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오늘도 마을 하나를 털 생각이었다. 아마도 마음에 드는 여자 하나둘 정도는 건질 수 있을 것이다. 천산의 여자들은 피부가 조금 가무잡잡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지, 그것을 제외하면 중원의 여인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 마을에서 가장 예쁜 여자 두셋은 자신이 취하고, 나머지는 부하들에게 나눠주면 부하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쓸모없는 남자들은 모두 죽여 버리거나 노예로 쓸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즐기고 있을 때만 해도, 갈무기는 오늘 자신의 팔자에 죽을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더 빨리 달려라. 마을이 멀지 않았다!”
그가 소리치며 뒤따라오는 부하들을 다독였다.
그의 말을 들은 부하들이 빠르게 말을 내달렸다. 그들의 손에는 당장에라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듯한 흉흉한 무기들이 들려 있다.
검, 도, 창, 심지어는 유성추에 이르기까지 그 무기의 종류가 다양했지만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피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다는 점이었다. 절대로 빠지지 않을 피 냄새가 놈들의 병기에서 묻어났다.
갈무기가 웃으며 소리쳤다.
“이놈들아, 좋으냐!”
오늘도 빼앗고 즐기는 거다. 그렇게 생각한 마적들이 이구동성으로 갈무기의 말에 화답했다.
“예! 단주!”
그들 역시 그들의 주인이 무공 고수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일이 더울 쉬워진 것이다.
가끔 마을을 털러 갈 때면, 신력을 타고난 장사들이 있어 일이 어려웠다.
하지만 아무리 장사라 할지라도 무공을 익힌 단주의 한 칼 상대도 되지 못했다.
단번에 사라지는 것이다.
그 덕분에 다른 마적단에 비해서 피해도 적고 빨리 털 수 있다. 마적단에 있어서는 엄청난 장점이었다.
눈앞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보인다.
당장에 달려가 털어버릴 것이다.
갈무기가 음흉하게 웃었다.
‘그런데 저게 뭐지?’
갈무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전방을 주시했다.
마을까지 이어진 길은 뻥 뚫려 있지 않았다.
그 길 위에 일남일녀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봐도 이쪽에 호의적인 감정을 가진 걸로 보이진 않았다.
미친 연놈들이 감히 말을 타고 달리는 마적단의 앞을 막고 서 있었다.
‘밟아버려야겠군.’
물론 여자의 외모를 보고 생각을 정정했다.
‘남자만 밟아버리고 여자는 내가 가진다.’
머릿속에 온갖 음흉한 생각이 차올랐을 때, 남자의 주먹이 허공으로 치켜 올려지는 것이 보였다.
주먹질을 한다고 해도 절대로 닿지 않을 거리였다.
남자와 갈무기는 이십 장 이상 떨어져 있었으니 말이다.
‘웃긴 놈이군.’
갈무기가 속으로 비웃었다.
그 순간, 무언가 엄청난 권격이 갈무기를 덮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권격은 사방을 휩쓸었다.
히히히힝―
절대고수가 무려 둘이나 나섰다. 이것은 소 잡는 칼을 닭 잡는 데 쓰는 것보다 더한 일이었다.
비유하자면, 용 잡는 칼을 닭 잡는 데 썼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고작 마적단을 상대하는 데 절대고수가 둘이나 움직인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으나 벌어졌다. 마적단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참상. 무언가가 번쩍한다 싶더니 눈앞이 아득해지는 진귀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자운이 주먹을 탁탁 털며 눈앞을 봤다.
마족들의 모습은 정확하게 두 종류였다. 상체와 하체가 정확하게 양분된 채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시체들, 그리고 주먹질에 맞은 것인지 온몸의 뼈가 나가 혼절해 있는 마적들이었다.
자운이 주먹을 털며 설혜의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았다.
휘익―
설혜가 검을 휘두르자 검에 붙어 있던 피가 단번에 떨어져 나간다. 그 모습을 보고 자운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왕이면 좀 깔끔하게 해주지 그랬냐?”
자운의 말에 설혜가 ‘뭐가?’ 라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자운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 못 알아들었으면 됐다.”
그리고는 설혜가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무감각한 할망구 같으니. 나이를 이백이나 먹더니 가는귀가 먹었나.”
뒤를 휙 돌아본다.
“넌 왔으면 좀 말리지 그랬냐?”
자운의 시선이 향하는 곳, 그곳에는 나이가 서른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서 있었다. 천산의 햇빛에 그을린 것인지 구릿빛 피부를 하고 있으나, 얼굴은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미남이었다.
자운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한기 서린 기운,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이건 분명 빙공, 천산설곡에서 나온 이가 분명했다.
“두 분이 너무 강하시니 제가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웃으며 말하는 그의 말에 자운이 피식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지랄은.”
그가 바위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보인다.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천산설곡에서 온 표해라고 합니다. 황룡문의 태상호법 철혈난신 천 대협과… 설 소저 맞으십니까?”
자운이 웃었다.
“설 소저가 아니라 곡주라고 해야 하지 않나?”
자운의 말에 표해의 미간이 꿈틀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자운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간다.
“하긴, 주인을 시험하겠다는 개새끼들이니… 목은 잘 닦고 기다렸겠지? 아마 댕강 잘라줄 거다.”
자운이 말을 하며 두 조각 난 마적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하하하, 당대 황룡문의 태상호법께서는 말을 거칠게 하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정말로 그렇군요.”
