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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4화 (4/316)

행동개시

황극린이 가장 먼저 신경 쓴 것은 체력을 기르는 것이다.

지금은 체력을 키우는 데 거창한 수련 따위는 필요 없었다. 성장기 때의 몸에는 충분한 식사가 가장 중요하다. 황씨가문은 황극린에게 제대로 된 음식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딱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제공한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최대한 음식을 얻을 방법을 강구했다.

이럴 바에는 황씨가문을 나서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도 있겠지만, 위험한 발상이다. 황극린은 강호 무림이라는 곳이 얼마나 매몰차고 위험한 곳인지 알고 있었다. 특히 강서성 남창은 정파의 세력이 득세한다기보단 흑도와 사파 또한 균형을 갖추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과거 혈귀라는 별호로 불렸다고 하더라도 당장 한계는 존재했다. 강호는 위험한 곳이다. 황씨가문은 그에게 현재 가장 안전한 울타리이기도 했다.

‘특히···. 이 얼굴이 문제지.’

제대로 씻지도 않아 흙먼지가 가득한 얼굴.

아무렇게나 기른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 속을 들여다보면 빼어난 외모가 잠들어 있었다. 중원에는 괴상한 취향을 가진 놈들이 많았다. 과거 그런 놈들의 표적이 되어 죽을 뻔한 경험이 있었기에 당장 황씨가문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냠냠.

비 노인이 가져다준 주먹밥을 먹는다. 밥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속에는 고기와 삶은 채소가 다져진 채로 들어 있었다. 어느 정도는 균형이 잡힌 식단이라 할 수 있으리라.

고작해야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굶주림으로 인한 탈력감은 어느 정도 해소됐다.

이것만으로도 과거보다 훨씬 더 좋은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아이들이 가장 빨리 큰다. 당시에 황극린은 제대로 된 식사조차 하지 못했으니 키가 많이 자라지 않았으며, 뼈가 튼튼하지 못했다. 그것은 먼 미래까지 영향을 끼쳤었다.

그리고 체력 다음으로 그가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은.

‘내공.’

내공이라는 것은 인간이 품을 수 있는 자연의 선물이다.

흑살문에서 207호를 가르친 교관은 그렇게 설명했다. 황극린은 그 설명에 동감하고 있었다.

‘과거보다 2년 이상 빠르게 시작하는 거다.’

보통 명문세가의 자제들은 5살 때부터 내공심법을 익힌다.

또한, 몇몇은 벌모세수(伐毛洗髓)와 같은 초고난도의 시술을 거쳐 내공심법을 익히기 좋은 육체를 가지고 시작한다.

단전에 내공을 쌓는다는 것은 무공의 초식을 수련하거나 근력을 단련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다. 어릴 적 무리한 근력 운동을 하게 되면 뼈가 고르게 자라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내공심법을 익히는 것은 무조건 어릴 수록 좋다.

나이가 들수록 세맥에 불순물이 쌓이기 때문이다.

세맥은 ‘내공이 지나다니는 길’ 정도로 생각하면 편한데, 어릴 때 내공심법을 익히면 불순물이 거의 쌓이질 않는다.

사실 어린아이가 내공심법을 익히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명문세가에서는 집안의 초고수들이 호법을 서고 있을 때만 운기행공(運氣行功)을 허락하곤 한다. 내공을 다룬다는 것은 어린아이의 정신력으로 부담이 되는 행위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황극린은 가르침을 내려주거나 호법을 서줄 고수의 존재는 필요하지 않다.

그는 이미 1갑자에 달하는 내공을 가진 경험이 있었으며,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내공심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단전을 만들 필요가 없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지금 단전을 만든다면, 다른 고수들이 맥만 짚어보아도 단전에 내력이 쌓여있다는 걸 살펴볼 수 있다. 살수는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 한다. 다시 그림자로 살아갈 생각은 없지만, 흑살문에서 배운 것은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

첫 번째 이유는 사실 현실적인 이유 중 하나였고, 두 번째가 진짜였다.

‘확실하게 눈덩이를 굴리기 위해서는 최대한 길을 터놓아야 한다.’

중원 무림의 무공은 세월을 거듭할수록 발전해왔다.

대종사의 자질을 가진 이들이 만든 무공의 원형이 가장 강한 경우도 있긴 했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문파는 무공을 개량하고 또 개량하여 발전을 도모했다.

그것은 흑살문도 예외는 아니다.

그가 207호라는 이름을 받고 살수의 수련을 받을 때와 그가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흑살문에서 살수들을 키우는 방식은 크게 달라졌다.

황극린은 미래의 방식으로 내공심법을 익힐 생각이었다.

