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잡기
“크흡!”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항주 현령 최검추.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위험을 감수하면서 관군까지 끌고 온 것은 서문세가가 상대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서문세가와도 무력 분쟁이 일어날 것 같으면 내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황극린이라니?
저 사내는 극악무도한 무림인들 사이에서도 최강이라 통용되는 경지에 오른 사내가 아니던가? 손짓 한 번에 인간의 목을 베어 버리는 실력자. 저 사내가 목을 노리면 과연 관군들이 막아 낼 수나 있을까?
‘벼, 벼락을 다루어서 손짓 한 번에 산 하나를 태워 버렸다는 황극린!’
황극린이 그런 행동을 한 적은 없었지만 애초에 관아에선 무림인들을 인간을 초월한 괴물로 여기곤 한다. 그러한 괴물 중에서도 최강의 괴물이 눈앞에 떡하니 있었다. 거기다 그러한 괴물이 용성까지 들먹이고 있다. 허장성세(虛張聲勢)도 아니다. 실제로 용성은 황실의 특무기관인 금의위가 주도적으로 만든 기관이었다.
만뇌문주 황악은 용성의 부성주.
품계로도 현령보다는 아득히 위에 존재했다. 물론 황극린은 부성주가 아니었지만… 지금 그는 부성주의 뜻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최소한 현령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황급히 죽립을 눌러쓴 후원자를 바라본다.
그의 시선은 온전히 황극린의 손을 향해 있었다. 손이 아니라 회생비록이라는 이름을 가진 낡은 서책이었다.
“이 대인!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최검추가 후원자에게 묻는다.
그러자 겨우 시선을 돌려 최검추를 바라본다.
“공격 명령을 내리십시오.”
“예……?”
“연노(連弩)가 있지 않습니까?”
제갈세가에서 만들어진 쇠뇌 중 하나. 일반적인 화살도 분명히 대규모의 전투에선 상당한 위력을 보인다. 하지만 일정 경지에 이른 무인들에겐 일반적인 화살이 잘 통하지 않는다. 내공이라는 신비의 힘으로 화살마저 쳐 내는 수준의 고수가 중원에는 많았으니까.
연노는 일반적인 활보다 훨씬 강하고 빠르게 화살을 연속으로 쏘아 낸다. 거리가 충족된다면 갑주마저 뚫을 위력마저 갖추고 있었다. 황실에선 무림인을 상대하기 위해 연노를 수없이 개량했다.
서른 명에 달하는 연노병들이 일제히 황극린을 공격하면 효과가 없진 않을 것이다. 후원자는 그렇게 판단하는 듯했다.
“이 대인, 다짜고짜 공격하라니요? 저 사내는 용성에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까?”
“서책만 회수하면 됩니다. 회수하지 않는다면 공격하겠다고 하십시오.”
“그런…….”
당장 공격하라는 것보다는 나았다.
애초에 이걸 노린 듯하다.
“귀하가 가진 회생비록이 황실의 존엄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이것 말인가?”
황극린이 서책을 펼친다.
“딱히 중요한 내용은 없던 것 같은데… 저 사내에겐 꽤 소중한 것인가 보군. 관군까지 끌고 올 정도로 말이야. 그럼 이건 어떤가?”
찌지직!
“이 미친 새끼가!”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지켜 온 후원자였다. 현령은 그가 저토록 화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
‘대체 저 서책이 무엇이길래… 저토록 화를 내는 거지?’
반으로 찢어진 서책.
현령은 어리둥절하게 황극린을 바라보다가 옆구리를 찔러 오는 예리한 감촉에 헛바람을 삼켰다.
“무, 무슨 짓입니까?”
“공격 명령을 내려라. 아니면 죽는다!”
“아, 아무리 그래도! 쿠헉!”
차가운 쇠붙이가 옆구리를 파고 들어온다. 왜인지 고통은 크지 않았다. 머릿속을 잠식하는 공포 때문이었을까?
“대, 대형을 갖추어라! 공격 주, 준비!”
황극린이 어깨를 으쓱한다.
현령은 차마 공격 명령까지는 내리지 못했다. 대충 상황이 보인다. 현령은 모종의 이유로 용왕궁에게 조종당하고 있다. 만약 황실에서 명령이 내려왔다면… 저런 태도를 취하진 않았을 터.
‘버림 패로군.’
단숨에 상황이 이해가 된다.
물론, 현령이라는 패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현령을 움직여 회생비록을 얻을 수 있다면 그런 패도 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너희에게 중요한 것인가 보군. 그냥 내가 내용이 무언지 말해 줄 수도 있는데?”
“닥치라고 전해라. 아니, 내가 직접 말하도록 하지! 순순히 회생비록을 내놓지 않는다면… 후회할 것이다.”
