상 흔적. 거기다 무림맹주의 시신을 발견한 무림맹의 무인들은 당시에 그 자리에 혹한의 냉기가 서려 있었다고 했다. 빙공을 사용하는 문파가 북해빙궁만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무림맹주를 해할 수준의 문파는 북해빙궁뿐이다.

“당장 북해빙궁을 처단해야 합니다!”

“참으로 오래 참았소! 정과 사는 양립할 수 없소!”

“이런 상황에서 무림맹이 침묵한다면 백성들에게 면목이 없소이다!”

무림맹의 장로들뿐 아니라 모든 무인이 들고 일어섰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은 분위기 속에서 진짜 상황이 터졌다.

“급보! 급보! 황제 폐하께서 서거하셨다고 하오!”

“뭐라!?”

“대체 이게 무슨!”

“황실에서 소림사와 무당파 그리고 화산파의 장문인을 소환했소! 황실의 엄명으로 각 문파의 장문인들은 북경으로 가야 하오!”

명문거파의 장문인들을 부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황제가 죽었다. 금의위와 용성의 호위를 받고 백만 관군의 지배자인 황제가 말이다. 황족들은 황제의 범인을 밝히기 위함과 더불어 그들의 목숨을 지킬 절대고수를 초빙한 것이다.

무림맹주가 죽었다는 소식은 북경에도 전해졌으니 구파일련 장문인 전체를 소환하진 못했다.

“천화련주가 직접 나서 무림맹을 이끌어야 합니다!”

“믿을 건 천화련뿐이외다!”

무려 혈교를 멸교 직전으로 밀어붙였고, 마교의 수만 군세를 감당해 냈던 천화련이다. 백 년도 넘은 일이지만, 천화련의 경이로운 신위는 무림 전체에 전설처럼 남아 있다. 그들이 있다면 북해빙궁이야 금방 처단할 수 있으리라.

물론, 천화련만 믿고 있는 건 아니다.

평화에 찌들었던 정파인들이라고 하나 무림맹주의 죽음은 그들에게 크나큰 상실이다. 명문거파와 명문가의 정예들이 무림맹이 있는 정주로 집결했다.

그렇게 모인 정파 무림의 영웅호걸들.

당장이라도 북해에 출정하려는 순간.

“황제를 죽인 배후가 흑살문으로 밝혀졌다!”

무림맹의 총군사부는 사흑련이 손을 잡았다고 결론 내렸다. 정말 정사대전이 발발할 수도 있다. 아니, 이미 발발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전쟁은 이렇듯 갑작스럽다. 무림의 평화는 이렇듯 허상처럼 깨져 버렸다.

* * *

“네 생각은 어떠냐?”

“빙궁주가 정말 그랬을 거냐 묻는 것이오?”

“그래.”

“모르겠소. 솔직히 말하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긴 하다고 보오.”

뇌불은 부정하지 못했다.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다. 연모의 감정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단지, 더 강해지기 위해 북해빙궁의 무공을 훔쳐 내려 했을 뿐. 하나, 그의 마음속에선 왠지 모를 불안감이 감돌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나저나 묘하군. 저렇게 생각 없이 움직일 놈들이 아닌데 말이야.”

용성에 속한 만뇌문도 황실의 편에서 싸워야 한다. 황제를 암살한 배후가 흑살문으로 지목되었다. 황극린은 어차피 흑살문을 목표로 나아가고 있었기에 별상관 없다고 해도, 상황이 묘하다는 건 인정했다.

“북해빙궁과 흑살문을 배후로 몰아간 또 다른 배후가 있다는 말이오?”

“모르겠구나.”

혼란.

누가 진짜 범인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무림맹은 북해빙궁과 흑살문을 배후 세력으로 단정 지었다. 어느 한쪽이라도 선을 넘게 된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때부턴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승자만이 옳음을 증명할 수 있다.

“넌 어쩔 생각이냐?”

“일단 상황을 파악해야 하오. 교특범에게 명을 내렸으니 정보를 모아 올 것이오.”

“그래, 이런 상황에 앞에 나서는 건 위험하지. 그러자꾸나.”

갑자기 뇌불이 상황과 맞지 않는 표정으로 황극린을 흘끔 바라본다.

“다른 할 말이 있소?”

“크음! 운혜가 네게 할 말이 있던 것 같던데.”

“운혜 말이오?”

언제 저렇게 이름을 부를 정도가 된 걸까?

뭐, 황극린이 부재중일 때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다.

“그래, 너도 이제 혼기가 찼으니 슬슬 그, 뭐냐, 해야 하지 않겠느냐?”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남궁운혜가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이끌고 찾아왔었다고 한다. 당연히 상황이 이렇게 되니 남궁세가로 돌아갔고 말이다.

