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55화 (255/316)

255화 천흉

새롭게 알아낸 것은 회생비록의 저자가 다를 수도 있다는 거다. 마경에서 발견한 회생비록과 황극린이 가지고 있던 회생비록은 전혀 다르다. 시종일관 비관적으로 한 사람의 삶을 풀어낸 회생비록과는 달리 바다에서 발견한 것은 음울한 느낌도 있었지만, 종국에는 희망으로 결론지었다.

‘결국, 남는 것은 이름이다. 성군(聖君)이 되어 태평성대를 이룬다면 후대의 제황들은 언제까지고 그 이름을 언급할 것이다. 그러니 영원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성군이 되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결론을 냈다.

사실 결론보다는 중간중간 저자가 남긴 무공 구결과 흡사한 것들이 훨씬 더 황극린에게 더 도움이 되겠지만 말이다.

‘아니지. 한 사람일 수도 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계속 달라지니까.’

황극린도 그러하다.

그가 처음 전생하던 무렵과 지금을 비교하면 확실히 그는 변화했다. 그가 인지하지 못한 부분도 많겠지만, 그는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달라지고 바뀌었다. 그 성장이 모두 옳은 방향이라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몇 번이고 회생비록을 읽고 결론을 낸 황극린.

그가 고개를 돌린다.

흑주 몸통에 솟아난 얼굴의 이목구비가 더욱 선명해졌다. 그리고 흑주가 말을 할 때, 그 얼굴이 조금씩 움직이는 게 보였다.

‘영물이 사람이 될 수도 있는가.’

그 부분에 대하여 성수신의는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역사상 영물이 인간처럼 변화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일까? 회생비록의 존재만 하더라도 황극린은 알지 못했다. 흑주는 이미 그 어떤 인면지주도 가지지 못한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도 환골탈태로 새로운 육신을 가지고, 반로환동으로 젊음을 되찾는다. 영물이라고 그게 불가능할까?

어쩌면 현무의 육신을 다 포식한다면, 흑주에게 유의미한 변화가 생길 것이라 확신했다.

문제는…….

‘다 먹으려면 일 년이 걸리겠군.’

현무의 육신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다는 것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 포식하고 나면 흑주가 더 이상 먹지 못한다는 게 문제였다. 소 한 마리도 한 끼 식사로 거뜬히 먹어 치우는 흑주였지만, 현무는 잘 소화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씩 먹는 양이 많아지긴 했지만, 그렇게 큰 변화의 폭은 없었다.

‘흑주도 알아서 잘 조절하는 것 같고.’

흑주의 소화 속도가 느린 것도 있었지만, 녀석은 스스로 자중하고 있었다. 자제심을 잃고 현무를 모두 포식해 버렸다간 무언가 잘못된다는 걸 깨달은 걸까? 어떤 것이든 과한 것은 독이 된다. 영약도 다루지 못할 수준으로 많이 취한다면 주화입마에 빠진다. 무림 제일의 영약이라 손꼽히는 대환단도 내공심법을 익히지 못한 범부가 취한다면 아마 영약을 백분지 일도 취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리라.

“흑주.”

- 끼?

“혼자서 여기에 있을 수 있겠느냐?”

녀석은 고민한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 끼이.

해 보겠다는 울음소리. 날개가 작게 퍼덕이고 있었다.

“좋다.”

황극린이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바로 적혈강으로 만든 황극린의 혈석이었다.

“만약 무언가 잘못되는 것 같으면 이걸 취하거라.”

흑주가 혈석을 알아보았는지 흥분하다가 이내 진정한다.

“네가 이놈처럼 마물이 되는 건 원하지 않는다. 만약 더 취하지 못할 것 같으면 언제든 그만두어라.”

- 꾸이!

황극린의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흑주가 결의에 찬 울음을 터트렸다.

천흉이 왔다고 했다.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녀는 과거 무림을 뒤흔들었던 사망교의 교주. 용왕궁주보다 더 많은 혈겁을 일으켰다. 용왕궁주 검후신제는 은밀하게 정체를 들키지 않게 움직였으나 그녀는 마치 뒤가 없는 듯이 행동했었다. 만약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청성산에서 처리할 생각도 하고 있다.

“그래. 그럼 잠시 다녀오도록 하마.”

* * *

금령신단을 취했기 때문인지 황극린의 체력은 훨씬 더 좋아졌다. 내공을 많이 소모하지 않고도 더 빠르고 오래 달릴 수 있었다. 잠깐 눈을 붙여 쉴 때를 제외하곤 달리고 달려 만뇌문에 도착했다.

