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변화
“그건 잘 모르겠소.”
“그렇… 군요…….”
황극린이 묻는다.
“당신에게 정말 딸이 있소?”
천흉은 이제 다 포기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억과 회한이 담긴 표정이다. 의아하다. 황극린이 알고 있는 천흉이라면 저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거다. 천흉이 아닌가?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써 해방된다며 괴상한 교리를 퍼트리고 혈겁을 일으켰던 천흉이 아니던가?
“있답니다.”
“그리워하는 것 같소만.”
“이미 늦어 버렸답니다.”
늦었다.
그 말이 뜻하는 건 무엇일까. 왜인지 황극린은 알 것 같았다. 인간은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그른 행동을 할 때가 있다.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되지만, 용기를 내면 된다는 걸 알지만… 그게 절대 불가능할 때도 있었다.
황극린은 그녀가 연기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애초에 남궁운혜를 이용할 생각이었다면, 그녀는 이미 행동에 옮겼으리라. 하나, 과거와는 달리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과거 남궁운혜가 사망교에 납치된 건, 천흉의 뜻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황극린의 상상에 불과하다.
천흉이 영악하게도 모든 감정을 숨기고 황극린 앞에서 연기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운혜라는 이름은 제가 지어 준 이름이랍니다.”
그녀가 언급했다.
황극린이 그 정체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손가락만 대도 부서질 것 같아서 만지기도 무서운 아이였지요. 언젠가 그 아이가 장성하여 저와 손을 잡고 저잣거리에 나서는 상상을 한 적도 있답니다. 참으로 즐거웠었지요.”
“왜 떠났소?”
“힘이 없었으니까요.”
“당신은 혈마교의 직계가 아니오?”
“네, 힘이 없어 소교주 경쟁에서 밀려 도망쳤었지요. 그리고 살기 위해서 배교에 입교하게 되었고요.”
부쩍 감성적으로 변해 버린 천흉이었다.
황극린은 여기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딸을 사랑한다. 그녀의 눈빛을 보고 있자면 어릴 적에 보여 주었던 아버지의 시선이 떠오른다. 병석에 누워 죽어 가고 있었음에도 사랑을 담아 머리를 쓰다듬던 어머니도 떠올랐다.
인간의 감정이란 묘하다.
황극린은 부모님을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자식을 생각하는 천흉이 보여 주는 의외의 모습에 과거가 떠올랐다.
“배교에 약점이라도 잡힌 것이오?”
그 말에 천흉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소녀환희공의 향이 공간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공을 운기함으로써 정신을 차리려 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 황극린에게 들으리라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일까?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었다.
하나, 그리해서는 안 된다.
이미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고 있었다. 여기서 포기한다면 그녀의 과거는 무엇이 되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온 것인가?
“아뇨. 약점 따위는 잡히지 않았답니다. 약점이 잡혔다면 부교주의 위에 오르지도 못하지 않았겠…….”
“말해 보시오.”
“뭘 말인가요?”
“배교에 잡힌 약점이 무엇인지.”
“그런 것은 없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해결해 주겠소.”
“당신이 무슨 수로?”
표독한 말투로 변해 버린 천흉.
감정의 기복이 상당하다.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요.”
황극린이 눈을 감는다.
천흉은 짜증이 났다. 대체 왜 인정했을까? 황극린은 자신의 딸보다 어린 사내가 아닌가? 거기다가 생각해 보니 그를 유혹하려고도 했었다.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를 기다리며 떠올렸던 상상.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 스쳐 가며 그녀의 분노가 거세지고 있었다. 일종의 현실도피였다. 이제껏 그러했던 것처럼.
“당신의 제안은 거절하겠어요. 전 마령이라는 아이를 도와줘야 할 이유가 전혀 없…….”
“고독이로군.”
“……!”
황극린은 느낄 수 있다.
처음엔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천흉의 감정이 격해짐에 따라 심장의 박동이 빨라졌다. 그리고 심장 속에 기생하고 있던 놈이 몸을 뒤척였다. 천흉의 심장엔 고독이 살아가고 있다. 그게 혈고독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처음 고독을 사용했다고 알려진 문파가 배교였다.
그들이 혈고독을 이용한 게 의외는 아니다.
“그걸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요? 고독을 제거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아요. 무림의 그 어떤 누구도 제 심장의 고독을 제거할 수는 없…….”
“가능하오.”
황극린의 확신.
천흉이 인상을 찌푸린다. 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그리고 고독에 대해서 알고 있긴 한가? 심장에 고독이 박혀 살아왔던 그녀의 심정을 알고나 있을까? 소중한 것을 버려야 했던 슬픔을 겪어 본 적이나 있을까?
황극린은 성공 가도를 달려왔다.
