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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136화 (136/316)

136화 새로운 만남

대룡상단주 가금후는 상벌에 엄한 사내였다.

공을 세웠다면 그에 걸맞은 상을 내려 준다. 능력 부족이나 실수 따위로 일을 망친다면 벌 또한 확실하게 내린다. 아직 만뇌문과의 일이 모두 끝난 것이 아니었으니 회초리는 장로 진우선이 받는 벌은 아니었다. 쉽게 말하자면 ‘경고’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크읍…….”

진우선이 불에 타오르는 듯한 종아리의 고통을 참아 낸다.

가금후의 채찍과도 같은 회초리는 열 번 휘둘러졌는데, 그로 인해 피부가 찢겨 나간 듯하다. 가금후 또한 어릴 때부터 무공을 익혀 왔다. 아무리 상인이라도 기본적으로 자신을 지킬 힘이 있어야 한다는 초대 상단주의 전언으로 대룡상단의 직계들은 모두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무공을 익힌 대룡상단주가 채찍을 휘둘렀으니 오죽하랴?

진우선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꾸역꾸역 참아 낸다. 대룡상단주는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최대한 그의 앞에서 고통을 참아야 한다. 그리고 웃음을 내비쳐야 한다. 그래야지만 상단주에게 최소한의 신뢰를 심어 줄 수 있다.

대룡상단주 가금후가 언제 회초리를 들었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연다.

“그래, 이제 변명을 들어 보도록 하지.”

“…….”

진우선은 가주의 방으로 오기 전, 청성파가 만뇌문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만뇌문이라는 중소문파를 집어삼키는 데 있어서 상당한 시간과 돈 그리고 인력이 투자되고 있었다.

아직까진 손해다.

지금 당장 만뇌문이 가진 약재의 제조법을 강탈한다면 그나마 이익으로 전환할 수도 있겠지만, 당장 만뇌문을 삼킬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 그들은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아났는지, 사라져 버렸다.

진우선은 가주와 만나기 전, 사실 이렇게 될 것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긴 했다.

물론, 이렇게까지 아플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만뇌문이 가진 옥보단과 혈금유의 제조법은 단약 시장에서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는 상품이었습니다. 만뇌문의 주요 전력은 광견살검 구자광과 권룡 황극린 두 사람이었지만, 예상외로 황극린의 실력이 강했습니다. 거기다 개방과 제갈세가 그리고 남궁세가까지 합세하는 바람에… 만뇌문을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진우선이 말을 마친 후,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깔끔하게 사실만을 보고했다. 여기서 자신의 과오를 덮으려 사족을 붙였다간 대룡상단주의 화를 돋우는 일만 될 뿐이었다.

“본가의 원로들이 최종 승인까지 해 줬으니 진 장로 한 명의 잘못은 아니다.”

기껏 회초리를 때려 놓고 그런 말을 하다니?

하지만 진우선은 대룡상단주에게 불만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저리 말해 준 것이 고마웠다. 사실 진우선은 최종 결정권자는 아니었다.

“하나, 만뇌문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건 진 장로의 잘못이 가장 크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진우선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가금후는 피가 묻은 채찍을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을 본 진우선이 흠칫 몸을 떨었다. 자신의 피가 묻은 채찍을 보란 듯이 올려놓고 있었다.

“요즘 중원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

“듣겠습니다.”

“녹림의 총채주가 바뀌고 그들의 동태가 묘해졌다. 거기다 은근히 본 상단의 행렬에 과한 통행료를 책정하거나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천금상루(千金商樓)에선 이번 일을 기회로 우리의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지.”

“…….”

대룡상단이 신경 쓰는 것은 만뇌문 하나가 아니다.

그들은 중원 전체에 발을 뻗은 초대형 상단이다. 당연히 아무리 관리를 잘하더라도 곳곳에서 사건이 터져 나간다. 녹림과 천금상루와 비교하면 그나마 만뇌문은 작은 사건이라 해도 무방하다. 물론, 여기서 상황이 더 지체된다면 문제가 된다.

‘설마 여기서 발을 빼자는 말씀이신가?’

진우선은 고민한다.

여기서 손해만 보고 대룡상단이 만뇌문과의 상황을 종결하려 한다면… 당연히 진우선이 가장 많은 책임을 지게 된다.

“진 장로의 의견을 말해 보아라.”

진우선이 고민한다.

어떻게 해야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느냐? 혈금유나 옥보단의 중요성을 강조할 것인가? 아니면 상단주가 말한 것처럼 녹림이나 천금상루에 대한 것을 먼저 신경 써야 하는가?

이럴 때는 정공법이 답이었다.

진우선은 결의를 다진 후 말한다.