내력을 담아 나지막한 목소리를 황극린에게 전달한다.
내가기공의 고수라는 뜻이다.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닌가? 이 책 자체에 가치가 있는 건가?”
“그건 네가 알 바가 아니… 이노오옴!”
책 따위는 황극린의 악력에 그냥 찢어진다. 이제는 네 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버린 회생비록. 그것을 본 후원자가 발작하듯 현령을 쏘아본다.
“명령해라. 놈을 공격하고 회생비록을 확보하라고 명해라.”
“아, 아무리 관군이라도… 닥쳐라. 내 수하들이 대기하고 있다. 틈이 보이면 놈을 제압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쇠붙이가 더 속살을 파고들면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최검추가 명령한다.
“고, 공격하라!”
현령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관군들은 이 기묘한 상황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장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현령의 말을 관군들에게 전달했다. 그 또한 이미 후원자에게 포섭된 상태라는 말이었다.
“황실을 능멸한 저놈을 죽여라!”
“충!”
연노병들이 자리를 잡는다. 화살의 시위가 당겨진다. 창병들이 자세를 잡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이대로 가면 황극린과 관군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서문세가의 무인들은 태평하다. 현령은 이런 상황에도 그것을 의아하게 여겨 후원자에게 말했지만,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발사!”
결국 연노병들이 연노를 쏘기 시작했다. 그 뒤로 화살비가 내린다. 기마병들이 언제든 출격할 준비를 마쳤다. 관군들은 평소 무림인에 대한 괴담을 많이 들었기에 처음엔 긴장했지만, 화살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광경에 안심했다. 제아무리 천하제일의 무공을 가졌다고 해도 저 많은 화살을 피해 낼 수 있을까? 막아 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어디로?”
“사라졌다! 표적을 찾아라!”
황극린이 사라졌다.
아니, 그렇게 착각했다. 황극린은 위험천만한 화살을 정면으로 두고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미친!”
파지지지직!
맹렬한 속도로 나아가던 화살들이 보이지 않는 막에 막혀 땅으로 떨어진다. 막에 부딪힐 때마다 뇌전이 튀어 오른다.
“연노병! 뭣 하는 거냐!”
“쏴라! 더 다가오지 못하게 해라!”
수적 우세로 긴장하지 않고 있던 관군.
소름 끼치는 광경에 악을 쓰며 소리쳤지만 이미 황극린은 지척에 도달해 있었다. 기마병과 창병들이 황극린을 막아 세운다.
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황극린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관군들의 머리를 발판처럼 활용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마, 막아라! 무조건 막아!”
현령이 발악하듯 기함한다.
그때, 현령의 옆에 있던 후원자가 죽립을 벗어 던진다. 멀끔한 인상. 삼십 대로 보이는 얼굴이 드러난다. 그가 잔혹한 미소를 머금는다.
“이렇게 달려올 줄 알았다.”
관군들 사이에 있던 용왕궁의 궁도들이 본색을 드러낸다. 검을 뽑은 용왕궁도들이 관군의 머리통을 밟고 날아오른 황극린을 노린다. 허공에선 피할 방도가 없을 것이다.
“죽여라.”
사내의 말에 용왕궁도들이 전력을 다해 암기를 발출한다. 궁병들이 쏘아 대는 화살이나 연노병의 연노촉까지 막아 냈던 황극린이었지만, 같은 무림인이 출수하는 암기들을 그처럼 쉽게 막아 낼 수 있을까?
용왕궁이 준비한 것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망을 던져라!”
흑우천지망(黑羽天地網).
아주 약간의 내력만 주입해도 응력(應力)이 수십 배나 늘어난다. 아무리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라도 쉬이 끊어 낼 수 없다.
수십 명의 용왕궁도들이 전력을 다해 내력을 주입하고 있었다.
콰지지지직-!
황극린의 기막과 흑우천지망이 충돌하며 뇌전이 사방으로 튀었다.
“화경에 이른 고수라도 끊어 낼 수 없을 거다.”
수십 명이 전력을 다해 내공을 쏟아 내고 있다. 흑우천지망은 다수가 소수를 제압할 때 가장 위력적이었다.
현령 최검추의 후원자이자 이 대인이라 불린 사내.
용왕궁의 오괴(五怪) 중 하나인 이가중이 앞으로 나선다.
“회생비록을 고이 내어 준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지.”
“이렇게 찢어졌는데 별 상관이 없는 건가?”
황극린이 품속에서 네 개로 찢어진 회생비록을 꺼냈다. 그러자 이가중이 미소를 머금는다.
“그건 가짜가 아닌가?”
“알고 있군.”