만뇌문 입구에 만들어진 간이 숙소. 만뇌문의 총관 사마영이 제안한 것이다. 만뇌문은 진법으로 보호되고 있으니 위험 요소는 애초에 바깥에 두도록 하자는 것이다.

황극린이 도착했는데도 숙소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그가 들어간다.

흔들리는 물소리가 들린다.

씻고 있는 모양이었다.

“황극린이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황극린의 말에 물소리가 멈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젖은 머리카락이 살갗에 달라붙은 여인이 욕탕을 나섰다. 그녀는 얇은 천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는데, 제대로 물기를 닦지도 않았는지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보통 그런 모습을 보이면 사내는 당황한다.

천흉의 외모는 사내뿐 아니라 여인들마저도 홀릴 수준이었다. 거기에 관능미를 연출하여 일부러 행동하고 있으니 감히 눈을 떼지도 못하고, 정면으로 마주하지도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당황하지 않아도 최소한 화를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극린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처음 뵙소.”

“…….”

무신경하다.

뇌불조차도 천흉의 색기에 화를 내며 반응했다. 백온후와 구자광마저도 그녀의 앞에 서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그녀의 미모도 있었지만, 천흉이 익힌 무공의 탓도 있었다. 소녀환희공(素女歡喜功). 과거 황극린에게 죽임을 당했던 혈귀비가 익혔던 무공이었고, 천흉은 소녀환희공을 대성했다. 지금 천흉은 작정하고 황극린을 유혹하려 하고 있었다.

황극린 정도의 고수가 한 번에 넘어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에 흥분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불쾌감을 표출하거나 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황극린은 마치 지나가는 돌멩이를 보듯 무심했다.

천흉이 참으로 오랜만에 당황한다. 내색하지는 않았다.

“어머, 죄송해요. 바깥에 계신 줄 몰랐답니다. 못 볼 꼴을 보이고 말았군요.”

“괜찮소. 닦고 오겠소?”

“으으음, 전 씻고 물기를 다 닦는 편이 아니라서요. 이대로도 괜찮다면…….”

“그러시오.”

“…….”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황극린의 앞에 앉은 천흉. 은근히 속살을 내비치기도 하고,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기도 했다.

역시나 반응이 없다.

‘설마 동자공을 익혔나?’

황극린이 강한 이유.

동자공은 흔하다면 흔한 무공이지만, 평범한 정신력으로는 익힐 수 없다. 동자공의 경지가 상승하면 상승할수록 반대로 성욕이 강해진다. 물론, 대성하면 욕구에서 초탈할 수 있다고는 했다.

‘아니야. 그냥 내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거야.’

기분이 나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소녀환희공의 효능은 배교주도 인정한 바가 있었다. 천하칠대고수라도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10성에 이른 소녀환희공으로 그 사내를 유혹한 적도 있었다.

‘소문대로인가.’

혹시 몰랐기에 여지는 남겨 둔다.

천흉은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하기로 했다.

“육 부교주에게 들었답니다. 절 찾으셨다고요?”

“그렇소.”

“이유가 뭐죠?”

“혈마교에서 당신을 찾고 있소. 정확히 말하면 당신의 조카인 마령 소저가 말이오.”

“마령?”

꽤 고민하던 그녀가 결국 마령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가 세 살 때였던가? 확실하지 않다.

“그 아이가 왜 절 찾는다는 거죠?”

“그녀는 소교주 쟁탈전에서 당신의 후원을 받고 싶어 하오. 다른 소교주 후보들은 부교주가 뒤를 지켜 준다고 하더군.”

“소교주라.”

천흉이 도도한 얼굴로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제가 왜 그래야 하나요?”

“배교에서 나올 생각이지 않소?”

“…….”

그녀는 배교에 영원히 머물 생각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천흉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알아서는 안 되는 사실이다.

“육 부교주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내 예상이오.”

“분명 저와 처음 볼 텐데, 어찌 그렇게 단언하시는 건가요? 이유가 궁금한데요.”

여유로운 말투였지만, 천흉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예사롭지 않았다.

여차하면 전투라도 불사할 기세였다.

“지흉.”

“……!”

“그놈이 말하더군.”

“감히!”

천흉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가진 악의가 형체를 갖추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각종 집기가 크게 흔들리고, 심지어는 임시로 지어진 숙소마저 작게 흔들리고 있다. 참으로 심오한 내력이었다.

“네놈이 혈귀로구나!”

“혈귀?”

이제는 황극린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흑살문의 최상급 살수 87호를 죽이고 혈귀라 불리게 된 것을 알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지흉을 죽일 때는 비밀리에 활동하지 않았다. 대놓고 움직였고, 결국 납치당한 남궁운혜를 구출했었다.