우사에서 깨어난 날,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걸 인지한 시점부터 설계한 부분이다. 보통 무공을 익힐 땐, 사부나 스승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황극린은 그 자신이 사부나 다름없었다.

‘무영심결(無影心訣).’

황극린이 완벽히 이해한 무공은 아니었다.

당연했다.

이것은 과거 중원을 한 세대 동안 공포로 몰아넣었던 전설적인 살수 유령(幽靈)이 창안한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유령의 추종자들이 만든 문파가 흑살문이었고, 흑살문의 문주나 세 명의 특급 살수만이 그 무공의 구결을 볼 기회가 주어진다. 모르긴 몰라도 당대의 흑살문주도 그것을 모두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아무튼, 207호는 특급 살수가 아니었지만, 특급 살수의 자리에 거의 근접했었다. 정확히는 창천뇌검을 죽인 공로로 구결을 볼 기회를 얻었다.

안타깝게도 단전이 깨지는 바람에 그것을 익히진 못했었지만, 지금은 그 구결을 아는 것 자체가 행운이라 할 수 있다.

흑살문에서 교육생들에게 가르치는 방식이 달라진 것도 당대의 흑살문주가 무영심결의 심득을 일부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에서 미래의 방식을 차용하여 무공을 수련할 수 있었다.

황극린은 미래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황극린이 가진 최고의 패 중 하나였다.

‘무영심결은 심결이다. 심법이 아니다.’

눈덩이를 굴린다.

눈이 쌓인 언덕에서 작은 눈덩이를 굴린다면, 눈은 서로서로 밀착하여 불어나기 시작한다. 가장 밑으로 내려가면 작은 눈덩이를 감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그 크기를 키웠으리라.

내공심법을 익힌다는 것은 눈덩이를 굴린다는 것과 같다.

똑같은 높이에서 눈덩이를 굴린다면, 최종적으로 눈덩이를 가장 크게 만들 방법이 무엇일까?

언덕에서 구르기 쉽게 완전한 원형의 눈덩이를 만드는 것.

처음부터 눈덩이를 크게 만드는 것.

그리고 눈덩이가 튀어나온 자갈 따위에 부딪혀 부서지지 않게 길을 닦는 것이다.

무영심결은 눈덩이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더욱 매끈하게 단련하는 무공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기 위해선 무영심결에 담긴 심득을 깨우쳐야 하겠지만, 그건 차차 생각해 나가면 될 문제였다.

황극린은 과거를 경험했다.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정확한 방향만 알고 있으면, 그에 따른 시련이 있더라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다.

꼬끼오오오-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

“몸을 움직일 시간이군.”

꽤 오랫동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이젠 몸을 풀어줘야 한다. 거친 수련 따위는 필요 없었다. 꽤 활기를 되찾은 육신이라 하지만 아직 무리한 육체 단련은 무리를 준다. 현재 그에게 딱 알맞은 수련법.

그것은 빗자루를 들고, 장원의 마당을 쓰는 것이었다.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 * *

으드득.

황씨가문의 어린 시종 중 대장이라 할 수 있는 주서웅.

그는 아침부터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 전, 황씨가문에서 거의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는 황극린을 골려주려다 자신이 당했다. 애초에 혼자 넘어진 것에 불과했으나 주서웅은 당시의 창피함을 오로지 황극린에 대한 분노로 치환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를 따르는 다른 아이들도 주서웅의 편을 든다.

“호북성에서 오신 손님분들도 오늘 아침에 떠나셨대.”

“황극린, 그 새끼 요즘 너무 기고만장한 것 같더라. 요즘 뭔가 살이 붙은 것 같기도 하고.”

“얼마나 일을 대충 했으면 살이 찐대? 진짜 미쳤네.”

“···.”

주서웅은 친우이자 수하라 할 수 있는 아이들의 말을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가 또래 시종 아이 중 대장이 된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타고난 체격과 완력 그리고 깡.

사내들의 세계에선 힘만 있다면 우두머리로 군림할 수 있었다.

“가자.”

주서웅이 벌떡 일어선다.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컸기에 일어서기만 했을 뿐인데도 위압감을 드러낸다. 무공이고 뭐고 배우지도 못한 아이들이었기에 그것만으로도 주서웅을 따르기엔 충분했다.

한편,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고 있던 황극린.

그는 어린 시종 무리가 다가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살수는 감각을 단련해야 했다. 마당을 쓸면서도 사방을 경계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또한, 저들은 자신만만하게 기척을 숨기지도 않고 다가오고 있었으니 꽤 거리가 있다 한들 황극린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쐐애애액-!

다짜고짜 날아온 돌멩이.

