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형산 제압
양평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얼굴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검기가 깃든 검을 손가락으로 잡아채는 기예를 보여 주었던 사내였다.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림사의 천덕을 꺾고 용봉지회 우승을 이뤄 냈다. 그야말로 재능 자체가 다른 무인이었다. 객관적인 실력으로도 어쩌면 자신의 사부인 위도량보다 강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할 만큼 강했었다.
그런 그가 눈앞에 나타났다.
형상파의 제자들이 잔뜩 몰려 있는 이곳에 말이다.
그것도 혼자서.
“음.”
황극린은 양평중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다. 객잔에서 형산의 제자 중 한 명과 시비가 붙어 쓰다듬어(?) 줬던 적이 있는데, 그의 사형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황극린에게 비무를 신청했었다.
당연히 황극린으로선 그를 딱히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르르 몰려와 합공을 한 것도 아니고, 정정당당히 비무를 신청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하여 좋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딱히 아무 생각도 없었다고나 할까?
“무슨 일이더냐!”
천리순풍 위도량.
보법의 경지가 대단하다고 소문이 난 무인이었다. 그의 보법은 산들바람과 같아서 부드럽게 모든 것을 피해 낸다고 알려져 있다.
“사제, 저 사내는?”
“화, 황극린입니다!”
“모두 전투를 준비하도록!”
형산파의 대제자 엄비창.
그는 29회 용봉지회를 노리고 폐관에 들었다. 총 7년에 걸친 폐관. 혼자서 수련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보통 명문거파에서의 폐관은 확실한 수련 방법으로 통한다.
명문거파 출신들은 어릴 때부터 사형제들과 경쟁하며 무공을 익혔고, 비무 경험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중소문파 출신들이 비무보다는 홀로 수련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반대라 할 수 있었다.
그는 7년의 폐관으로 큰 성장을 이룩했다.
이번 용봉지회에서 당당히 우승하여 형산파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기회가 있었다.
28대 우승자인 황극린이다. 그가 본선에서 꺾은 무인이 모용세가의 모용가아와 소림사의 천덕이다. 이 자리에서 그를 제압한다면…….
‘모두가 날 주목할 것이다.’
엄비창이 먼저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형산의 대제자 엄비창입니다.”
“그렇군.”
심드렁한 반응에도 엄비창은 화를 내거나 하진 않았다. 그 정도로 심기가 흔들린다면 대제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7년의 폐관을 깨고 처음 마주하는 상대가 전대 용봉지회 우승자라니 영광입니다. 비록 좋은 일로 본 것은 아닐지라도, 저는 황 소협이 악인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로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비창아, 그만하거라.”
“예.”
구구절절 말을 이어 나가던 엄비창이 천리순풍 위도량의 말에 뒤로 물러선다.
조금 감정이 격해졌다는 걸 인정했다. 만뇌문의 뒤를 쫓으며 너무 많은 상상을 했던 모양이었다. 거기다 상대는 자신이 목표로 하는 용봉지회 우승을 벌써 이룬 인물이 아니던가? 그와의 만남이 참으로 기대되었었다.
그래도 장로님의 말씀을 거역할 순 없었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엄비창은 뒤로 물러선다. 그의 옆에는 사색이 된 사제 양평중이 있었다.
“사제, 괜찮은가? 너무 걱정하지 말게. 장로님과 내가 있지 않은가?”
“…대사형은 느끼셨습니까?”
“뭘 말인가?”
“권룡이 이곳에 오는 기척을 말입니다.”
“응? 자네가 소리를 질러 모두가 모였지 않은가?”
형산파의 제자들은 만뇌문의 흔적을 쫓아 관도 부근을 수색하다가 휴식하고 있었다. 당연히 살금살금 다가온 황극린의 기척을 느낄 수 없지 않겠는가?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제 눈앞에 있었습니다. 아무리 제가… 실력이 떨어진다고는 하나 코앞까지 오는데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
엄비창의 얼굴이 굳는다.
양평중이 말은 저렇게 하지만, 그의 사제는 재능도 있었고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 무인이었다.
“차라리… 여기선 항복하는 게 좋을 것…….”
“어허, 사제, 약한 소리 말게나!”
엄비창은 패배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자만 따위는 아니다. 황극린이 아무리 명성을 떨친 후기지수라 해도 그는 혼자였다. 이곳에는 형산파의 정식 제자 중 실력이 뛰어난 이들만 모여 있었다. 거기다 천리순풍 위도량은 백대고수 중에서도 중상위권에 들어가는 실력자다.