“하려면 문주가 먼저 하시오.”

정곡을 찌르는 말에 뇌불이 약간 당황했지만, 꿋꿋이 말을 이어 나간다.

“크음! 그 아이는 네가 준 인면지주를 잘 키워 냈더구나.”

뇌불은 황극린이 가정을 이루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는 하나다. 그를 정말 손자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가정을 이루고 화목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뇌불의 소원이나 마찬가지다. 남궁세가 정도면 뇌불도 인정할 가문이고, 남궁운혜의 조신한 성격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소?”

뭐, 과거에 상처를 주었다거나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정말 황극린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제껏 그가 만났던 여인 중 외모로 빼어난 이들은 꽤 많았다. 그렇다고 황극린은 혹했던 적이 없다.

“킁, 그리 관심이 없구나.”

여기서 더 몰아붙이면 역효과만 난다는 걸 잘 알고 뇌불도 말을 줄였다.

“그래도 이 말은 꼭 전해 주라고 하더구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꼭 한번 뵈었으면 한다고 말이야.”

“기억해 두겠소.”

인면지주에 대해 물어볼 게 있나?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면 성수신의나 뇌불에게 물어보아도 비슷한 대답을 들었을 것이다. 황극린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전의 화제로 돌아갔다.

“만약 흑살문과 북해빙궁을 배후로 몰아간 자들이 있다면 누구라고 보시오?”

“모르겠구나. 그런 간 큰 놈들이 있으려나? 잘못하다간 정사대전을 일으킬 수도 있고 흑살문과 북해빙궁에 보복을 당할 수도 있는데 말이야.”

“배교는 어떻소?”

“배교?”

그러고 보니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았다.

최근 천흉조차도 겨우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않았던가?

“가능성이 없진 않을 것 같군. 하나, 비밀이 많아 보일수록 오히려 허상이 많다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살아 보니 적이 가까운 곳에 있는 경우도 많더구나.”

“그 말이 맞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명확하게 사태를 직시하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다.

정보가 더 필요하다.

* * *

“물러서라!”

혹한의 폭풍이 몰아치는 곳. 이곳은 북해였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하얀 눈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 무림맹 무인 오십 명이 도착했다. 정확히는 하북팽가의 무인들이었다.

무림맹주의 죽음은 모두 안타까워하지만.

가장 분노하는 것은 하북팽가일 것이다.

“선을 넘으면 모두 죽는다.”

혹한의 추위처럼 냉정한 목소리의 여인. 하북팽가의 대공자 팽여해가 손을 들었다. 온몸이 얼어붙었지만, 타오르는 그의 눈빛을 식게 하지는 못하였다.

“우리는 싸우러 온 게 아니다.”

“그럼 떠나라, 감히 북해에 발을 디딜 생각은 하지 말고.”

“빙궁주를 불러와라!”

팽여해의 목소리에 순간 폭풍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를 잃었다는 슬픔과 그 순간 술이나 퍼마시고 있었다는 죄책감. 물론, 한 달 만에 먹는 것이긴 했지만, 그 당일에 무림맹주가 죽었다는 게 중요하다. 그 누구보다 든든했던 아버지가 말이다.

“불러와라! 할 말이 있으니까-!”

팽여해의 외침에 서릿발처럼 차가운 여인이라 해도 움찔했다. 중원의 인간들은 북해에 오면 추위에 몸을 떨기 마련인데 저 사내는 그리 두꺼운 옷을 껴입지 않고도 열기를 마구 뿜어 대고 있었다.

“네까짓 놈이 감히 궁주님을 뵐 수 있을 것 같으냐?”

“오지 않겠다면 돌파하겠다! 이것이 정사대전의 시초가 된다고 해도! 내가 죽는다고 해도! 난! 앞으로 나아가야겠다!”

사내라면 물러설 수 없을 때가 있다.

누군가는 멍청하다고 할 것이다. 아무리 하북팽가의 정예들과 함께 왔다고 해도, 상대는 북해빙궁주다. 거기다 그가 가장 존경했던 무림맹주를 죽인 빙궁주였다.

“돌격!”

빙궁도들은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피를 흘려서라도 원하는 것을 쟁취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무인이었다.

“막아라!”

두 문파가 격돌하려는 순간이었다.

“멈추어라.”

“……!”