황극린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것의 궤적이 자신에게 미치지 못할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당연히 황극린이 기겁하며 놀라 자빠지거나 돌멩이에 맞고 비명을 지를 것을 기대했던 주서웅의 표정이 구겨진다. 그는 수하처럼 부리는 친구들에게 어른들이 오는지 망을 보게끔 시킨 후, 다가왔다.

황극린은 빗자루를 든 채로 가만히 그를 응시할 뿐이다.

‘더럽게 마음에 안 드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넝마가 된 옷을 입고 황씨가문에 온 소년. 처음 그의 얼굴을 보고 든 생각은 ‘잘 생겼다.’ 였다.

넝마가 된 옷, 흙먼지가 쌓여 얼룩진 얼굴.

그런데도 그의 얼굴에선 빛이 나는 듯했다.

질투라는 감정은 저도 모르는 새 불어나곤 한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했지만, 그의 아비가 황씨가문에 죄를 지고 도망쳤다는 걸 알았을 땐, 내심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노예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면서도.

더러운 우사에서 잠을 청하면서도 저 묘한 눈동자가 주서웅을 자극했다. 다른 아이들은 주서웅의 앞에 서면 주눅이 들기 마련인데, 저놈은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도 보아라. 저 당당한 눈빛을 말이다. 주먹질 한 방에 나가떨어질 약골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죽고 싶냐? 눈 안 깔아?”

“···.”

여기서 고민.

황극린은 어떻게 해야 현실에 더 잘 녹아들 수 있을지 생각했다. 황씨가문의 둘째 아들에게 했던 것처럼 허리를 숙인다? 그렇다면 주서웅이 황극린을 괴롭히지 않을까?

아니.

황극린은 과거 수많은 경험을 했다.

그가 정식 살수가 되기 전에도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어오는 이들은 많았다. 대부분 고개를 숙이면 더욱 날뛰곤 한다. 주서웅 또한 그런 성정이었다. 방금 돌멩이를 마구잡이로 던진 것만 봐도 자신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황일문의 처리는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난 후로 정했지만, 주서웅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놈은 오늘 처리해야겠군.’

죽이겠다는 건 아니다.

단지, 황씨가문에서의 생활이 조금 더 편해지게끔 교육을 하겠다는 말이었다.

“잠시 아무도 안 보는 데서 이야기해도 될까?”

“왜 쪽팔리냐? 부끄러워? 다른 애들이 보는 게?”

시종 아이들이 망을 보면서도 키득거리는 게 들려온다.

황극린이 어깨를 으쓱인다.

“너도 어른들이 보면 좀 그렇지 않아?”

“뭐, 그렇지. 얘들아,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다녀올 테니까.”

주서웅이 기세등등한 미소를 지은 채 뒤를 돌아본다.

당연히 그에 반발하는 이들은 없었다.

“따라와.”

주도하는 건 자신이라는 듯 앞장서는 주서웅.

잠시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황극린이 그의 뒤를 따른다.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황극린의 보금자리인 우사였다.

* * *

끼이익.

문이 닫히고, 주서웅이 사납게 뒤를 돌아본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르려는 듯이 어깨에 힘이 가득하다. 며칠 전, 그의 앞에서 볼썽사납게 넘어진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수치스러운 기억을 잊기 위해선 주제도 모르는 황극린을 때려눕혀야 했다.

분명히 그리됐어야 했는데···.

“억···?”

쿠당탕!

오른 주먹을 들어 올린 채로 주서웅이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바닥에 짚이 깔려있다고 하지만 꽤 충격이 컸다.

‘왜 내가 바닥에···?’

그런 생각을 이어갈 틈도 없이.

무언가가 그의 가슴을 밟는다.

체구가 작다고 무시했던 황극린의 발이었다.

“너···, 컥···!”

그런데 왜 이렇게 무거운 것일까? 당장이라도 욕을 내뱉고, 그를 밀쳐야 정상이건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

평소 반항적인 눈빛으로 주서웅은 황극린의 눈동자를 싫어했다. 죄인의 자식인 주제에 왜 반항적인 눈동자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죄인이면 죄인답게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 아닌가?

‘무슨 사람 눈이···?’

오싹···!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척수를 관통하는 오싹함에 주서웅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처음 느껴보는 살기(殺氣). 황극린의 살기는 포효하는 호랑이의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 그렇기에 더 무서웠다. 당최 무슨 짓을 할지 예상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주서웅에게 제대로 된 공포를 심어주지 못하리라.

그렇게 생각한 황극린이다.

“···!”

주서웅은 황극린에 손에 들린 ‘그것’을 보고 숨이 막혀옴을 느꼈다.

작은 창 틈새로 들어오는 햇살. 날카로운 과도(果刀)는 빛을 받아 번쩍거린다.

- 음머어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누렁이는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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