“혈금유와 옥보단의 제조법을 만든 약방주에게 영입을 제안한 것은 도의적으로 약간의 문제만 될 뿐이라 생각합니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건 업계에서 왕왕 일어나는 일이지요. 그 후에 만뇌약방을 압박하기 위해 옥보단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퍼트리거나 혈금유의 판매량을 줄이기 위해 본 상단의 호급 금창약의 가격을 낮췄습니다.”

“내가 아는 사실들이로군.”

상단주의 말에 진우선이 두 주먹을 꽉 쥐고 말한다.

“그 이후의 일이 가장 큰 문제라 생각합니다. 만뇌문이 정황상 포양지부의 창고에 불을 질렀다는 걸 추측할 수 있으며, 거기에 더해 전령으로 찾아갔던 상단원의 팔을 베어 버렸습니다. 마치 사파의 행동이나 다름없었지요. 같이 갔던 호위들도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대룡상단에 대들었으니 여기서 멈출 수 없다는 말인가?”

“배움이 부족한 제 생각은 그러합니다……! 먼저 선전포고 한 것은 만뇌문입니다. 여기서 대룡상단이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차후에 대룡상단의 인수 사업이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판단됩니다.”

“일리가 있군.”

“가, 감사합니다!”

잔뜩 긴장하며 말했던 진우선이었다.

그래도 가금후에게서 긍정적인 반응이 나와서 다행이었다.

“현재 북경에서 개방과 남궁세가와의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두 문파는 대정회와 전쟁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더군.”

“……!”

참으로 다행이었다.

개방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남궁세가는 천하육대세가에 이름을 올린 문파였다. 그들이 참전하게 되면 모용세가와 남궁세가의 싸움으로 변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무림맹이 나설 것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상황이 종결될 가능성이 크다.

“만뇌문과의 전쟁은 끝내지 않는다.”

상단주의 발언은 절대적이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런 것이다.

“이익이란 단순히 얼마만큼의 금자를 벌었느냐로 판가름 나는 게 아니다. 대룡상단의 행보를 중원 전체가 지켜보고 있다. 만뇌문 하나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한다면 후의 사업에 차질을 빚겠지. 그렇기에 만뇌문은 확실하게 끝내야 한다.”

“예……! 명심하겠습…….”

상단주가 미소를 머금는다.

“이번 일의 책임자는 진 장로 자네일세.”

“……!”

상인으로서 평생을 살아온 진우선은 상단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상단주는 바보가 아니다. 만뇌문이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파악했으리라. 그렇기에…….

‘이번 일이 잘못되면… 내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진우선의 표정을 살펴보던 상단주가 말한다.

“대룡전장의 돈을 내어 주겠네. 진 장로가 할 수 있는 걸 하게.”

대룡전장.

대룡상단이 운영하는 전장이었지만, 아직 중원급 규모로 성장하진 못했다. 여기서 말하는 대룡전장의 돈을 내어 주겠다는 건, 최소한 10만 냥 이상을 사용할 권한을 주겠다는 말이다.

“예, 이번 일에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진우선의 대답에 상단주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나가 보도록 하게.”

“예, 상단주님!”

진우선이 방에서 빠져나가자 차가운 인상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우선이 상단주님의 의도를 파악했을까요?”

“본 상단의 장로다. 머리가 나쁜 이들은 없지. 단지 자만하여 실수하는 이들만 있을 뿐.”

그래서 상단주는 오늘 회초리를 들었다.

그의 자만을 꺾어 놓기 위해서.

“그건 그렇고, 녹림의 일은 어떻게 됐지? 협상의 자리는 마련되었나?”

“홍 행수가 직접 나섰습니다만… 이상할 정도로 반응이 없습니다. 마치 일부러 본 상단을 피하는 것 같았습니다.”

“대체 얼마를 받아먹으려고 그딴 짓을 하는 건가…….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나는 법이거늘, 쯧.”

상단주는 녹림이 대룡상단의 돈을 받아 내기 위해서 이런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다. 누가 녹림의 총채주가 된 제갈창해와 만뇌문의 문주가 막역한 사이라는 걸 알고 있겠는가? 그들은 이익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대룡상단에 피해를 안겨 주기 위해 행동하고 있었다.

이것이 대룡상단주가 오늘 잘못된 판단을 내린 이유 중 하나였다.

만약 녹림과 만뇌문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면, 이제까지의 피해를 무시하고 깔끔히 만뇌문을 포기했을 것이다.

“대별산채에 금두꺼비를 보내도록 해라.”

“예, 상단주님.”

금두꺼비.

대룡상단에서 뇌물을 칭하는 이름 중 하나였다. 당연히 뇌물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한다.

