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135화 (135/316)

135화 제갈창해

황극린이 대룡상단에 선전포고를 했을 즈음.

어느 울창한 산속에 마련된 비무장에 두 사람이 있었다.

“허허, 쓰벌. 괴물 같은 영감일세.”

거한 사내가 대(大)자로 누워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다.

“클클, 꽤 성장하긴 했지만, 아직 내게 닿으려면 한참 멀었다.”

“그렇군. 퉤엣.”

거한 사내를 보면 대번에 호랑이가 떠오를 정도로 강렬한 인상이었다.

마치 갈기처럼 기른 수염이 참으로 잘 어울린다. 누워 있음에도 근육의 꿈틀거림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사내의 이름은 제갈창해.

새로이 녹림의 왕이 된 사내였다.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을 것 같은 녹림의 총채주였지만, 그는 한 노인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극린이보단 훨씬 부족하지만, 확실히 난놈이긴 하군.’

뇌불은 솔직히 감탄했다.

처음엔 제 앞가림도 하지 못해서 비실거리던 놈이었는데, 20년 만에 만난 놈은 이미 초절정의 경지를 뛰어넘어 있었다. 거기다 이놈의 무서운 점은 무공보다 다른 재능이 더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그가 설계한 판에서 싸웠다면 설사 뇌불이라도 패배했을 수도 있었다.

누워서 숨을 헐떡이던 제갈창해가 뇌불을 바라본다.

“그래서, 내게 뭘 시키려고 왔소?”

“뭐, 여러 가지가 있지.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자꾸나.”

“영감님이랑 술 마시기 싫은데…….”

만약 녹림도들이 들었다면 기절초풍할 만한 말이었다.

술이라면 환장하여 녹림 최고의 말술이라 불리던 그였다. 하지만 그가 술을 마다하다니?

“왜, 또 맞을까 봐?”

“아니, 생각해 보시오. 술을 마실 때마다 무공을 가르쳐 준다니 뭐니 갑자기 때려 대는데 영감님 같으면 마음 편하게 마실 수 있겠소?”

“끌끌끌, 그것도 수련의 일종이지 않으냐? 네놈도 그때의 경험으로 이렇게 성장한 것이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후우, 좋소. 뭐, 이제는 대책 없이 당하지만은 않겠지. 갑시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제갈창해.

그가 우렁차게 외친다.

“이놈들아! 술상 펴라!”

대별산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녹림도 모두가 크게 외친다.

“예! 총채주님!”

“든든한 수하들이로군.”

“킬킬, 정파라 으스대는 놈들보단 훨씬 낫소.”

“그렇겠군. 가자.”

대별산 봉우리에 마련된 녹림도들의 거처로 향한 두 사람. 도착하니 녹림도들이 열심히 연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귀하게 기르던 돼지를 도축하여 통으로 구워 대고 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미 두 사람의 자리는 마련되어 있었다.

“제법 운치가 좋구나.”

“그래서 내가 대별산에 있는 것 아니겠소?”

제갈창해는 과거 가문에서 쫓겨났었다.

제갈세가에서 촉망받던 인재였지만, 장남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당했다. 아니, 정확한 이유를 따지자면 그는 정파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갈세가에서 망나니 취급을 당했으며, 결국은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제갈창해는 무림에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뇌불이 그에게 무공을 알려 주지 않았다면 분명 지금 이 자리에 그는 없으리라.

“내가 문파를 하나 만들었다.”

“그렇군. 응……? 지금 뭐라고 하셨소? 무, 문파라고?”

평소 당황하지 않는 제갈창해였지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대명사였던 뇌불이 문파를 만들었다고? 소림도 번잡스럽다고 나왔던 이가 바로 뇌불이다. 무림공적이 되어서도 중심가의 객잔에서 연회를 벌일 정도로 대책이 없는 인물이었다.

“이거 꿈인가? 아니, 꿈은 아니군.”

제갈창해가 제 팔을 꼬집더니 뇌불에게 시선을 옮겼다.

“만뇌문이라고 들어 봤느냐?”

“잠시만, 만뇌문? 어디서 분명 들어 봤는데…….”

옆에서 시중을 들던 녹림도 한 명이 황급히 입을 연다.

“만뇌문은 최근 용봉지회에서 우승했던 황극린이 속한 문파입니다! 최근 명성을 떨치는 중이었습니다!”

“아, 맞다. 권룡.”

녹림에서도 정보는 필수였다.

그들은 무림에서 통행료를 받고 살아간다. 그 통행료라는 게 사람을 가려 가면서 받아야 하기에 어디의 어떤 문파가 얼마나 세력이 강한지 파악해야 했다.

“권룡이 영감님의 제자요?”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허허, 그랬군. 중소문파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용봉지회 우승자가 나와서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영감님의 제자였구만! 클클.”

제갈창해가 해맑게 웃는다.

