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자하신단
잠깐의 침묵.
그리고 터져 나오는 함성.
“우아아아아아아-!”
대부분 관중은 천덕이 우승하리라 생각했다. 팽여해나 운평자의 비무를 본 이들이라면 모두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천덕의 육신은 전설상의 경지인 금강불괴에 이르렀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을 정도니 그에 대한 평가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었다.
황극린은 모용세가의 모용가아에게 승리했다고 하지만 천덕에 비해서는 저평가되어 있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모두가 그의 주먹은 천덕의 반탄지기를 뚫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뚫고 황극린은 그의 반탄지기를 뚫어 버렸다.
“대체 얼마 만에 중소문파에서 용봉지회 우승자가 나온 거지?”
“15년 만이라네! 15년!”
“난 황 소협이 이길 줄 알고 있었네! 모용세가의 장남과 비무할 때 보지 않았던가? 그는 후기지수 수준이 아니야.”
“그러고 보니 모용 소협이 생각보다 강했던 건가?”
“당연하지! 육대세가의 대공자가 약하겠는가? 하필이면 우승자인 황 소협을 만난 게 운이 나빴을 뿐이지.”
“그럼 모용 소협과 소림의 천덕이 붙으면?”
“비무 시간은 오히려 천덕 스님이 더 짧았지 않았던가?”
겉으로 보기엔 황극린이 비교적 쉽게 천덕의 반탄지기를 뚫어 낸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덩달아 모용가아의 평가도 올라가고 있었다.
‘역시.’
귀빈석에 앉아 비무를 관전한 모용가아가 묘한 표정을 짓는다.
사실 그는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황극린과 직접 싸워 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감이라는 게 있다. 자신의 평이 좋아지는데도 막상 좋아하지 못하는 이유는…….
‘난 그와 경쟁해야 한다.’
처음엔 그를 무시했다.
중소문파 출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남궁운혜가 그에게 관심이 있다는 듯한 소문이 들리자 모용가아는 그에게 질투마저 느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게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다.
강호에서 살아가는 무인이라면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는 벽.
숙적이라는 존재가 모용가아의 가슴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내가 저 사내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그런 걱정에 당연히 좋아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모용가아였다.
비무를 관전했던 후기지수라면 모두 다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으리라.
“곧이어서 봉(鳳)의 결승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화산의 장로가 내력을 담아 외친다. 용의 대회가 끝났으니 이제는 봉에서 우승자를 가려야 한다.
결승에 진출한 이는 언교연과 두야랑이다.
“잠시만! 봉의 대회에서도 만뇌문이 우승하는 것 아닌가?”
“허허허, 용봉지회에서 한 문파나 가문이 용과 봉에서 동시에 우승을 차지한 경우가 있었던가?”
“있었지. 저번 용봉지회가 그랬었지 않나.”
“그래?”
한 문파에서 용봉지회에서 두 명의 우승자를 배출하는 것.
구파일련 중에서도 현재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천화련주의 딸과 아들이 우승을 차지했었다.
하지만 그건 딱히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칠룡오봉 중에서도 남매의 실력은 최상위권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니까. 거기다 천화련 출신이 아니던가?
이제 막 개파한 만뇌문과 천화련에 거는 기대는 차원이 다르다.
봉의 대회에서도 만뇌문에서 우승자가 나오면 용봉지회가 개최된 이후로는 처음으로 중소문파에서 두 명의 우승자를 배출하는 것이다.
“설마……?”
모두가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 * *
“용의 대회 우승자 만뇌문의 황극린.”
시상대 전체를 울리는 함성이 지축을 뒤흔든다. 황극린의 품속에서 잠을 자고 있던 인면지주가 함성에 놀라 몸을 떨었다.
“괜찮다.”
주인님의 말씀에 인면지주가 다시 조용히 몸을 웅크렸다.
황극린이 천천히 시상대 위로 올라선다. 더 거대한 함성이 황극린의 육신을 강타한다. 왠지 모를 쾌감에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하다.
‘신기하긴 하군.’
그는 대부분의 삶을 핏빛 어둠에서 살아왔다.
누군가에게 주목을 받는 건 살수로서 실격이었으며, 죽음을 앞당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수천에 달하는 인파가 황극린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그 감상에 오래 젖어 있지 않았다.
주목이라는 것은 양날의 검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인기에 취하여 경거망동하다간 제풀에 쓰러지고 말 것이다. 관심이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아마 용봉지회가 끝나면 날 끌어내리려는 이들도 많아질 것이다.’