그걸로 녹림은 만족할 것이다.

상단주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 * *

“오호라, 이건 또 뭐야?”

청성산에 도착한 제갈창해.

그는 기묘하게 자연과 동화된 진법을 보며 감탄했다. 제갈세가에서 배운 방식과는 확연히 달랐다.

‘본디 진이란 대지의 기운과 대비되도록 설계하는 게 정석이지. 그런데 이건 아니로군.’

제갈세가의 진법이 정종 무공이라면, 제갈창해가 보고 있는 건…….

‘마공 같군.’

제갈창해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이것을 분석하고 개조하면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으음, 전부 둘러보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긴 하겠군. 일단 들어가 볼까?’

제갈창해가 진 안으로 발을 들이밀려는 순간이었다.

“제갈 대협.”

“음?”

누군가가 나타났다. 제갈창해의 솜털이 쭈뼛 선다. 그의 감각은 눈앞의 사내가 고수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천하의 녹림 총채주가 긴장할 만큼의 실력을 가진 고수였다.

“설마 황극린?”

“맞소.”

“허, 참.”

제갈창해가 헛웃음을 짓는다.

이건 대체 뭐지?

뇌불이 떠나는 제갈창해에게 언급을 해 주긴 했다. 만뇌문의 황극린에 대해서.

아니, 뇌불이 아니더라도 황극린에 대한 소문은 몇 번 들어 보았다. 소림사의 천덕을 꺾고 우승한 중소문파의 후기지수. 흑사회를 끝장낸 중원의 몇 안 되는 진정한 협객. 그러한 수식어를 몰고 다니는 사내이니만큼 궁금하긴 했지만…….

‘아직 약관의 나이가 되지 않았다고 했던가?’

그런 나이에 자신을 긴장하게 만들 경지에 올랐다?

물론 제갈창해는 무공뿐 아니라 진법의 실력까지 일정 궤도에 올랐으니 그 또한 천재라 말할 수 있겠지만, 그가 보기에도 지금 황극린의 성장은 비상식적이다. 이제껏 그보다 빠르게 성장한 무인이 있던가?

생각나는 건 괴이한 무공을 익힌 천화련의 몇 놈들뿐이다.

그놈들은 역천의 무공을 익혔으니 그렇다고 치고.

“나랑 싸워 볼래?”

황극린이 미소를 머금는다.

“지금은 상황의 여의치 않아서 말이오.”

“아, 대룡상단 놈들과 전쟁 중이지? 근데 무슨 상관이냐? 이 진법 안에 있으면 누구도 너희를 건들지 못할 건데.”

“그러니 더더욱 난 싸울 수가 없소.”

“허, 설마 유격전(遊擊戰)이라도 하려고?”

무언의 긍정이다.

제갈창해가 감탄한다.

“이곳으로 이사한 이유가 있구나. 그래도 혼자서 대룡상단을 노리다간 위험할 수도 있다.”

제갈창해는 아무리 강한 무인이라 하더라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황극린의 무공이 강하다는 건 이미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실전은 다르다.’

일례로 절정의 고수가 삼류 무인한테 패배하는 이야기를 들 수 있다.

무림에선 흔히 언급되는 이야기인데, 절정에 이른 고수가 삼류 무인에게 패배했다는 이야기다. 상식적으로 절정 고수가 삼류에게 패배할 일은 없지만, 무림에선 왕왕 그런 일이 벌어진다.

독이 든 무기를 이용할 수도 있겠고, 함정을 파서 절정의 고수가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환경에서 싸울 수도 있다. 가능성은 무한하다. 바로 실전이 그러하다.

하지만 누구도 모르는 사실은 황극린은 그 실전에서 정점에 이른 자란 것이었다.

중원에서 황극린처럼 자신보다 강한 사람을 많이 죽여 본 경험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흑살문의 살수로 있으면서 온갖 상황을 겪었다. 목숨을 잃을 뻔한 경험은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뭐, 알겠다. 나야 영감님이랑 약조한 것만 지키면 되니까. 진법을 개조하는 데 두 달 정도는 걸릴 거다. 배교가 만들었다고 했나?”

“그렇소.”

“그런데 배교 놈들이 아직 남아 있다고? 천화련이랑 무당에서 몰살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래서 제갈 대협을 부른 것이오. 혹시 모르니까.”

“크크크, 좋다! 나만 믿어…….”

그때였다.

“두 달은 너무 길지 않을까요?”

“넌 또 뭐냐?”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제갈창해가 여인을 노려본다.

왠지 얼굴이 익숙한 것은 기분 탓일까?

“저는 한 달이면 될 것 같은데요?”

그녀는 제갈소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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