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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233화 (233/316)

233화 대가를 치러야 한다

황극린의 곁에 선 서문세가의 태상가주 서문륭. 어려 보였지만 그의 본질은 평생 강호를 살아온 노고수였다. 그는 자신의 외관마저 무기로 이용했다. 은근히 빈틈을 노출하고, 적이 방심하면 최선을 다해 반격한다.

새로이 등장한 용왕궁도들의 실력도 결코 부족한 것이 아니었지만, 서문륭의 방비를 뚫을 수는 없었다.

“…한 놈은 놓쳐 버렸습니다.”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 멀찍이 서서 상황을 지켜보더니 전력을 다해 도주했다.

“괜찮습니다, 간부 하나를 사로잡았으니.”

뇌섬사에 꽁꽁 묶인 사내. 혹시 정신이 깨어나 자결할지도 모르기에 황극린은 움직일 수 없었다. 회색 머리카락 사내의 계급이 더 높을 수도 있지만, 도박은 하지 않기로 했다. 둘 다 잡으려다 모두를 놓칠 수도 있었기에.

“후우.”

쓰러진 용왕궁도들을 보며 서문륭이 한숨을 내쉰다.

겉으로는 여유로워 보였지만, 눈동자에 맺히는 살기만큼은 형형했다. 당연한 일이다. 이들이 서문세가에 혈겁을 일으킨 놈들이다.

“이깟 서책이 뭐라고.”

솔직히 말하면 그냥 달라고 했다면 줬을 수도 있다. 서문륭은 회생비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으니 과거를 후회해 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저, 저기…….”

황극린과 태상가주에게 현령 최검추가 다가온다.

관군들이 두 사람을 포위하려는 것을 막아 내곤 마지막 도리를 다했다는 양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 정도면 자신의 죄가 줄어들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항주 현령 최검추라고 합니다. 모두 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저는 간악무도한 저 사파 종자들에게 협박당해서 억지로…….”

당연히 서문륭의 반응은 싸늘했다.

“사람을 죽여 놓고 협박당했다고 변명할 셈이오?”

“아니, 지금 죽은 사람이 누가 있다고… 크음, 아닙니다. 모두 다 제 불찰입니다.”

어린 외관에 깜빡 속아 버린 최검추가 순간 화를 낼 뻔 했지만, 그가 보여 줬던 무력을 상기하고는 다시 두 손을 살살 비빈다. 전형적인 아첨꾼의 관상이다.

“괜찮소.”

황극린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예? 정말입니까!?”

최검추는 황극린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그가 보기에 황극린은 이 자리에서 가장 권한이 컸다. 그가 괜찮다고 하면 다 되는 것이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황 대협이시라면 제 사정을 이해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역시 같은 관아에 소속되어 있어서 그런지…….”

황극린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대가는 치를 거요.”

“대가라뇨……? 무슨 대가를 말씀하시는 건지……?”

“혀, 현령님!”

“……?”

“저, 저기에!”

쿵쿵쿵쿵쿵!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 관군들이 먼저 긴장한다. 관도를 따라 달려오는 황토색 의복을 입은 무리. 꽤 빠른 속도로 달려옴에도 행렬이 일정하다. 일반 백성이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모습이다.

관군들이 어정쩡한 자세로 대응하려 했지만, 기마병들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정렬하여 관군들을 포위한다. 현령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조, 좆됐다!’

어찌 모를 수 있으랴?

황토색 의복을 입고 갑주를 착용한 말에 올라탄 병사들. 연노(連弩)와는 생김새가 다른 쇠뇌를 들고 있으며, 등엔 언월도(偃月刀)를 메고 있다.

“신기영(神機營)!”

현령 외에도 그들의 정체를 짐작한 사람이 있었다. 신기영이라는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란다. 황실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수의 관군들을 휘하에 두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부대를 꼽으라면 단연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특무부대. 고도로 훈련된 말을 타고 기동하며 정확하게 미간에 화살을 꽂아 버리는 신기의 영역에 도달한 궁수들.

그들이 바로 신기영이었다.

“현렁 최검추 앞으로.”

모두 황갈색의 말을 타고 있었지만, 개중 한 사람만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흑마를 이끌고 있다. 최검추는 저항할 의지도 상실한 채 앞으로 달려 나간다. 그의 머릿속에는 명령을 수행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사사로이 관군을 움직여 혼란을 야기한 죄, 황실은 반란으로 판단하고 있다.”

“바, 반란이라뇨? 제가 감히 그런 망측한 짓을…….”

“그 입 다물도록.”

“……!”

신기영이라는 특무부대를 이끄는 신기영주 교진운.

