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의 의미
두 사람의 실력이 어느 정도일까?
황극린은 유심히 두 사람의 비무를 살펴보았다.
챙! 카앙! 챙챙!
검과 검이 부딪치고, 경쾌한 충돌음이 연속해서 들려온다.
비무를 관전하는 소년들은 연신 감탄성을 터트렸다. 현란하면서도 화려한 움직임. 검을 휘두를 때마다 펄럭이는 소매가 소년들의 감성을 건드린다. 사내들이 좋아하는 건 다 비슷하지 않겠는가? 구파일련 중 하나인 무당파와 제천회의 무공이라니 눈빛이 초롱초롱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한 사람은 전혀 흥분하지 않고 두 사람의 비무를 분석하고 있을 뿐이었다.
‘비무가 아니라 검무(劍舞)를 보는 듯하군.’
짜 맞춘 듯한 움직임.
황극린은 비무를 보며 확신했다. 두 사람은 아마 자주 비무를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상대방의 다음 움직임을 예측하여 방어하고, 상대가 당황하지 않게끔 배려하고 초식을 펼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춤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살수의 무공을 배운 황극린에겐 마음에 드는 상황이 아니다.
아무리 친선 비무라도 빈틈을 찾아내서 찔러야 하는 그에겐 이런 보여주기식 비무는 사치일 뿐이다.
‘그래도.’
배울 점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무당의 검은 유검(柔劍)으로 상대의 공격을 흘렸으며, 제천회의 검은 쾌검(快劍)으로 빠르게 상대를 압박하고 있다. 두 사람은 정석대로 검을 다루고 있었기에, 초식을 기억하는데 도움이 됐다.
‘제천회의 검로는 치고 빠지는 뱀과 같다. 자잘한 상처를 많이 내어 결국 패퇴시키는 방식이로군. 그리 나쁘진 않다. 다만···, 보법이 받쳐주질 못하는군.’
황극린은 제천회의 무공이 그리 조화롭지 않다는 걸 기억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제천회의 무공이 더 발전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그것은 황극린이 이제까지 무공을 수련한 방식이었다.
그는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제천회의 검로를 보면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만큼, 타인도 황극린을 보며 그렇게 느낄 수 있다. 그가 천하칠대고수 중 한 명인 창천뇌검을 죽였다곤 하지만, 무공의 실력보다는··· 다른 부분이 더 크게 작용했었다.
‘아무튼, 두 사람의 실력은 확실히 알겠군.’
정면으로 싸운다면 당연히 황극린이 패배한다.
현재의 그는 단전도 없는 상태였으니까. 물론, 정면대결이 아닌 암습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긴 하지만 말이다.
“후우우! 어떠냐?”
숨이 차오르는지 헐떡이는 황보휘.
그의 말에 소년들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멋집니다!”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저마다 비무에서 느낀 감평을 늘어놓으니 황보휘가 작게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이 나와 같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목숨을 건 각오로 임해야 할 것이다. 난 너희들이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믿어보지.”
황보휘가 슬쩍 황극린을 바라본다.
아마 그 또한 자신의 무공에 감탄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조만간 자신처럼 무공을 펼칠 수 있다고 헛된 기대를 품고 있으리라. 당연히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다름 아닌 구파일련 중 하나인 무당파의 제자였으니까.
속가제자라고 해도 이들이 익힐 무공과는 궤를 달리한다.
‘격의 차이가 무엇인지 천천히 깨달아보아라. 네놈이 얼마나 한심한 핏줄을 이어받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황보휘가 말한다.
“오늘부터 시 교관님의 말씀을 잘 따르도록. 시 교관님, 잘 부탁드립니다.”
“예.”
짤막한 대답이었지만 황보휘는 미소를 지은 채 몸을 돌렸다.
황룡무관주의 역할은 여기서 끝이다. 그는 저런 한심한 아이들을 상대하며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황보휘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안녕! 또 보네!”
서문취아가 황극린의 앞에 다가가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10대 때에는 한두 살 차이가 매우 크게 느껴지기 마련. 아무리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황극린이었기에 서문취아는 그를 한참 동생으로 생각했다.
“···예.”
황극린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왜 귀찮게 다가와서 말을 거는지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의 얼굴을 보아서 그런 걸까? 예전부터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굴로 고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난 서문취아라고 해. 너 보휘의 사촌동생이라며?”
“예.”
황극린이 곁눈질로 황보휘를 살펴본다.
딱히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황극린은 그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지독한 질투.
아직 자신은 어린 소년에 불과한데도, 자신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다. 당연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다. 황보휘는 금황상가를 물려받을 장남이었으며, 그의 말대로 무당파에서 무공을 수학했다. 황극린은 지금 가진 게 전혀 없었다.
“너.”
