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운산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차 맛을 칭찬했다. 사실 향이 좋았지 차 맛에 대해서 운산은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그 차가 그 차 같고 조금 떨떠름한 맛이 느껴지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고교은봉(高橋銀峰).”
그녀의 입에서 차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예?”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운산이 반문하고, 그의 반문을 들은 것인지 만 것인지 상관도 하지 않은 채로 그녀가 차에 대한 설명을 주르륵 늘어놓았다.
“강남에서 나는 차야. 양자강 중 하류에서 나고.”
자기 할 말만 하고는 다시 입을 닫아버 리는 그녀, 운산이 이 난감한 분위기를 어찌 해결해야 할까 고민했다.
‘설 선배 같잖아.’
제갈수련을 보고 있으면 생각난다. 북해빙궁의 소궁주이자 동시에 지금은 천산설곡의 주인이 된 사람.
자운의 친우라 하던 설혜와 매우 비슷했다.
조금은 차갑고 무감각하며 음성에 고조 역시 없었다.
무엇보다 비슷한 점은 백치미와 함께 얼굴에서 전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게 먹고 싶다.”
‘거기다 뜬금없어.’
운산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곳은 내륙 중에서 내륙이다. 대게를 운송해 오는 족족 대부분이 상해 버리니 구하기도 힘들었다.
아니, 그런 것보다도 갑자기 대게가 먹고 싶다니, 어쩌란 말인가.
운산이 한참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의 방문이 덜컹 하며 열렸다.
그리고는 웬 여아가 뛰어 들어온다.
“가가!”
“커헉!”
운산이 뒤로 벌렁 넘어지며 입에 담고 있던 차를 뿜어내었다.
익숙한 목소리, 또한 자신을 가가라 부를 사람이 하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독왕의 손녀이자 자운이 마음대로 정해 버린 그의 약혼녀, 당소미!
운산이 엉덩이를 찧자 당소미가 다가왔다.
운산을 부축하며 그녀가 말한다.
“가가아파? 내가 호 해줄까?”
운산이 절대로 거부한다는 듯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아, 아니, 안 해줘도 돼.”
그건 이쪽에서 절대로 사양하고 싶다.
“음? 호 해주고 싶은데?”
하지만 당소미 쪽에서는 절대로 호를 해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당소미가 엉덩이를 까고 호를 할까 두려웠던 운산이 벌떡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아니. 괜찮아.”
운산이 두 손을 흔들며 난색을 표했다.
그러자 당소미가 어린아이답지 않은 앙큼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한다.
“칫. 아까워. 가가.”
뭐가 아깝다는 건지. 애를 도대체 어떻게 교육을 한 건지 할 수만 있다면 운산은 독왕의 수염을 뽑아버리고 싶었다.
‘실력이 없는 게 죄지.’
운산이 그렇게 한탄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당소미가 제갈수련을 바라보더니 또 운산을 경악하게 하는 말을 던져 놓았다.
“근데 지금 뭐하는 거야? 이거 불륜이야?”
운산이 탁하고 머리를 짚었다.
도대체, 무슨 교육을 한 거란 말인가아!
“아니, 불륜이라니. 소미 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응? 할아버지한테. 이봐, 언니. 우리 가가가 너무 매력적이라 좋아하는 건 좋은데, 내가 정부야.”
그러면서 운산의 왼쪽 다리 위에 폴짝 앉는다.
운산이 당소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제갈 소저는 나랑 아무런 관계도 없어. 그렇지 않습니까 제갈소저?”
제갈수련이 운산을 멀뚱히 바라본다.
그 시선에 불안함을 느낀 운산이 움찔했다. 하지만 이미 한 쪽 다리 위에는 당소미가 올라와 있어 움직일 수가 없다 운산을 향해 제갈수련이 천천히 다가왔다.
“뭐, 뭡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제갈수련이 다가오자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 운산, 그가 당황을 하든 말든 제갈수련은 운산을 향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운산의 다른 한쪽다리 위에 턱하니 앉아버린다.
외간 여자가, 그것도 제갈세가의 여식이 운산의 다리 위에 앉은 것이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운산의 얼굴이 귀까지 빨갛게 변했다.
당소미는 볼 가득히 바람을 넣어 부풀리며 불만 가득한 눈으로 운산과 제갈수련을 번갈아 바라본다.
제갈수련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무감각한 눈으로 당소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한동안 눈싸움이 이어졌다.
눈싸움이 멈춰지게 한 것은 바로 우천. 우천이 운산을 부르며 문을 활짝연다.
“사형!”
물론 그의 옆에는 제갈수가 함께였다.
기묘한 자세로 앉아 있는 셋을 바라본 우천이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하던 일 하세요.”
운산이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이, 이건 오해다.”
하지만 이미 고개를 돌린 우천은 말이 없고, 제갈수가 운산을 빤히 보더니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는 문을 닫았다.
“절륜하시군요.”
탁하고 문이 닫히려는 찰나, 우천의 목소리가 문이 닫히기 전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먼저 대사형부터 만나죠.”