실패 따위는 한 번도 겪지 못하고, 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무인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런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진 것이다. 그런 오만함을 깔아뭉개고 싶었다. 아무리 강해도 바꿀 수 없는 게 있다. 그게 바로 그녀의 운명이다. 언젠가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을 것이다. 소중한 딸과 마주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흥, 당신이 고독에 대해 뭘 알고 있죠? 고독은 저주받은 벌레랍니다. 아니, 영물이라고도 할 수 있죠. 인간을 통제하기 만들어진 저주의 영물 말이에요! 평생 좌절 따위는 겪어 보지 못한 당신이 알지 못하는 저주의 산물이라고요!”
“일어나시오.”
“하, 기분이 나쁘셨던 모양이로군요. 당장 생사결이라도…….”
황극린은 그녀를 무시하듯 지나쳤다.
참으로 일관된 무심함이었다.
“만뇌문으로 갑시다. 보여 줄 게 있소.”
“뭘 보여 준다는 말인가요?”
“고독.”
“……?”
현 무림에서 고독에 대하여 가장 잘 아는 사람을 두 명 꼽으라면.
황극린과 성수신의였다.
* * *
“말도 안 돼……!”
드넓은 잔디밭을 기어 다니는 수백 마리의 고독.
혈고독과 파열고는 훌륭한 영약의 재료였다. 성수신의는 작정하고 혈고독과 파열고를 길러 왔다.
배교의 부교주 천흉은 파열고를 보았다.
저건 혈마교의 수라천가에서 기르는 미친 고독이 아닌가? 인간의 장기를 모두 파먹고, 호신강기마저 종잇장처럼 찢어 버린다는 고독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꼬물꼬물 기어 다니는 붉은 벌레. 그것은…….
“혈고독이 어떻게?”
그녀의 심장에 박힌 벌레가 바로 그것이었다.
언제나 그녀의 심장을 위협하고, 그녀가 영원히 배교를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저주받은 벌레.
“혈귀를 안다면서 그 소식은 듣지 못했나 보오?”
황극린은 당시 87호에게서 천기피독신주를 회수하며 흑살문 살수들의 심장에 박힌 혈고독을 회수했다. 흑살문에서 짝이 되는 혈고독을 죽이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새끼를 낳도록 했다. 성수신의의 결실이 이곳에 펼쳐져 있다.
“당신의 혈고독을 제거해 주겠소.”
“정말… 정말 가능하다는 말인가요?”
이쯤 되면 믿을 수밖에 없다. 천흉을 속이려고 일부러 혈고독과 파열고를 키웠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하다.
“가능하오.”
황극린의 피가 있다면 혈고독도 제거할 수 있다. 물론,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성수신의의 도움도 확실하게 필요하다.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이오.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 하나, 완벽하게 고독을 제거해 주겠소. 그러겠소?”
천흉.
혼란스러운 얼굴로 황극린을 바라본다. 가벼운 마음으로 만뇌문으로 향했다. 이곳에 와서 딸의 이야기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거기다 고독을 제거해 주겠다니? 그녀는 자기 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녀에게 고독이 없었다면? 어떤 삶을 살아갔을까?
이쯤 되면 황극린의 말을 의심하는 게 더 어리석다.
“믿겠어요. 만약 제 몸에 있는 혈고독이 제거된다면… 황 장로의 명령을 모두 따르도록 하죠.”
“그건 알아서 하면 되오.”
* * *
시술이라고 할까?
혈고독을 제거하는 건 황극린의 피가 있더라도, 혈고독의 행동 양식을 파악한 성수신의가 있더라도 쉬운 게 아니다. 혈고독을 없애는 연구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황극린은 혹여나 흑살문의 살수 중에서 포섭할 사람이 있으면 혈고독을 제거해 주는 대가로 품으려 했었다.
물론, 대부분 살수가 세뇌가 되어 혈고독이 없더라도 흑살문에 충성하고 있으니 솔직히 그럴 일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천흉이 혈고독을 품고 있었다니?
명색이 혈마교 출신이자 배교의 부교주가 아닌가? 다른 부교주인 육금연도 혈고독에 협박당하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혈고독 제거 시술의 마지막을 지켜본다.
“쿨럭!”
붉은 피를 뱉어 낸 천흉.
보름 넘게 혈고독 제거를 위해 황극린과 성수신의가 힘을 썼다. 물론, 가장 고생한 건 천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가 뱉어 낸 피에는 혈고독의 살점들이 아주 작게 갈려 있었다. 혈맥을 통해 혈고독을 제거하려면 놈을 분해시켜야 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혈고독이 분해되며 독을 배출하지 못하게 해야 했기에 성수신의가 만든 특수 영약도 꽤 소모되었다.