소위 말하는 명문거파 출신들의 자존심에 금이 갔을 것이라 생각하니 몹시 통쾌했다.

“그런데 문파를 만들어서 자랑하려고 찾아온 것이오?”

“그건 아니고.”

뇌불이 술을 한잔 들이켠다.

그에게 시킬 것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일단 황극린의 말처럼 제갈소희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녹림과 말을 맞출 것이다.

그렇게 뇌불이 온 목적에 대하여 말한다.

제갈창해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한다.

“상관없소. 제갈세가를 괴롭히는 건 그냥 심심해서요. 그딴 놈들에게 복수하겠다고 녹림으로 들어온 건 아니었으니까.”

제갈창해는 거창한 목표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제갈세가를 멸문해서 뭘 하겠는가? 그는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게 좋았다. 적당히 골려 주고, 찾아오면 패 주면 된다.

황극린이 알던 제갈창해는 작정하고 무림맹과 척을 지게 되지만, 그것은 먼 훗날의 일이긴 했다. 현재의 제갈창해는 그나마 순한 맛(?)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뇌불의 말에 딱히 기분 나빠하지도 않았다. 사실 별 상관 없는 일이었으니까. 거기다 뇌불의 말이 아니던가? 그는 제갈창해가 만난 은인 중 한 명이었다.

“영감님이 언질하면 제갈세가를 괴롭히는 걸 멈추면 된다, 이 말 아니오?”

“클클, 말이 잘 통해서 좋구나.”

두 사람이 신이 나서 과거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셔 대기 시작한다.

그러다 문득 제갈창해가 묻는다.

“참, 그건 그렇고 비동에서…….”

“총채주님! 어르신!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녹림의 총채주 제갈창해는 자신의 말을 끊었다고 해도 불호령을 내리지 않는다. 이렇게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수하들이 말을 꺼낼 정도면 중요한 이야기라는 소리였으니까.

“뭔데?”

“정보가 입수됐습니다. 그… 대룡상단에서 만뇌문에게, 아니! 만뇌문이 대룡상단에 전쟁을 선포했다는 정보였습니다.”

“뭐라?”

뇌불이 벌떡 일어선다.

그가 흥분하자 덩달아 제갈창해도 벌떡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의 키는 뇌불보다 머리 하나는 컸다. 뇌불도 작은 체구는 아니었는데, 제갈창해가 중원인 중에서도 특출 났다.

“무슨 일인지 상세히 고해 보아라!”

“예! 어르신!”

이야기가 끝나고 난 뒤.

제갈창해가 말한다.

“냄새가 나는구려.”

“그래, 대룡상단 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우리 문파를 건드렸겠군.”

뇌불의 입에서 튀어나온 ‘우리’라는 말에 제갈창해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언제나 망나니처럼 살아갔던 그였다. 오죽하면 무림공적으로 지정되었을까? 그런 대책 없이 앞만 보고 살아가던 양반의 입에서 우리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세상 참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군.’

하지만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제갈창해에게 뇌불은 은인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자신도 없다. 비동 따위를 만들어 준 것으로 그에게 은혜를 다 갚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일은 내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소.”

“네가?”

“내가 녹림의 총채주지 않소?”

“오호라.”

상단이나 표국을 운영하면 녹림과 엮일 수밖에 없었다.

중원에서 녹림이 하는 일은 자신들의 구역을 지나치는 이들에게 통행세를 받는 일이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무림에서는 대대적으로 녹림을 토벌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먹고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끊임없이 산으로 몰려들었고, 몇 년만 지나도 녹림은 다시금 과거의 권세를 회복했다.

어느샌가 녹림은 무림의 방파로 자리를 잡았다.

물론, 대부분 무림인은 정식으로 그들을 문파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지만… 최소한 상단이나 표국을 운영하는 이들은 녹림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거기다 현재의 녹림은 제갈창해가 이끌고 있었다.

그는 총채주가 된 후로 여러 산채를 돌며 진법을 설치했다. 진법 안에서는 웬만한 무림인도 제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멀찍이 서서 활만 쏘아 대도 몹시 위협적이었다.

훗날 제갈창해는 흑도의 왕이라 불리며, 무림맹조차도 쉬이 건드릴 수 없는 강력한 녹림을 만들어 낸다. 뭐, 지금 당장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대룡상단이야 충분히 괴롭혀 줄 수 있소.”

제갈창해가 사악한 미소를 머금는다.

그는 애초에 중원 무림에 불만이 많았다. 거기다 좋은 명분도 있지 않은가? 은인의 문파를 건드린 천하의 잡놈들. 그런 놈들을 괴롭히는 데에 이유가 필요할까?

중소문파라 무시하며 만뇌문을 꿀꺽하려 했던 대룡상단이었지만, 어느샌가 그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적이 늘어 가고 있었다.