그후에, 우천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이, 이건 오해다!!!”
취록이 머리를 다듬었다.
자운을 만나러 가는 길이니 그 정도의 몸치장은 신경 쓸 수 있었다.
원지 모르게 그와 만나기 전에는 몸치장에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았다.
좋은 향이 나는 향낭을 품속에 품었고, 매력적인 몸매가도 보이는 옷을 입었다.
물론 가슴팍에 잘 씻어 말린 솜을 쑤셔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의 몸매가 한껏 아름다워 보인다.
동경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취록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난 아직 죽지 않았어.’
스스로의 매력을 실감하면 자신감이 차오른다.
'딱히 그자를 만나러 간다고 신경 쓰는 건 아니야 흠흠. 나가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보이니까.’
이유 역시 그럴듯하게 했지만, 사실을 말하면 자운을 만나러 가기 위해 치장을 한 것이 맞았다.
그렇게 치장을 하고는 자운의 방을 찾았다.
‘뭐야.’
잔뜩 기대를 했건만, 자운의 방에는 자신 이외에도 또 다른 여자가 있었다.
정보를 운용하던 위치에 있었던 만큼 그녀의 얼굴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보는 순간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천산설곡주 설혜.’
천산설곡은 무림맹이 창설된 이후에 천산에서 내려와 적성과의 싸움에 많은 힘이 된 조직이었다.
그 수는 굉장히 적었지만, 누구 하나 고수가 아닌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감히 누구도 천산설곡을 경시하지 못했다.
그중 단연 으뜸은 그 가운데 서 있는 곡주 설혜.
젊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절대의 경지에 오른 무력을 뽐낸다.
그녀의 검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얼음 조각만이 남는다고 할 정도로 그녀의 무공은 고강했다.
무림맹에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여자가 자운의 방에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난신과 곡주는 친구라고 했었지.’
왠지 모르게 입이 쓰다.
단순한 친구 관계 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운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취록을 보며 씨익 하고 웃었다.
“왔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 인다
“예.”
“할 말이 있어서 불렀는데, 여기 와서 좀 앉아.”
자운이 한쪽 의자를 주욱 하고 빼주었고 취록이 그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는 취록을 설혜가 무감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운이 취록을 뒤로하고는 설혜를 바라보았다.
“잠깐만, 먼저 하던 이야기가 있어서 끝내고 하자고.”
그리고는 설혜와 하던 말을 이어나간다.
“그러니까 무상부를 도와 줄 거야, 말 거야?”
무상부라는 말이 자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자운이 무림맹의 무상을 맡게 되었다는 말이 진짜인 듯했다.
“무상부. 도움 필요해?”
설해가 자운을 향해 반문한다. 자운의 존재만 하더라도 무상부는 이미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운은 설혜라는 힘을 또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상대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지. 우리가 중심적인 균형을 맞춰야 한다지만 우리도 매여 있는 문파가 있잖아?”
자운이 눈앞의 빈 찻잔을 한 번 빙글 하고 돌리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견제하면서 우리도 우리 문파를 키워야지. 안 그래? 그렇게 놓고 보면 손을 잡기는 규모적인 면에서 비슷한 설곡과 황룡문이 딱일 거 같고.”
사실 자운은 설곡 이야기만 하면 속이 쓰렸다.
누구는 문파 재건을 위해서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녔는데, 누구는 기관장치 한 번 통과하더니 멀쩡한 문파를 날로 먹어버렸다.
조금 속이 쓰리긴 하지만, 황룡문의 앞날을 위해서 설곡과 손을 잡는 것이 필요했다.
“음. 손 잡으면. 뭐해줄 거야?”
취록이 설혜와 자운의 대화를 듣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설혜라는 여인, 말하는 것이 조금 특이했다.
일정 부분을 조금씩 조금씩 끊어서 말한다.
마치 ‘지금 밥 먹어’ 라는 문장을 ‘먹어 지금 밥’ 이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특이하네.’
새로운 정보를 하나 얻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정보는 황룡문과 설곡이 무상부에서 손을 잡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야. 너무하는 거 아니야? 예전부터 황룡문이랑 북해빙궁은 협력 관계였잖아. 이번에도 협력을 좀 해주라는 건데. 뭐 해줄까? 좋은 데서 술이라도 사줄까?”
자운이 히죽하고 웃으며 농을 던졌다. 술 한잔 사주는 것 협력 관계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줘. 술. 좋은 데서.”
“응? 뭐라고?”
전혀 생각지도 않은 답이 나오자 자운이 귀를 한 번 후비적 하고 파더니 다시 물었다.
“술 사줘.”
자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농으로 던졌는데, 정말로 그걸 물어버리다니.
‘이 농담을 기밀문서 급으로 받아먹는 녀석.’
하지만 이걸로 되었다. 술 한잔 사주고 설곡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을 것이 아닌가.
자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좋아. 사줄게.”
“사줘. 좋은 곳.”
말을 하는 그녀의 눈이 처음으로 기이한 열망으로 가득 차있었다.
‘얘 눈이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