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다르게
시운량.
그는 과거에 꽤 유망했던 후기지수 중 하나였다.
구파일련의 압도적인 위세 앞에서 중소문파는 늘 그들을 받쳐주는 존재에 불과했지만, 개중 개천에서 용이 날 법한 인재들이 종종 나타나곤 했었다. 시운량도 그중 하나였다. 각 지역에서 펼쳐지는 비무 대회에 참가하여 이름을 알리고, 수많은 인연을 만들었다.
와룡검(臥龍劍).
그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별호만 보더라도 세간에서 그에 대한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를 걷는 것처럼 보였으며, 많은 이들이 그와 연을 맺고자 다가왔었다.
그래.
그랬기에 시운량은 자만했었다.
고작해야 중소문파 출신에 불과할 터인데, 무림육대세가의 자제들과 어울렸다. 구파일련의 제자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그렇기에 자신은 급이 다르다고 생각했었다. 중소문파 따위는 자신을 담을 그릇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무림 최대의 비무 대회인 용봉지회(龍峯之會)에서 ‘진짜’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들은 하늘이었다.
무림은 넓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하늘 위에는 또 다른 하늘이 있고, 그 위에는 천외천이 존재한다. 그러한 진리를 시운량은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10년.
자만의 대가를 치른 시간이다.
그는 10년 동안 정파의 후기지수가 아닌 거의 사파인과 같은 삶을 살아왔다.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으며, 수많은 사람을 죽여왔다. 그가 용봉지회에서의 치욕적인 패배를 인정하고, 다시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10년이 걸렸다.
그는 무림인이 아닌 ‘교관’의 생을 살기로 다짐했다.
거창한 목표의식 따위는 없었다. 단지, 자신이 얻은 경험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의외로 그에겐 타인의 재능과 성격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며, 무공의 수련법을 정립하는 것에도 재능이 있었다. 뒤늦게 발견한 자신만의 진짜 재능이었다.
그는 언젠간 자신만의 무관을 만들어, 노후를 보내는 게 꿈이 되었다.
황씨가문과 계약을 맺고 남창에 온 것은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위한 지렛대에 불과하다. 이곳에서 성과를 거두어 교관으로서 능력을 증명하고, 목돈을 챙겨 무관을 만든다.
분명히 그런 계획이었다.
“으으음···.”
연무장을 무작정 달리는 훈련.
그것은 시 교관이 고안해낸 훈련법이자 교육생들의 자질을 평가하기 위한 시험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하루 만에 끝나는 게 아니다.
칠주야.
첫날엔 열심히 뛰던 이들도 다음 날에는 갑자기 설렁설렁 달리기에 임하기도 하고, 어제 대충했던 이들이 갑자기 각성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부분까지 모두 고려하여 칠주야 동안 교육생들의 자질을 평가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맞는 수련법을 적용한다.
그것이 훈련 계획이다.
사람마다 성격과 성향이 모두 다 다르다. 모든 종류의 성격을 하나씩 분류할 수 없지만,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끈기가 부족한 자들은, 끈기를 키울 수 있는 수련을 시킨다. 체력이 부족하면 체력을 키운다.
하지만 칠주야가 지나도 전혀 평가할 수 없는 소년이 있었다.
아니, 처음에 평가하긴 했었다.
- 황극린
처음엔 뺀질뺀질한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단체 훈련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인다고 생각했었다. 덤으로 체력은 그리 좋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여섯째 날까지 시 교관은 그 판단에 점점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달리기 훈련의 마지막 날.
황극린은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체력은 황일남과 동급 수준으로 판단했었는데 말이지.’
황극린은 황일남보다 먼저 달리기를 그만두었다. 첫째 날에는 잘 몰랐지만, 그는 달리기를 마친 후 잘게 다리를 떨고 있었다. 지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최대한 그런 부분을 숨기려 한다고 판단했다.
남에게 약점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성격.
뭐, 그런 유형의 사람은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약점을 숨기려 하는 것은 본능이다. 황극린이 다리를 떠는 것을 목격한 시 교관은 황극린의 평가를 거침없이 작성했다. 여섯째 날까지는 황극린은 관도 중 체력으로는 최하위의 평가를 받았었다.
하지만 마지막 날이 되었을 때.
‘황극린은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더 빠르게 더 많이 뛰었다. 칠주야 동안 연무장을 달렸으니 피로가 누적됐을 텐데도 말이다.’
그의 체력 평가는 최하위에서 단번에 중위급으로 올라섰다.