그건 강호가 아니라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다 그럴 것이다.
황극린이 올라선 다음에 화산파의 장로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봉의 대회 우승자 진주언가의 언교연.”
또다시 거대한 함성이 시상대를 뒤덮었다.
아쉽게도 만뇌문에서 두 명의 우승자는 배출하지 못했다. 언교연은 황극린이 기억하는 전생과 마찬가지로 우승을 차지했다.
‘만약 두야랑이 독공을 제대로 사용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지.’
왜인지 모르겠지만 두야랑은 최근 급속도로 성장했다.
그녀가 만독문의 절기를 펼쳤다면 어쩌면 언교연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만독문의 출신인 것이 들키게 된다. 그건 두야랑뿐만 아니라 황극린에게도 피해가 왔을 것이기에 그녀는 결국 우승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승자 두 명이 자리를 잡으니 단상 위에서 한 노인이 걸어온다.
체구가 그리 크진 않았건만, 왜인지 그의 앞에선 모든 것이 작아지는 기분. 만인을 압도하는 기세를 가진 노인이었다.
그가 바로 화산파의 장문인 화염신황이다.
‘느껴진다.’
황극린은 창천뇌검과 마주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압력을 느꼈다. 그가 일부러 내력을 방출하는 것도 아닐진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싸우면 죽는다.’
사실 천하칠대고수 중에서도 이황(二皇)으로 꼽히는 고수에게 패배하는 것은 기분 나쁠 일도 아니다.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와 같은 것이다. 그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무인 중에서도 최고의 재능을 가졌고, 절세의 무공을 익혔으며,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수련했다.
하지만 황극린은 자존심이 상했다.
인면지주의 내단을 취하고 얻은 감각 때문일까? 그의 본능은 자신보다 강한 포식자를 극히 경계하고 있었다.
‘언젠간 싸워 보고 싶군.’
아니, 정확히는 이기고 싶었다.
무공을 익히는 이라면 힘에 대한 욕구는 지울 수 없었다. 황극린 또한 그건 마찬가지였다.
“난 자네가 우승할 것을 알고 있었다네. 축하하네.”
그가 고풍스러운 목함을 건네 준다.
황극린이 용봉지회에 참가한 이유가 여기에 담겨 있었다.
자하신단(紫霞神丹).
아쉽게도 반으로 갈라진 영약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용봉지회에 참가할 가치는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황극린과 언교연이 상품을 받았다.
뒤이어서 본선 진출자들 또한 시상대 위에 호명되어 앞으로 나왔다. 준우승을 한 천덕과 황극린이 시선을 마주한다.
천덕은 불호를 외며 황극린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 시주께서 익힌 무공은 소림에 알리지 않겠습니다. 대신, 언젠가 저와 다시 한번 싸워 주십시오.
결승에서의 패배는 천덕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아직 자신은 부족하고 또 부족하다. 자만심을 경계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듯하다. 황극린이 뇌불의 무공을 익힌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가 지금 더 강할 뿐이다. 그러니 언젠간 이겨 보일 것이다. 소림의 자존심을 걸고 말이다.
- 알겠소.
천덕은 조용히 황극린을 떠나갔다.
사실 언젠간 황극린이 혈풍뇌전신공을 익혔다는 게 알려질 것이다. 또한, 뇌불의 존재도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는 늦춰지면 늦춰질수록 좋았다.
시상대에서 내려오자 두야랑과 광견살검이 그를 반겨 준다.
“축하해!”
“축하드립니다, 황 장로님!”
“고맙소.”
“근데 너 폐회식에 갈 거야?”
용봉지회가 끝난 후에는 폐회식이 진행된다. 본선에 진출했던 참가자들에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본래 용봉지회가 개최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후기지수끼리의 친목이다 보니 대부분 폐회식에 참가한다.
하지만 황극린은 굳이 참가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자하신단을 취하는 것이다.
“아니.”
“그럴 줄 알았어. 나도 안 갈래.”
“모시겠습니다!”
용봉지회의 우승.
강호 무림의 후기지수 모두가 꿈꾸는 영광의 자리였건만, 그에겐 절세의 영약을 쉬이 얻을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다. 이제 목적을 이루었으니 떠날 때가 됐다.
‘일단 자하신단을 취한 후에 말이지.’
* * *
자하신단.
지(地)와 화(火)의 기운을 품은 절세의 영약이다. 목함을 열자마자 영약에 담긴 ‘냄새’가 방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만년화리의 내단을 취한 이후로 화의 기운을 품은 영약을 취하면 그것은 그대로 내공으로 변환됐다.