객관적인 전력 분석이었다.
만약 만뇌문도들이 이곳을 포위하고 있다면 또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그런 낌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번 기회에 황 소협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을 모두 지워 버리도록 하게. 혼자 모두 감당할 필요는 없다네.”
“사형…….”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엄비창의 늠름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조금은 안심이 된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천리순풍 장로 또한 입을 열었다.
“혼자서 찾아온 것이오?”
“그렇소.”
“자신감이 과하군.”
만뇌문과 조우하게 된다면, 광견살검도 함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천리순풍 장로 또한 황극린의 활약상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아직은 후기지수다. 비무와 실전은 다르며, 혼자서 형산파의 제자들을 모두 제압하지는 못할 것이다.
“권룡이 최근 무림에서 상당한 명성을 떨치고 있다고는 하나 혼자 찾아온 것은 실책이오. 과한 자신감은 화를 부르는 법. 이번 기회에 많이 배운다고 생각하시오.”
위도량의 느긋한 조언에 황극린을 둘러싼 형산파의 제자들이 더 강렬한 기세를 내뿜었다. 하도 양평중이 황극린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떠들어 댔으니 은연중에 위축되었던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들의 옆에는 위도량이 있지 않은가?
거기다 황극린은 혼자였다. 겁먹을 필요가 없다.
황극린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을 뿐이다.
“조언 고맙소. 피차 바쁜 듯하니 빨리 끝냅시다.”
“모두 포위망을 형성하라!”
황극린의 말에 천리순풍 장로가 제자들에게 명령한 후, 앞으로 나섰다.
그는 황극린이 싸우다가 도주할 수도 있다고 가정하고 있었다.
스르응.
검집을 스치며 빠져나오는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의 검에는 이미 내력이 깃들어 있었다. 푸르스름하면서도 거무튀튀한 기운. 조금만 더 내력이 집약된다면 검강으로 변질될 수도 있으리라.
타닷!
천리순풍 장로가 먼저 몸을 움직인다.
형산파가 자랑하는 보법 환영구보(換影九步). 사물이 움직이면 그림자가 따라오는 게 순리이듯, 당연하다는 듯 기척을 숨길 수 있는 보법이다. 대성하면 9개의 잔상이 남아 상대가 눈으로 좇지 못하게 만든다고 한다.
현재 천리순풍 장로가 도달한 경지는 11성. 대성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천리순풍이라는 별호답게 그는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눈 깜짝할 순간 황극린의 앞에 도달했다.
“합!”
천리순풍 장로의 첫 번째 검격은 막혔다.
하지만 그게 노림수의 끝이 아니었다. 실력을 가늠하기 위한 공격이었을 뿐, 그의 공세는 이제 시작이었다.
‘천리순풍 장로님께서 벌써 저것을 내보이시다니.’
그가 황극린에게 조언하듯 말하긴 했지만, 그를 얕잡아 보진 않았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선 처음부터 최선을 다해야 했다.
연환십절(連環十切).
순풍은 천 리를 느리지만 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게 느리다고 할 수 있을까? 실제로 바람을 마주해 보면 마주했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 지나가곤 한다. 그러한 순풍이 사방에서 불어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고 그 순풍에 보이지 않는 칼날이 섞여 있다면?
천리순풍이 처음부터 절기를 꺼내 들었다.
결과는 자명했다.
‘내가 나설 필요도 없는 건… 어어?’
대제자 엄비창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정면에서 공격하고 좌로 넘어가려는 천리순풍이었다. 부드럽게 휘몰아치는 그의 검격은 그게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가 제대로 보법을 밟기도 전에 붙잡혔다면 어떻게 될까?
“컥!”
천리순풍 장로가 멱살을 잡혀 있었다.
그가 어디로 움직일 것인지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의 연환십절은 알고서도 막기 힘들다. 그가 왜 천리순풍이라는 별호를 가졌겠는가?
“무슨……!”
대제자 엄비창이 깜짝 놀라 앞으로 달려가는 순간.
콰지지직-!
뇌광이 피어올랐다.
“으어어어어-!”
매사에 점잖던 천리순풍 장로의 비명. 하지만 그 비명도 오래가지 못했다. 반탄지기를 끌어 올려 황극린의 뇌전을 막아 내려 했지만, 두 사람은 내력의 질부터가 달랐다. 천리순풍 장로가 정신을 잃고 고개를 떨구었다.
“……!”