이 부분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애초에 그런 체력이 있었다면, 왜 처음부터 뛰지 않았던 건가?
마지막 날이라서 최대한 열심히 했던 걸까?
하지만 열심히 한다고 해도 인간의 근육은 한계가 있는 법이다. 마지막 날이니만큼 근육의 피로가 누적되어 체력으로는 최상위급으로 평가받는 주서웅 또한 다리를 덜덜 떨며 달려나갔었다.
그가 체력을 숨긴 것이라면, 그 전에 다리를 떨었던 건 순전히 연기였다는 말이다.
교관을 속이기 위한 연기.
“그건 말도 안 되지.”
애초에 그럴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 달리기 평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황룡관주가 된 황보휘를 제외하곤 아무도 모른다. 설령 알았다고 해도 그런 연기를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니면 칠주야 동안 달리면서 다리에 근육이라도 붙은 건가?”
시 교관이 헛웃음을 터트린다.
이건 더 말도 안 된다. 그럴 만한 시간도 아니고, 근육은 그렇게 빨리 붙는 게 아니다. 아무리 타고난 체질이 있다고 하더라도, 눈에 띄는 효과를 보려면 적어도 한 달은 필요하다. 거기다 쉬지 않고 매일 달리기만 했으니 근육이 뭉쳐야 정상이다.
그 가정은 말도 안 된다는 소리였다.
“일단은··· 더 지켜봐야겠군.”
* * *
“근육이 붙었네.”
황극린이 종아리와 허벅지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무영심결······. 예상보다 훨씬 대단한 무공이었군.”
중원 최악의 살수라 불린 유령.
그가 살수가 아닌 다른 길을 택했다면, 당시 천하제일인이라 불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대개 살수를 평가할 땐, 정면대결은 약하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령의 무영심결을 익히고 있는 황극린으로선, 이 무공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닫고 있었다.
‘세맥에 쌓인 불순물들이 빠져나가면서 허약했던 몸에 활력이 돋아나고 있다. 난 분명히 단전도 만들지 않았지만··· 기(氣)가 세맥을 움직이는 행위 자체가 육체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거겠지.’
황극린은 머릿속으로 현재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정리했다.
무공을 익히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변화와 결과를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더 빠른 길을 찾아 나갈 수 있다.
물론, 무공을 익히는 데 있어서 빠른 것만은 능사는 아니긴 했지만 현 상태에선 그리 고심하고 고찰할 부분은 없었다. 지금 이대로 몸의 변화만 확실히 인지하면 된다.
‘무영심결의 효과는 신진대사를 촉진한다. 최근 식생활이 달라진 영향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끄덕끄덕.
모든 요소가 긍정적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긴 했지만 과거··· 아니, 미래라고 말해야 할까? 아무튼, 207호로 불렸던 시절의 경지를 회복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그래도 이런 수순이라면 조만간 단전을 만들 수도 있겠군.’
그가 아직 단전을 만들지 않은 것은 같은 심법을 익히더라도 극한의 효율을 뽑아내기 위함이었다.
황극린은 이미 내공심법을 익혀본 적이 있었다. 세상 어떤 무인들도 내공심법을 두 번 익혀보지 않았으리라. 그 장점을 최대한 살리려는 것이다.
차근차근 착실하게.
그러면서도 빠르게.
황극린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 * *
“이제부턴 두 조로 나눈다.”
“조를 나눈다고요?”
이젠 시운량 교관의 무서운 얼굴이 익숙해진 것인지 황일남이 되묻는다. 물론, 그의 차가운 눈빛을 보고 바로 눈을 내리깔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 호명하는 이들은 1조다. 상희륭, 모윤충, 구종명, 서학표, 길명. 나머지는 2조다. 둘로 나뉘어서 줄을 맞춰 서라.”
“예!”
칠주야가 지나서 그런지 이제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소년들이었다.
황극린은 나뉜 조를 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1조는 달리기를 할 때, 최선을 다해 체력의 한계치까지 달린 이들이다. 의지력이 강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에 반해 2조는···.
조금은 뺀질뺀질한 이들의 모임이다. 교관이 보지 않는다 싶으면 속도를 늦추거나 대충대충 꼼수를 부린 사람들이었다.
“오늘부터 1조와 2조는 경쟁을 한다.”
경쟁?
소년들의 표정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소년 중 가장 눈치가 빠른 상희륭은 홀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시운량 교관에게 인정을 받았다. 첫날 교관이 내건 상품인 ‘진검’을 받은 것도 그였다. 거기다 1조 관도들의 눈빛을 보라. 그들은 모두 황룡무관의 관도가 되는 것에 목숨을 걸었다.