도발하는 것이다. 그 도발에 자운이 피식 웃었다.
“내가 내 입으로 지껄이는데 불만있는 새끼는 나오라고 해. 댕강 두 동강, 세 동강을 내어주지. 칼밥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먹여주겠다고.”
자운이 허리춤에 있는 황룡신검을 움켜쥐자 표해가 두 손을 흔들었다.
“하하,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그가 두 손을 흔들고 있을 때, 설혜의 미간이 꿈틀하며 입이 열렸다.
“북결심법(北結心法)…….”
설혜의 말에 자운과 표해가 움찔했다.
“어쩐지 한가락 하게 생겼다 했더니 북결의 당대 주인이었군.”
자운이 삐딱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북결심법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표해는 한순간 움찔했으나 곧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하하, 설마 설마 했는데, 이거 정말로 곡주님이 오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북결을 알아보다니.”
북해를 수호하는 다섯 호법, 그들의 무공을 달리 오호맥(五護脈)이라 한다.
그 오호맥 중 하나가 바로 북결(北結)이었다.
자운이 발을 움직여 그를 걷어찼다.
“북결의 당대 계승자는 말이 많군.”
“캐액.”
표해는 피하려 했으나 자운의 발이 워낙 기기묘묘한 각도에서 공간을 넘어오는지라 그대로 발에 차이고 말았다.
꼴사납게 눈 위를 구르는 표해의 모습을 보고 자운이 이죽거렸다.
“닥치고, 그냥 안내나 하지 그래?”
“황룡문의 태상호법께서는 정말로 안하무…….”
자운이 다시 발을 들었다.
“닥치고 그냥 안내나 하겠습니다.”
표해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곳입니다.”
표해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거대한 절벽이었다. 무슨 돌로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푸른색을 띄고 있는 절벽. 그 위에는 눈이 쌓여 있어 언제 흘러내릴지 모르는 위태로운 구조였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절벽이 전부다. 어딜 봐도 천산설곡이 있을 듯한 모습은 아니었다.
자운이 발을 들었다.
“죽을래?”
자운이 발을 들었을 때, 표해는 이미 자리를 피해 있었다.
“하하하, 정말로 이곳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뭘 어쩌란 거냐? 땅이라도 파고들어 갈까?”
자운의 말에 표해가 웃는다.
“웃지 마라. 정든다.”
“아, 땅을 파고들어 간다는 말이 너무 재미있어서 그랬습니다. 실례. 땅을 파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절벽 너머로 들어가야지요.”
“절벽 너머?”
자운의 말에 표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절벽을 향해서 걸어간다.
“따라오십시오.”
멀리서 보던 것과 같이 완벽한 절벽은 아니었다. 천산설곡의 입구는 매우 특이한 구조로 숨겨져 있었고, 자운이 그것을 보고는 눈을 크게 치켜떴다.
“이야, 천해의 자연 지형이네!”
사실 절벽은 하나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셋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두 개의 절벽 사이에 협곡이 있었고, 나머지 하나의 절벽이 협곡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고 있었다.
그 입구는 사람 네 명 정도가 간신히 들어설 정도로 좁았기 때문에 가까이서 살피지 않는다면 입구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자운이 입구로 들어서며 두리번거렸다.
이 구조라면 한 번에 몇 이상 넘어오지 못할 것이다. 적의 침입에 대비해서 안에서 막아낸다면 상당히 요긴한 요새로 쓰일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협곡으 위가 좀 걱정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지형이었다.
협곡 내부로 들어서자 비로소 천산설곡의 그 모습이 드러난다. 침엽수를 이용해서 지은 건물들이 이리저리 늘어져 있고, 천산설곡의 인물들로 보이는 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장 선두에 서 있는,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는 이가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표해가 그녀가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부곡주님이십니다.”
그 말에 자운이 의문을 표했다.
“부곡주? 그럼 곡주는?”
“곡주의 자리는 설곡 초기부터 지금까지 공석입니다.”
그 말에 자운이 웃었다.
“적어도 주인이 앉을 자리는 비워두었다는 거로군.”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천산설곡의 부곡주가 자운의 앞에 와서 섰다.
그녀가 간단하게 목례만을 취한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원래는 곡주님께는 좀 더 정중하게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 예의에 맞지만, 아직 정통성이 인정되지 않았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설혜가 앞으로 나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름.”
그녀가 목례를 한 채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곡의 부곡주, 조유월이라 합니다.”
설혜가 감정없는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설혜가 익히고 있는 빙궁주의 무공은 그 화후에 따라 감정이 점차 상실됬다.
물론 대성을 하면 돌아오기는 하지만, 설혜는 아직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대성을 목전에 둔 상황,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 극에 달해 있는 상황이었다.
“천풍심법…….”
설혜가 단번에 유월이 익히고 있는 심공의 이름을 알아내었다. 천풍 역시 오호맥(五護脈)의 하나였다. 그의 시선이 다른 설곡의 인물들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천천히 하나하나 오호맥의 전승자들을 찾아내었다.
“한염심공(寒炎神工)…….”
그으 시선이 향한 곳에 있는 노인이 고개를 숙였다.
“청뢰적공(靑雷積工)…….”
이번에는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설혜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 이제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어 보이는 소녀에게서 설혜의 눈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