정보의 괴리가 존재하는 듯하다.

“내 아이를 죽인 게 혈귀라 들었다. 그게 너였구나!”

“그건 맞지만, 난 정체를 숨긴 적이 없소.”

“뭐라?”

“지흉이 남궁운혜를 납치했소. 그래서 구출하러 갔던 것뿐이지. 그 과정에서 당신의 이름을 들었소.”

무슨 변명을 하는지 들어 보려 했던 천흉이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황극린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당시에 꽤 난리가 났던 일이었는데, 네 귀에는 들어가지 못한 모양이군. 배교에서 네게 들어가는 정보를 조작했나? 배교의 부교주라고 알고 있는데, 정보가 조작될 정도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나섰나 보군.”

“…….”

왜인지 천흉의 기세가 푹 꺾였다.

물론, 황극린에 대한 살의는 남아 있었지만, 행동을 이어 갈 것 같지 않았다.

“…지흉이 남궁가의 여식을 납치하려 했었나?”

“그렇소.”

“네가 구해 줬고?”

“맞소.”

“그렇군요.”

천흉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되돌아왔다.

“상황은 알겠어요. 당시 저는 폐관에 들어간 상태여서 상황이 다 끝난 뒤에야 사실을 알게 되었죠. 당시 교주께서는 혈귀가 범인이라 하셨답니다. 당연히 혈귀라는 별호를 가진 이는 무림에 존재하지 않았고요.”

배교주가 혈귀를 언급한 건 그냥 우연일까?

흑살문은 87호를 죽인 범인을 혈귀라 칭했다. 그냥 대충 아무 별호나 둘러댄 것일 수도 있다. 천흉이 무림을 헤집어 놓지 못하도록 말이다. 우연이라기엔 조금 묘하긴 했지만 말이다.

“배교주가 당신을 속였다는 말이로군.”

“그런가 보네요.”

왜인지 천흉은 분노하지 않았다. 배교주와 문제가 있는 걸까? 천흉이 배교를 나와 사망교를 만든 것은 두 사람 사이가 갈라졌기 때문일까? 황극린은 그런 전후 사정은 모른다. 단지, 그녀가 사망교를 만들어 활동했다는 결과만 알고 있을 뿐.

“하나, 그것이 제가 마령이라는 아이를 도와줘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답니다. 전 혈마교의 권력 투쟁에 관심이 없답니다.”

“그럼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오?”

잠시 침묵하던 천흉이 답한다.

“그러게요……? 생각해 보니 잘 모르겠네요. 뭐, 여인으로서 소박한 꿈은 있긴 한데…….”

은은하면서도 슬픈 눈동자로 황극린을 응시한다. 그 순간 소녀환희공의 기운이 강해졌다. 황극린의 정신을 뒤흔들려는 것이다. 당연히 황극린에겐 그런 공격이 전혀 효과가 없었다. 동시에 황극린은 무공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천흉에게 반격을 가한다.

“혹시 딸이 있소?”

소녀환희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황극린의 주변을 잠식하던 미혹의 향이 허무하게 흩어져 버렸다.

“지금… 그게 무슨 뜻이죠?”

“가만히 얼굴을 보고 있으니.”

황극린이 눈이 가늘어진다.

“내가 아는 누군가와 닮은 것 같아서 말이오.”

덜덜.

천흉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다. 황극린은 솔직히 의아했다. 분명 그녀는 전생에 남궁운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결국, 남궁운혜를 놓아주긴 했지만… 남궁운혜는 천흉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었다.

황극린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하나였다.

천흉이 만약.

남궁운혜를 또 해할 생각이 있다면 천흉을 죽일 생각이었다. 마령과의 약조도 있었지만, 천흉이 제어할 수 없는 악인이라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저와 닮았다는 게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황극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말하기가 조금 곤란하오만. 당신은 배교의 교도가 아니오?”

“내가… 내 딸을 해하기라도 한다는 말씀인가요?”

천흉은 사망교를 만들어 수많은 혈겁을 일으켰다.

아이와 노인를 가리지 않았고, 인간의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할 말은 아니긴 했다.

하나, 그것은 모두 황극린이 천흉에 대한 소문만 들었기 때문이다.

황극린은 살수이던 시절 천흉과 마주한 적이 없었다.

혼란스러운 얼굴의 천흉.

그녀가 기나긴 시간 동안 고민하다가 황극린에게 물었다.

“저와 닮았다는 그 아이는 어떻게… 행복하게… 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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