대부분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유명한 특무부대는 모두 무공을 익혔다. 황실 또한 구파일련을 비롯한 오대세가의 힘이 증대되는 것에 걱정이 앞섰으며, 그로 인해 관군 중 특출한 재능을 가진 이들을 차출하여 무공을 익히도록 한다.

신기영주 또한 상당한 경지에 이른 무관이었다.

그의 목소리엔 엄숙한 내력이 깃들어 있었다. 무공을 전혀 알지 못하는 최검추는 그의 목소리만으로 오줌을 지려 버릴 지경이었다.

“황 대협은 영광스러운 용성의 일원이자 황실을 수호하는 자. 감히 사사로이 관군을 동원하였으니 그 죄는 반란과 같다. 특히 이번 일에 황태자 전하께서 관심이 많으시다. 네 행동으로 인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뜻이지.”

“화, 황태자 전하께서……?”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다.

황태자라니? 그분은 언젠가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실 분. 고작 항주의 현령 따위가 비벼 볼 수준이 아니었다. 미친 후원자 때문에 일을 벌였다가 삼대가 멸할 판이었다.

“저, 저는 불온서적을 가지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불온서적?”

“그게…….”

“황 대협, 죄송하지만 저놈이 말하는 불온서적이 뭔지 확인해 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황극린은 거리낌 없이 회생비록을 넘겨주었다.

신기영주가 회생비록을 읽어 가며 점점 표정이 굳는다.

‘저, 정말 불온서적이 맞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최 현령이었지만.

“이게 불온서적이라면 백성들이 남아나질 않겠군. 포박하라.”

“예!”

“무, 무슨! 부, 분명히 불온서적이라고! 으아악!”

최검주는 눈 깜빡할 사이에 포승줄에 묶여 무릎을 꿇었다. 관군들은 감히 막을 생각도 못 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반란에 가담했다는 죄라면 이곳에 있는 관군들도 무사할 수 없으리라.

최검추를 포박한 신기영주가 황극린에게 다가왔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신기영주 교진운이라고 합니다.”

“황극린입니다.”

“최 현령의 일은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도록 완벽하게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림맹 절강성지부 부지부장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황극린은 절강성의 부지부장 봉장풍과 마찰을 빚었다.

그는 무림맹을 들먹이며 황극린을 협박했었다. 직접 손을 쓸 수도 있었지만 황극린은 그냥 그를 보내 주었었다.

‘편하긴 하군.’

용성에 들어간 이유가 뭔가? 직접 나서기 귀찮을 일을 다 떠넘길 수 있다. 그는 서문세가에 도착하자마자 황태자에게 직통으로 통하는 서신을 보냈었다.

황극린과 황태자는 과거 인연이 있었으니 도와줄 것을 믿고 있었으나, 설마 신기영을 보낼 줄은 몰랐다. 아마 절강성 부근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리라.

“그것도 저희가 확실하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예.”

황극린에게 잘 보이려 아부하지도 않고 자신의 맡은 임무만 수행하는 신기영주. 그가 최검추 현령을 압송하여 끌고 간다. 관군들은 어깨가 축 늘어진 채로 신기영을 따라갈 뿐이었다.

“신기영이라니… 대단하군요.”

옆에서 지켜보던 서문륭이 감탄을 터트린다.

오래도록 강호를 겪어 왔지만, 관군과 엮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강호에서 이름난 이들도 쉬이 볼 수 없는 특무부대를 보았으니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황극린이 싱긋 미소를 머금는다.

“이제 우리 할 일을 하러 갑시다.”

“예, 그래야겠군요.”

두 사람의 시선이 뇌섬사에 꽁꽁 묶인 용왕궁도에게 향한다.

* * *

“실패했다?”

“태상가주 서문륭 그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딴 놈이 나타났다고 달라지는 게 있던가?”

“그자는 반로환동의 경지에 접어들었습니다.”

반로환동이라는 말에 보고를 받던 여인의 눈동자가 큼지막하게 변한다. 그리고 그 변화에는 왜인지 ‘기쁨’이 담겨 있었다.

“설마… 회생비록의 힘으로 그 경지에 이른 것인가?”

“확실하진 않습니다.”

“놈이 가지고 있는 회생비록이 중요한 구결을 담고 있는 게 분명하다! 분명 그럴 것이야!”

여인이 벌떡 일어섰다.

의외의 사실을 듣고 흥분하고 말았다. 평소 그녀가 보여 주는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나표는 그녀가 왜 그것에 집착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침묵했다. 여인도 평정심을 되찾고 자리에 앉는다.

“황극린이 가지고 있다고 했던가?”