천흉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계속 토악질을 했다.
“축하합니다. 혈고독이 완전히 배출된 것 같습니다.”
성수신의가 천흉에게 말한다.
천흉은 거친 기침을 토해 내다가 움직임이 멎었다.
“이게… 혈고독…….”
“당분간 몸조리를 하셔야 할 겁니다. 최소한 한 달은 요양하셔야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천흉.
그녀가 허리를 숙인다.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평생을 바라 왔던 소원이 두 분 덕에 이루어졌습니다.”
황극린이 그녀에게 묻는다.
지금 이 순간에 그가 가장 궁금한 건 하나였다.
“이제 딸을 보러 갈 수 있겠소?”
하지만 황극린의 예상과는 달리.
“그건… 힘들겠네요.”
천흉은 쓸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왠지 그런 그녀의 마음도 이해가 됐다. 이유야 어찌 됐든 어린 시절 자식을 내팽개치고 도망친 게 바로 천흉이었다. 그로 인해 남궁운혜는 많은 상처를 받았다. 이제 와서 딸아이의 앞에 나타나는 게 옳은 행동일까? 황극린은 그런 행동을 강요할 수 없다.
“알겠소. 쉬시오.”
황극린과 성수신의가 떠나가고.
천흉이 천장을 바라본다.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이거나 하진 않는다.
다만, 그런 건 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된 건가.”
그녀가 하고 싶었던 건 무엇이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다. 무언가를 열중하여 준비한 적도 있다. 언젠간 야심차게 배교의 뒤통수를 때리리라 다짐한 적도 있다. 혈마교에 달라진 그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던 적도.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은…….
“보고 싶구나.”
딸 남궁운혜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 * *
남궁운혜.
요즘 그녀가 하는 일과는 정해져 있었다. 누군가를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수련한다. 점심을 먹고 그녀가 키우는 ‘백주’에게 가서 영약을 섞은 밥을 나눠 준다. 그리고 백주의 앞에서 내공심법을 운기하며, 깜찍한 백주가 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백주가 졸려서 잠에 빠지면 그녀는 다시 수련했다.
그녀 또한 상당한 재능을 타고났다. 특히 지칠 줄 모르는 집념이 그녀가 가진 최고의 무기였다. 활발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한 가지에 꽂히면 그걸 이룰 때까지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또 몰아붙인다.
그녀의 아버지 창천뇌검이 걱정할 때도 있었지만, 그녀는 다음 날의 훈련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휴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먼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후우.”
말끔하게 씻고 방으로 돌아온 남궁운혜가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몸을 혹사했기 때문인지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황극린을 만난 뒤로는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으므로 눈을 뜨면 바로 아침일 것이다.
남궁운혜가 잠에 빠진 뒤 눈을 떴다.
그런데 감각이 이상하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 붕 뜨는 듯한 느낌에 머리가 멍하다. 주변의 광경이 시시각각 뒤집히고 있었다.
‘꿈이구나.’
인간이라면 꿈을 꾸는 게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남궁운혜는 덜컥 겁이 났다. 그녀가 꾸던 악몽은 참으로 많은 것을 보여 주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죽는 모습이나 누군가 남궁운혜를 납치한다든가 하는 것들. 그리고 참으로 오랜만에 꿈에 어머니가 나왔다. 기억 속의 어머니는 아름다웠다. 사실 제대로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기에 어머니의 얼굴은 달걀처럼 매끈했다.
그 모호함에 눈앞에 있는 이가 어머니라는 걸 깨달았다.
“네년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어머니는 대뜸 남궁운혜를 저주했다.
“꼴좋구나! 네년이 나락으로 빠지는 것을 보니 참으로 시원하구나. 약해 빠졌으니 그런 일을 당해도 싸지! 흐흐흐흣! 다 네 업보가 아니겠느냐?”
왜 저런 말을 내뱉을까?
과거의 남궁운혜였다면 울며 소리쳤을 것이다. 버린 것은 어머니가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남궁운혜는 여유롭게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은 내 어머니가 아니에요.”
달걀 형태의 얼굴에서 무언가 표정이 떠오른 듯했다.
분명 저주의 말을 내뱉고 있었을 텐데, 악몽에 등장한 남궁운혜의 어머니는 슬픈 표정을 한 듯했다.
“그냥 꿈의 파편일 뿐이에요.”
남궁운혜는 자신이 꾸는 꿈이 현실에서 이뤄지는 것을 몇 번 보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꿈도 잘 꾸지 않았고, 꿈을 꾸더라도 현실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녀는 악몽을 이겨 낼 방법을 깨달았다.
“그러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죠.”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남궁운혜가 다시 한번 눈을 떴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