황극린의 도주를 막기 위해 포위하고 있던 형산의 제자들이 뒷걸음질 친다.
고작 일 초식이 다 펼쳐지기도 전에 천리순풍 장로가 저리도 쉽게 제압당했다.
“물러서지 마라!”
그때, 대제자 엄비창이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친다.
그의 얼굴은 결의로 물들어 있었다.
“패배하더라도 싸운다. 내가 앞장서겠다.”
무인이라면 그래야 한다.
장문인의 가르침이었다.
형산파의 제자들이 정신을 차린다. 대제자의 말이 맞다. 천리순풍 장로가 제압당했다고 도망칠 것이면 왜 무공을 익혔는가? 거기다 우리는 다수가 아니던가? 아무리 강한 상대라 하더라도… 싸워 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다.
“목상진(木桑陣)을 펼쳐라!”
“예, 대사형!”
형산파의 무인들이 결의를 다졌다.
천리순풍 장로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한다.
황극린은 무심하게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개진!”
엄비창을 필두로 한 형산의 제자들이 황극린을 포위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이, 이길 수 없어……. 천리순풍 장로님이 단번에 제압된 것을 보면… 그걸 보면 모르겠냐고!’
양평중은 지금 황극린의 실력을 가장 잘 파악한 인물 중 하나였다.
* * *
결과는 당연히 황극린의 승리였다.
용봉지회 우승 당시부터 황극린의 무위는 이미 경지에 올라섰었다. 거기다 북해에서 얻은 기연으로 음양의 조화가 갖춰진 육신을 얻게 되었다. 그가 진심으로 힘을 쓴다면 형산파의 장로 한 명과 제자들의 합공 정도는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형산파의 제자들은 끙끙대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크힉!”
황극린이 다가서자 양평중이 깜짝 놀란다. 그 또한 싸우긴 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진 않았으며, 황극린 또한 그를 기절시키거나 하진 않았다. 전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형산파에서 온 무인은 이게 끝인가?”
“예, 옙… 그, 그렇습니다…….”
양평중이 눈알을 굴려 주위를 살펴본다.
다행히도 죽은 이는 없었다. 황극린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인 듯했다.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
“두 번은 없다.”
“예……?”
“다시 한번 형산파가 만뇌문을 노린다면 그때는 한 명도 빠짐없이 죽일 거다.”
“……!”
양평중은 마치 자신에게 처형 선고라도 내려진 듯 벌벌 떨었다.
그의 무감정한 목소리가 더 무서웠다.
“엄비창이라고 했나?”
“크윽, 그, 그렇소…….”
엄비창은 대제자라는 지위에 맞게 황극린과 정면에서 맞붙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잃지 않았다. 물론 황극린이 살살 다뤄 준 것도 있었지만, 천리순풍 장로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정신력이 강인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왼쪽 다리의 뼈가 부러졌다. 아마 29회 용봉지회의 참가는 포기해야 할 듯하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용봉지회는 들어 있지 않았다. 28회 우승자 황극린. 그를 보고서 어떻게 용봉지회에 참가할 생각이 들겠는가?
“대제자가 말하면 더 확실히 알아듣겠지. 장문인에게 확실히 전하도록 해라.”
“…그러겠소.”
오늘 황극린과 싸워 본 형산의 제자들은 느꼈다.
그는 차원이 다른 고수라는 것을 말이다.
황극린은 찾아왔던 것처럼 떠날 때도 기척을 지우고 떠나갔다. 어느 순간 눈앞에서 황극린은 사라져 있었다. 공포에 떨던 양평중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대, 대사형… 죄송합니다. 저, 저만…….”
그나마 이 자리에서 양평중만 크게 다치지 않았다.
엄비창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사제의 말이 맞았어. 그는 정말 괴물이더군… 쿨럭.”
“대사형!”
“난 괜찮다네……. 그래도 자네가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야……. 근처에 있는 의방에 다녀와 주게.”
“예, 예! 어, 얼른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양평중이 허겁지겁 경공을 펼치고 달려간다.
엄비창이 악을 쓰며 상체를 올려 주위를 살펴본다. 사형제들은 모두 고통에 신음하며 쓰러져 있었다.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건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다.
‘한 번 더 공격한다면 모두 죽인다고 했지.’
은연중에 만뇌문이 사람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미 만뇌문과 맞붙은 중소문파가 꽤 있었지만, 사망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만뇌문을 한 번 더 건드리는 자들이 있었다면?
‘정말… 정말… 다 죽이려나……?’
무림에는 어리석은 자들이 참으로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