모두가 움직임을 멈춘다. 고작 한 마디에 불과했다. 하지만 북해에서 마후의 피를 타고났다는 건, 혹한마저 지배한다는 뜻. 그녀의 말 한 마디에 휘몰아치는 폭풍이 멈추었다. 팽여해가 외칠 때처럼 ‘멈춘 듯’ 느껴지는 게 아니라, 정말 일정 주위로만 폭풍이 몰아치지 않았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하북팽가의 무인들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딱 한 사람만 빼고.

“네가 빙궁주로구나!”

팽여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눈빛으로 외쳤다.

“부궁주님을 뵙습니다!”

“뭐……?”

장렬한 죽음마저 각오했다. 혹자는 어리석다 욕할 죽음이라도 하나하나 신경 쓰며 무림맹에서 귀만 쫑긋 세우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했다. 최소한 자신이 죽는다면 하북팽가의 원수가 북해빙궁이라는 걸 가문에 똑똑히 새겨 주리라는 마음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빙궁주로 알았던 여인. 평여해와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을 것 같은 젊음을 유지한 여인은 궁주가 아니었다. 부궁주였다.

‘……!’

대체 어느 정도의 내공이 있어야 주위의 폭풍을 물릴 수가 있는가?

궁주급은 되어야 저 정도 신위를 낼 수 있다. 그러니 아버지도 빙궁주에게 패배했으리라. 그들이 물리쳐야 할 적은 빙궁주 하나다. 그런 결의가 흔들린다.

부궁주마저 저런 신위를 뽐내는데, 궁주는……?

“부궁주라고?”

“그렇단다.”

몹시 자애로운 목소리. 상상했던 빙궁도와는 전혀 다르다. 경계를 서던 빙궁도 때와는 전혀 달라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 같았다.

“춥구나.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포위망을 풀거라.”

“예, 부궁주님!”

하북팽가의 무인들을 절대 들이려 하지 않았던 빙궁도들이 어이없을 정도로 포위망을 풀어 길을 터 주었다. 하북팽가의 대공자, 팽여해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간다.

“가자!”

팽여해의 외침에 움츠러들었던 팽가의 식솔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1진에서 경계를 서던 북해의 경계조 조장은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죽음을 각오한 이들은 다르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경계를 서는 빙궁도들의 얼굴에선 긍정의 빛이 떠올랐다.

* * *

북해의 중심부.

냉기에 내성이 없다면 얼어 죽기 딱 좋은 추위다. 초입에서 잘 버티던 팽가의 무인들도 이곳에선 코가 빨갛게 변한 채 파들파들 떨어 댔다. 팽여해는 추웠지만, 당당하게 부궁주의 앞에 섰다.

그녀의 앞에 서면 기세에서 압도당한다.

일부러 기운을 뿜어내는 건 아니다. 그런데 왜인지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이게 절대자라는 것일까.

“대답해 주시오.”

“뭘 말이더냐?”

“빙궁주가 우리 아버지를 죽였소?”

그 말에 여인이 옅은 웃음을 띠었다.

“그렇다면 어쩔 것이더냐?”

“뭣이!”

팽여해가 거대한 도를 들어 올렸다.

부궁주 한소연은 그런 팽여해를 안쓰럽게 바라볼 뿐이다.

“무림맹주는 올곧은 사람이라 생각하느냐.”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려는 거냐!”

“그냥 묻는 것이란다.”

“당연하지! 우리 아버지는 천하가 인정하는 대협이셨다. 그렇기에 무림맹주의 자리에 오르신 것이다!”

피를 토하듯 외치는 팽여해.

한소연이 말한다.

“그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단다. 적어도 궁주님의 기준에선 말이다.”

“…….”

팽여해는 더는 소리치지 않았다. 그가 해야 할 건 하나. 최소한 부궁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새겨야 한다. 팔 하나. 아니, 손가락 하나라도 좋다. 여기서 복수하고, 팽가에 북해빙궁이 원수라는 걸 알린다.

그렇게 팽여해가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솨아아아아-!

북해에 어울리지 않는 미풍이 공간에 몰아친다.

하지만 그 미풍에 팽여해의 움직임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가 계속 그곳에 있었다면 죽었을 거란다. 곧 궁주님이 오실 테니까.”

얼어붙은 팽여해.

그는 부궁주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죽은 건 아니었지만 부궁주가 냉기를 회수할 때까지 깨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 아이의 인연을 빼앗고 싶지 않구나. 최소한 내 눈앞에서는 말이다.”

나지막이 말한 부궁주의 눈에 귀기가 어렸다.

이제껏 보여 주었던 온화한 얼굴과는 전혀 다르다.

“팽가의 무인들을 빙옥에 가두도록.”

“예, 부궁주님.”

부궁주가 일어서서 창에 기대었다.

밖으로 하얀 폭풍이 쉴 새 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