“예, 놈의 무력은 상상을 한참 뛰어넘었습니다. 흑우천지망을 이용했지만, 역으로 궁도들이 제압당했습니다.”

“그렇던가? 확실히 두 절대고수를 상대로는 곤란하긴 하겠군.”

곤란하다고 했으면서 여인은 전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그때, 밖에서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보고드립니다! 이가중이 사로잡혔습니다!”

“사로잡혔다? 자결하지 못했다는 뜻인가?”

“예! 그런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렇군.”

그런데도 여인은 딱히 걱정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리고 황실의 특무부대 신기영이 항주에 도착했습니다. 최검추 현령과의 끈은 모두 끊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도록 해라.”

“존명!”

여인이 한숨을 내쉰다.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찬란한 보석이 있었다. 하지만 보석을 지키는 독사가 두렵다. 맨손으로 만지다간 독에 당하고 말리라.

“장갑을 껴야겠구나.”

두꺼운 장갑을 끼면 뱀의 이빨에 장갑이 상할지언정 살에 닿지는 않는다. 날카로운 뱀의 이빨을 막을 좋은 장갑을 껴야 하겠지만 말이다.

“일단 철수한다. 놈들이 중요한 부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 확실한 방법을 찾을 때까지 기다린다.”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나표가 나가고 여인이 턱을 괸다.

“황극린이라……. 자주 내 앞길을 가로막는구나. 참으로 거슬려.”

확실히 놈을 죽일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내가 직접 나서야 하는 건가?”

하지만 위험부담이 크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녀의 정체가 탄로 난다. 20년 넘게 세워 온 계획이 물거품이 된다. 결국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처리할 수 있다면 최상이었다.

여인은 어떤 장갑을 착용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깊은 잠에서 깨어난 이가중.

그가 흠칫한다. 본능적으로 움직인 ‘바다의 기운’이 움직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난 분명 황극린을 잡으려다가…….’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실패했다. 실패를 직감하고 바로 자결하려 했지만, 그것도 막혔다. 대체 어떻게? 중원의 살수들은 입안에 독단을 물고 자결하는 방법을 택한다. 적에게 정보를 넘겨주지 않기 위한 최적의 수단이다.

그런데 용왕궁도들은 온몸에 독단을 품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조금만 잘못 사용하면 스스로의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는 치명적인 독. 그들의 피에는 독이 흐르고 있었다.

“깨어났나?”

이가중은 깜짝 놀란다.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건만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황극린? 대체 저 눈빛은 뭐란 말인가? 마주하는 순간 근육이 굳어 버리고, 제대로 생각할 수 없다. 심연과도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버린다.

“죽고 싶은가?”

대답할 수 없었다. 황극린이 아혈을 풀어 준다.

입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알아챈 이가중이 자신의 혀를 깨물었다. 혀가 잘려 나가는 고통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에 안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죽을 수 없다.”

뚝뚝.

작은 약병에 든 붉은 액체가 이가중의 입으로 들어간다. 강제로 입을 벌렸기에 피할 수도 없었다. 혀가 잘려 피가 넘쳐났었다. 정신도 흐릿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왜 정신이… 더 또렷해지지…?’

그리고 토악질이 올라온다. 배 속에 무언가가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 드는 동시에 위액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다.

“꺼어어어억!”

코와 입에서 분출되는 위액. 피와 섞여 기묘한 냄새를 내고 있었다.

“우에에에엑! 우엑!”

깨끗하게 게워 냈지만, 전혀 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꾸만 위액이 분출되고 있다. 점점 숨을 쉬기가 어려워진다. 먹은 것도 없는데 왜 자꾸 위액이 만들어진단 말인가? 배 속이 녹아 버릴 것처럼 뜨겁다.

“네놈들에겐 왜인지 내 피가 잘 먹히더군.”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네놈들? 피가 먹혀?

“넌 자결할 수 없다.”

“내, 내 혀가 어떻게……?”

그러고 보니 분명 혀를 씹어 잘라 버렸는데?

혀를 움직여 보니 멀쩡하다. 오히려 혀에 힘이 넘치고 있다. 온몸은 부서질 듯이 뜨거운데 말이다.

“알고 싶나?”

“대체 내게 뭘… 먹인 것이냐?”

“차근차근 이야기하지. 시간은 많으니까.”

황극린이 미소를 머금은 순간, 그의 손에서 뇌전이 튀었다.

일단 수작을 부릴 수 없도록 혼을 빼 놓는 게 먼저였다.

“끄, 끄아아아아악-!”

살고 싶은 이도 죽고 싶게 만드는 극악의 고문.

황극린은 어떻게 해야 인간이 가장 큰 고통을 느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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