평범한 무인이 영약을 취하는 수준의 효율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제까지 영약을 취하는 족족 다른 곳에 흡수된 것과 비교하면 대단한 발전이었다.
과연 자하신단을 취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황극린이 기대를 품은 채 자줏빛의 영약을 삼켰다.
“……!”
배 속을 뜨겁게 차오르는 거대한 기운이 느껴진다. 만년화리의 내단을 취했을 때와는 확실히 다른 반응이다. 그때는 육신 전체에 화의 기운이 흡수되었다면 지금은…….
‘운기행공을 하는 것처럼 세맥에 자하신단의 기운이 흐르고 있다.’
황극린이 눈을 감고 집중한다.
온전히 자하신단의 기운을 흡수하기 위해서 부족한 내력을 늘릴 기회였다.
그렇게 두 시진이 지난 후.
황극린이 눈을 번쩍 떴다.
- 끼이이익!
기다렸다는 듯이 인면지주가 황극린의 앞에서 재롱을 피우고 있다.
황극린은 몸에 어떠한 변화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두 배가 되었다.’
그의 내력은 두 배가 됐다.
15년에서 30년이 되었다는 말이다. 자하신단이 대략 100년의 기운을 품고 있었고 그것을 반절로 나눴으니 온전히 내공으로 치환했다면 25년이 늘어나야 했건만, 약 15년 정도의 공력이 늘어났다.
‘나쁘지 않은 효율이다.’
황극린이 예상보다 훨씬 괜찮았다.
현재 그에게 가장 큰 약점은 내공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무공은 심기체(心氣體)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현재 그의 심과 체는 초절정 고수의 뺨을 칠 수준에 올라 있었지만, 오직 기만은 심과 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자하신단을 취해 그 괴리를 어느 정도 메울 수 있었다.
자하신단의 남은 기운이 없어진 게 아니냐고?
아니다. 황극린은 초감각으로 육체가 조금 변화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실 초감각이 아니더라도 그의 주위에 떨어진 하얗고 얇은 것들을 보면 변화를 인지할 수 있다.
‘지(地)의 기운은 피부에 흡수됐다.’
황극린이 소매 속에서 단검을 꺼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손바닥을 그어 버렸다.
당연히 칼날을 관리해 왔기에 상처가 생겼다. 더군다나 내공으로 피부를 보호하려는 조치도 취하지 않았었다.
‘피부가 약간이지만 확실히 질겨졌다.’
자하신단을 취하기 전이었다면 더욱 깊게 상처가 났을 것이다.
작은 변화라 할 수도 있겠지만, 종잇장 한 장 차이로 생사가 갈리는 강호에선 이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거기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분명 각각의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는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이제는 양기를 취해도 ‘환골탈태’와 같은 효과는 없다.
흡수되지 못한 기운은 단전으로 간다.
황극린의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의 기운을 한계까지 받아들인다면…….’
그는 무림 역사상 최고의 육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확신할 수 없다.’
들뜬 마음을 진정시킨다.
물론 신체의 변화가 다른 기운과 충돌을 일으킬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지금 황극린은 양기가 극한에 치우친 상태였다. 최악의 가정이긴 하지만 음기(陰氣)를 지닌 영약을 지닌다면 양기와 충돌할 수도 있다. 이제까지의 상황을 돌이켜 보면 그럴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가장 확실한 건 음기를 지닌 영약이나 내단을 취하는 것.’
황극린은 다음 목적지를 정할 수 있었다.
영약이란 보통 자연의 환경에 따라 만들어진다. 추운 지방에서 설삼(雪蔘)이 자라고, 더운 지방에서 열삼(熱蔘)이 자라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북해.’
북해빙궁이 있는 북해는 한파로 인해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척박한 땅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 곳에서 자라나는 약초들은 음기의 기운을 품고 있다.
‘사흑련의 권역이긴 하지만 나 혼자서 움직일 거니 상관없겠지.’
두야랑과 광견살검과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그들을 주렁주렁 데리고 영약과 영물 사냥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그들은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짐을 챙긴다.
이제 화음현에 더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 * *
“네? 그게 무슨……?”
남궁운혜가 멍한 얼굴로 두야랑을 바라본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걔, 벌써 자하신단 먹고 갔어. 벌써 화음현에서 벗어났을걸.”
두야랑이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그녀 또한 딱히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설마… 내가 찾아올 줄 알고……?’
남궁운혜는 제멋대로 착각을 하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왜 자신을 이토록 피하는가?
이제는 그 이유를 꼭 알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