서문취아가 갑자기 정색하며 황극린을 뚫어 질듯 바라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누나가 앞에 있으니 부끄러운 거지!”
제멋대로 착각을 하고 꺄르르, 웃는다.
이 나이의 여인들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여인들의 감정 자체를 잘 이해할 수 없다. 황극린은 사람을 죽이는 살수로 평생을 살아왔다. 평범한 사내처럼 여인들과 연분을 쌓지 못했다.
예외가 하나 있다면···.
‘그건 상관없는 일이지.’
황극린은 무심하게 대답한다.
“아닙니다만.”
“그래? 내가 볼 땐, 그런 거 같은데··· 힝, 그런 거라고 해주면 안 돼?”
좋게 말하면 붙임성이 좋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황극린이 좋아하는 성향은 아니다.
오히려 질색하는 편이다.
“취아야, 방해하면 안 돼. 교관님이 뒤에서 기다리시잖아.”
“아! 정말 죄송해요. 너무 반가워서 인사하고 싶은 마음에 그만···.”
시운량 교관은 무뚝뚝하게 대답한다.
“아닙니다. 시간은 많습니다.”
황보휘는 그런 눈치 없는 교관이 답답했지만, 서문취아는 이미 황극린과 거리를 벌린 상태였다.
“가자.”
“응, 알겠어.”
이제 막 떠나려고 하는 찰나.
서문취아가 황극린에게 말했다.
“나중에 또 보자!”
황보휘는 무표정하게 황극린을 한번 바라보고는 친우들과 함께 떠나갔다.
당연히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이제는 무공을 배우게 될 소년들은 ‘서문세가’의 여인이 황극린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것에 놀라는 눈치였으며, 특히 황씨가문의 둘째 황일남은 더 격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만약 교관이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그에게 어떻게 아는 사이냐며 따지고 들었을 테다.
“주목.”
당연히 뒤숭숭한 분위기의 소년들은 시운량 교관의 말에 주목하지 못했다.
교관의 기세가 완전히 변한다.
맹수와 같은 눈빛에 소년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어찌 사람의 눈빛이 저럴 수 있을까?
“주목.”
“주, 주목!”
모두가 시 교관의 입을 바라본다.
“확실히 말해둔다. 황룡관주께서 보여주었던 비무는 모두 잊어라. 그건 쓰레기다.”
“···?”
모두가 당황한다.
그렇게 멋진 비무를 보여주었는데 잊으라니? 거기다 쓰레기라니?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특히 황씨가문의 둘째인 황일남의 표정이 볼만했다. 그는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교관의 얼굴이 너무 무서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내가 형님께 다 말할 거야!’
그때 교관이 말을 이어나간다.
“왜 쓰레기라고 말한 것인지 아는 사람이 있나? 맞춘다면 상을 주도록 하지.”
“···.”
당연히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다.
황극린은 왠지 알 것도 같았지만, 굳이 말을 꺼내지 않는다. 딱히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살수 경험에서 녹아난 습관 같은 것이었다.
“아무도 없나?”
“···.”
“그럼 다시 묻지. 쓰레기가 뭔지 말해보아라.”
당연히 쓰레기가 뭘 뜻하는지 모르는 이들은 없었지만, 교관에 기세에 밀려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저어···.”
“말해라.”
황일남이 손을 든다.
그는 교관의 표정에 겁을 먹긴 했지만, 결국 교관도 자신의 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단지 무공이 배우고 싶어서 아버지께 졸라 참가했을 뿐이다.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에 용기가 생겼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쓰레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황극린을 바라보는 걸 잊지 않는다.
“맞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쓰레기라고 하지. 잘 말했다.”
뜻밖의 칭찬에 황일남이 얼굴이 밝아진다.
이런 곳에서 자신의 진가가 드러난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눈치지만, 그 또한 황씨 집안의 피를 이어받았다. 그 또한 형처럼 잘나가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러니 너희들에게 두 사람의 비무는 쓰레기다. 전혀 쓸모가 없으니까.”
뚜벅뚜벅.
교관이 꼿꼿이 선 소년들 사이를 누비며 말을 이어나간다.
“너희들은 솔직히 무공을 배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
“두 분의 무공은 최소 다섯 살 때부터 기초를 갈고닦아온 것이다. 만약 관주님의 비무를 보고 무공에 흥미가 생기게 됐다면··· 버리는 게 좋을 거다. 너희들이 당장 배워야 할 것은 무공이 아니다.”
무공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모두가 같은 표정을 짓는다.
“너희들이 익혀야 하는 것은 육체를 다루는 방법이다.”
육체를 다룬다?
혹시나 교관이 또 질문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소년들이 긴장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단지 명령했을 뿐이다.
“연무장의 담벼락을 기준으로 하여 뛰어라. 가장 잘 뛴 한 사람에게는 이걸 주겠다.”
“···!”