경쟁이 있으면, 또 다른 상품도 있다는 말이다.
상희륭은 이 경쟁에서 자신들이 계속 승리할 것이라 확신했다.
‘황씨가문의 둘째 도련님이나 주서웅 저 곰 같은 놈이 걱정되긴 하지만··· 내가 다 이긴다.’
상희륭은 배포가 큰 사내였다.
“조원은 바뀔 수도 있지만, 당분간은 이대로 갈 것이다. 승자에겐 상을 주겠지만, 패자에겐 벌을 줄 것이다. 벌을 받지 않으려면 죽을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당근과 채찍.
교관에겐 관도들을 강하게 키워야 할 의무가 있었다. 시운량 교관이 직접 선택하여 관도들을 선별했다면, 약간 다른 방식이 되었겠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의지박약인 이들에겐 계기를 만들어주고, 욕구가 강한 이들에겐 경쟁자를 만들어준다.
“시험은 칠주야에 한 번 치러질 것이며, 방식은 시험이 끝날 때마다 알려줄 것이다. 알겠나?”
“예!”
“그럼 지금 다음 시험이 무엇인지 알려주겠다. 첫 번째 시험은···.”
모두가 긴장하며 교관의 입을 주목한다.
그리고 그의 입이 열리는 순간.
희비가 교차했다.
“비무···. 아니, 너희들에겐 싸움이라는 말이 적절하겠군.”
시운량 교관은 황룡관주가 원하는 방식으로 관도를 키워야 했다.
그리고 경쟁심을 가장 극명하게 키워줄 방법은.
다름 아닌 분노였다.
사실 이런 방식은 시운량이 그리 좋아하진 않았지만, 황룡무관주의 요구에 맞춰서 빠르게 저들을 써먹을 수 있는 무인으로 바꾸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럼 오늘 훈련을 시작하겠다.”
경쟁과 시험.
상과 벌.
그리고 싸움.
그 말에 소년들의 표정이 조금씩 바뀌어있었다.
* * *
“야, 주서웅.”
“예, 도련님!”
같이 훈련받고 있는 처지라고 해도 황일남과 주서웅은 갑을 관계였다. 당연한 일이다. 황일남의 아버지는 주서웅 아버지의 고용주였으니까. 황일남이 아버지한테 가서 한마디만 하면 주서웅은 가문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주서웅은 황일남의 앞에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야, 너 훈련 제대로 안 해? 왜 그렇게 대충 대충이야? 엉?”
“아, 그게··· 죄송합니다.”
주서웅은 확실히 의지가 약하다.
힘든 것을 지독히도 싫어한다. 그는 몸이 튼튼하게 태어난 것을 행운으로 여겨야 할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황일남은 답답했다.
주서웅 이놈이라도 1조와의 경쟁에서 이겨줘야 할 텐데, 이놈이 이렇게 의지가 없으니 자신이 벌을 받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주서웅이 덩치는 컸지만, 1조에 상희륭이라는 놈은 보통내기가 아니다.
그건 옆에서 직접 지켜보면 알 수 있었다.
“너 때문에 벌 받으면 어떡할래? 응? 죽고 싶어?”
“헤헤헤, 도련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떤 경쟁이든 저희가 다 이길 겁니다.”
“뭐? 네가 다 이길 수 있다는 말이야?”
“아니, 그게 아니고···.”
지금 주서웅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의 얼굴.
사신과도 같은 눈빛을 한 황극린!
‘그 괴물 놈이 있으면 질 턱이 있나. 크큭.’
상희륭이니 뭐니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했다간, 사신의 분노가 자신에게 닥쳐올 것이다.
“알고 보니까 저희 조원들이 엄청 세더라고요. 제가 뒤에서 다 알아봤습니다.”
“뭐? 걔들이 세다고?”
2조 관도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솔직히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다.
“예에. 그렇더라니까요? 아마 교관님도 둘째 도련님을 배려해서 그렇게 조를 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으음,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네.”
어리숙한 두 사람이 서로 공감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기야 교관도 자신이 황씨가문의 둘째라는 걸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좋아. 너만 믿는다? 내가 벌 받으면 너부터 조질 거야.”
“옙! 걱정하지 마십시오!”
불쌍한 주서웅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황극린이 아직 주목받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황씨가문에서 그것을 얻을 때까지 최대한 힘을 쌓고, 가진 것을 숨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