“처음엔 감쪽같이 속았었지. 우리를 떠보려고 한 것 같은데… 통하지 않는다.”
“그렇군.”
“그리 태평하게 있어도 되는 건가?”
촘촘하게 짜인 흑우천지망이 점점 황극린을 좁혀 오고 있었다. 황극린이 만들어 낸 기막의 힘이 다하고 있다는 뜻이다. 40명에 달하는 용왕궁도들이 전력으로 내공을 발산하고 있다.
“흑우천지망이다. 망이 살갗에 닿으면 네놈의 살갗과 뼈까지 녹여 버릴 거다.”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주가 뽑아낸 뇌섬사와 비견될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내놓아라.”
“이게 그렇게 소중한 물건인가?”
“네놈들은 모른다, 평범하게 태어난 너희는……. 그러니 순순히 내놓아라. 아까운 목숨을 잃어버리기 전에 말이다.”
“그러지. 그럼 풀어 주는 건가?”
“그래. 그럴 것이다.”
“좋다.”
황극린이 품속에서 진본 회생비록을 꺼낸다.
이가중이 황급히 그의 앞으로 간다. 이건 확실히 진본이 맞았다.
“내놓아라! 어서!”
“이 안에 있는데 어떻게 주지?”
흑우천지망이 황극린을 감싸고 있었다.
이가중이 신호를 주자 흑우천지망에 작은 틈이 생겨났다. 서책을 둥글게 말면 내보낼 수 있는 틈이었다.
“자, 어서 내놓아라.”
황극린이 그 틈으로 회생비록을 건네준다.
이가중이 회생비록을 빼앗으려 했지만, 황극린은 힘을 풀지 않았다.
“뭣 하는 거지?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 어서 힘을 빼라!”
“잡았군.”
“뭐라?”
“너희의 자결법이 조금 까다로워서 말이야.”
“……?”
이가중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든 순간이었다.
“고작 이런 망 따위로 뭘 하겠다는 건가.”
빳빳하게 고정되어 있던 흑우천지망이 축 늘어져 있었다.
“무슨!?”
이가중이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흑우천지망에 내력을 주입하던 40명의 용왕궁도. 그들이 모두 쓰러져 있었다. 입에 거품을 문 채로 말이다. 흑우천지망은 내력이 잘 통하는 물질이었다. 저들이 내력을 주입할 수 있다면 그건 황극린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흑우천지망에 닿아 있었으니까.
황극린은 역으로 뇌전을 흘려보내 용왕궁도 전체를 동시에 감전시켰다.
“이건 말도…….”
하지만 그건 이론적으로나 가능한 방법이다.
그게 가능하다면 이가중이 이런 방법을 계획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화경의 고수라고 해도…….
“눈으로 직접 본 것을 부정하는군.”
“이노옴!”
이가중이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청록색의 검강이 짙게 일렁인다. 서문세가의 장례식에서 가장 강했던 침입자보다 훨씬 더 진해 보였다. 굳이 정면으로 맞붙을 필요는 없었다. 황극린은 그를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잡았다고 했지 않나?”
“무슨?”
몸이 간지럽다.
아니, 간지럽다고 생각하는 순간 온몸의 혈관이 타 버릴 것 같은 고통에 휩싸인다. 눈앞이 검게 물들었고, 코와 입에서 하얀 연기가 터져 나온다.
“조금 아플 거다.”
사람의 안력으로는 보지 못할 정도로 얇은 실.
황극린은 그가 회생비록을 잡았을 때, 뇌섬사 수십 가닥을 쏘아 보냈다. 중요 급소마다 닿은 뇌섬사. 황극린의 뇌전이 적절하게 쏟아졌다. 용왕궁 놈들이 자랑하는 자결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도록.
“끄아아아아아아-!”
이가중의 눈이 뒤집혔다.
내력을 활용할 수도 없게 온몸에서 솟구치는 황극린의 뇌전. 당연히 자결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나는 잡았고.”
황극린이 흑우천지망을 떨쳐 내곤 고개를 돌린다. 관군들 사이로 접근한 수많은 인기척. 개중엔 이가중보다 훨씬 더 진한 짠 내를 지닌 놈도 있었다. 용왕궁의 안배는 이것이 끝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황극린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컥!”
“크헉!”
관군들이 동요한다.
황극린이 흑우천지망에 잡혔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현령이 꼼짝도 하지 못한 의문의 사내가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그리고 관군들 사이로 고양이처럼 달려가던 조금 이상한 형태의 피부를 가진 사내들이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황극린의 옆에 등장한 소년.
“허허, 황 공자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제부턴 이 노부가 다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노부(老夫).
16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소년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안광. 그것은 평범한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