시 교관이 무언가를 꺼낸다.
그것을 본 소년들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혹자는 약삭빠르다고 할 수도 있고, 눈치가 빠르다고 할 수도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구를 가진 소년이 다짜고짜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위기감을 느낀 다른 소년들이 황급히 그의 뒤를 따른다. 관심받길 좋아하는 황일남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켜! 비켜! 내가 일 등이다!”
우르르 뛰어가는 소년들.
가장 뒤에 있는 것은 황극린이다. 그는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들은 연무장 한 바퀴를 모두 돌았다.
가장 빨리 들어온 것은 당연히 황일남이다. 소년들도 눈치가 있었기에 감히 그를 추월하지 못했다. 흡족한 표정의 황일남이 교관의 앞에 섰다.
“제가 일 등입니다.”
시 교관이 무심하게 답한다.
“내가 언제 한 바퀴만 뛰라고 했지?”
“예···? 분명히···.”
그러고 보니 한 바퀴만 뛰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럼 연무장을 몇 번이나 돌아야 한단 말인가?
“계속 뛰어라. 난 가장 빠른 사람에게 상을 준다고 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뛰어야 하는 겁니까?”
“그건 네가 선택하면 된다.”
계속 뛰라고 해놓고 선택을 하라니?
반박하고 싶었지만, 황일남은 시 교관의 얼굴을 보고 깔끔히 포기했다. 그는 너무 무섭게 생겼다.
“에잇.”
황일남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그것을 본 소년들도 그를 뒤따른다.
‘분명히 빠른 사람을 뽑는 건 아니라고 했지?’
‘가장 오래 달리는 사람에게 준다는 건가?’
‘달리는 자세가 중요할 게 분명해!’
‘내가 꼭 받을 거야!’
저마다의 생각을 가지고 소년들이 뛰기 시작한다.
일부러 속도를 늦추는 이들도 있었고, 계속 선두를 지키려 속도를 유지하는 이들도 있었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시 교관의 선물을 받기 위해 달리고 있다.
그리고 시 교관은 팔짱을 낀 채, 그것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 * *
“흐음···.”
열 장의 종이에 오늘부로 황룡무관의 관도들이 된 소년들의 신상명세가 적혀 있었다.
그들의 나이와 신체의 특징 그리고···.
- 주서웅, 또래에 비해 체격이 크고 체력 또한 우수하다. 허나, 의지박약이 엿보인다.
- 황일남, 체력 최하. 의지박약. 신분을 앞세워서 이득을 보려 하지만 머리가 좋지 않아서 그것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함.
- 상희륭, 체력은 평균적이지만 눈치가 빠르고, 훈련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엿보임.
“···.”
종이에 적힌 특징들을 살펴보던 시운량.
그가 고개를 갸웃한다.
- 황극린.
“이놈은 뭐지?”
전혀 특징을 알 수 없었다.
체력이 그리 좋은 것 같지 않은데, 또 의지박약처럼 보이진 않았다.
허나, 뜀박질 수련에서 열성적으로 임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지. 분명히 적당히 뛴 것 같은 느낌이었지.”
적당히.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황극린은 적당하게 연무장을 뛰었다. 대부분 관도들이 연무장을 다 뛰고 녹초가 되어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것에 반하여 그는 크게 체력을 소비한 것 같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지쳐 쓰러질 때까지 뛰라고 명령하진 않았으니, 딱히 문제는 없었다.
“으음···.”
시운량이 짧게 자란 턱수염을 매만지며 생각을 이어가고 있을 때.
“교관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예.”
황룡무관의 관주가 된 황보휘였다.
사실 무관이라 칭하기에 부끄러울 정도였지만, 뭐 시운량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어땠습니까?”
훈련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는 이미 황보휘와 교관이 입을 맞춘 상태였다.
비무를 했던 것부터 연무장을 달리는 것까지 계획된 것이라는 말이다.
“썩 상태가 나쁘진 않더군요.”
황보휘가 탁상 위에 올려진 종이를 훑어본다.
‘동생에 관한 것을 유심히 볼 줄 알았더니, 거들떠보지도 않는군.’
애초에 황씨가문의 둘째가 시종들과 같이 훈련을 받는다는 것부터 이상하긴 하다. 금황상가의 후계자리는 이미 정해진 것 같았다. 그것 역시 교관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는 관도들을 제대로 훈련시키기만 하면 된다.
“황극린은 비어있군요.”
“예, 작성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래요?”
황보휘가 교관과 눈을 마주한다.
“그래서 교관님이 보시기에 오늘 가장 뛰어났던 관도는 누굽니까?”
무언가 기대를 담은 황보휘의 눈빛.
교관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주서웅과 상희륭이 가장 눈에 띄더군요. 잘 키우면 쓸만할 겁니다.”
그의 대답에 황보휘가 왠지 모르게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