* * *

상단주의 호출을 받고 호북성에 도착한 진우선은 의아한 보고를 받게 되었다.

만뇌문의 행렬이 갑자기 증발했다는 것이다.

“중강현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고?”

“예, 만뇌문을 돕겠다고 나섰던 무림인들도 중강현에 진입하자마자 해산했다고 합니다.”

“중강현이면… 청성파가 있는 곳이 아니더냐?”

설마 청성파가 만뇌문을 숨겨 준다는 말인가?

청성파는 구파일련 중 하나였다. 그들이 만약 직접 만뇌문을 숨겨 준다면 일이 단단히 꼬이게 된다. 단순히 대룡상단과 만뇌문의 전쟁이라면 모르겠지만…….

‘제기랄, 전쟁의 규모가 더 커지면 안 되는데…….’

만뇌문 하나라면 충분히 대룡상단의 힘으로 막아 낼 수 있었다. 그들은 대정회의 힘을 보이고자 문파들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만뇌문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멸문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만뇌문이 미친놈들처럼 갑자기 이사하더니 중강현에서 사라졌단다.

당연히 청성파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청성파마저 만뇌문의 편에 붙는다면…….

아무리 대룡상단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고 해도 지금 이상으로 무림맹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전쟁이 격화될 조짐이 보인다면 무림의 권력을 잡은 명숙들이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할 것이다.

‘제기랄. 왜 이렇게 꼬인 거지.’

차라리 도움을 주는 문파들을 모두 물리고, 대룡상단과 만뇌문만 싸운다면 오히려 나을 상황이다. 청성파마저 만뇌문에 도움을 준다면… 대룡상단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장로님! 청성파에서 서신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뭐라 하더냐!”

“청성에선 만뇌문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했습니다.”

“정말이더냐?”

“예, 아마 상단주님께도 보고가 됐을 겁니다.”

“후우우우……!”

다행이었다.

듣자 하니 제갈세가나 개방이나, 적당히 쪽수만 맞춘 것이지 정예를 투입하진 않았었다. 왜인지 남궁세가는 사천성의 지부장까지 나설 정도로 만뇌문을 엄호했다고 하는데… 남궁세가는 모용세가에게 맡기면 된다.

만뇌문의 인맥이 꽤 대단하긴 하지만 대룡상단엔 미치지 못한다.

북경에도 그들의 수족과도 같은 이들이 널려 있었다.

“다녀오마.”

“예, 장로님!”

현재 대룡상단주는 새로운 표국의 부지를 계약하기 위해 호북성 양양(襄陽)현에 와 있었다. 장로 진우선은 잔뜩 긴장한 채로 상단주를 만나러 갔다. 그는 잠시 머무는 것에 불과한데도, 양양현에서 가장 큰 장원을 매입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상단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차가운 인상의 여인이 진우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우선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지만, 여인이 무림인이라는 걸 대번에 알아차렸다.

‘이 여인이 매난국죽(梅蘭菊竹) 중 하나로구나.’

매난국죽은 대룡상단주의 지척에서 호위하는 네 명의 여인을 가리키는 칭호였다. 대룡상단의 막대한 재산으로 어릴 때부터 영약을 섭취하고 모용세가에서 무공을 익힌 그녀들은, 천하백대고수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실력만큼은 천하백대고수에 준한다는 사실을 진우선은 알고 있었다. 장로였던 진우선도 처음 보았다.

대룡상단은 중원에 알려진 것보다 더욱 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긴장되는군. 몇 년 만에 상단주님을 뵙는 것인지…….’

천하의 진우선도 긴장했다.

다른 사업체를 공격적으로 인수하며 갑질을 행하던 진우선이었지만, 대룡상단주 가금후의 앞에서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상단주님, 진우선 장로가 도착했습니다.”

“들어와라.”

“……!”

몇 년 만에 보는 상단주의 위엄은 더욱 강맹해졌다.

눈빛 하나로 상대를 위축시키고, 절로 따르게 만든다. 상인으로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그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진우선 장로의 숨을 막히게 만들었다.

“오랜만이구나.”

“예, 예……! 상단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우선 절부터 올리겠습니다!”

진우선이 황급히 절을 올리려 했지만, 대룡상단주가 고개를 젓는다.

어정쩡한 자세로 허리를 굽히고 있던 진우선의 얼굴에 땀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일단…….”

“예!”

“종아리를 걷어라.”

“……!”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진우선의 눈이 커진다.

종아리를 걷어라.

대룡상단에서 평생을 일한 장로였기에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대룡상단주는 잘못한 이들에게 직접 체벌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대룡상단주의 팔뚝을 본 진우선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린다.

마치 채찍과도 흐물흐물한 회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촤악-! 촤아아악-!

시범 삼아 휘두른 것에 불과한데도, 공간이 찢겨 나가는 굉음이 퍼져 나갔다.

“변명은 그 후에 듣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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