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자운의 말에 운산과 우천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대사형. 그리고 대사형께 보여 드려야 할 게 있어서…….”운산의 말에 자운이 고개를 갸웃하고, 운산은 자신의 품속에 손을 넣으며 설혜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설혜와 관계가 있는 일인 듯했다.
“뭔데 그래?”
상황을 알지 못하는 자운은 운산을 채근했다. 운산이 꺼내 놓은 것은 서신 한 장이었다.
“천산설곡(天山雪谷)?”
보내온 곳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문파였다.
“천산은 문파가 몇 개 없는 걸로 유명한데, 내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신생 문파인가?”
자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물음에 답한 것은 운산이었다.
“새워진 지 이백 년이 조금 못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자운의 머릿속에 있는 문파가 아니었다. 그가 납득하며 서신을 펼쳤다.
이미 운산과 우천이 서신을 호가인한 듯 끝 부분이 살짝 뜯어져 있었고, 자운이 그 부분을 잡고 펼쳤다.
곧 서신을 다 읽어 내린 자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산설곡이 북해빙궁의 후예들이라고?”
자운의 말에 운산과 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서신을 통해 자신들이 북해빙궁의 직계는 아니지만, 그들의 피를 이은 사람들이 뭉쳐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 이런 서신을 보내온 것은 북해빙궁의 정통 후계자라 알려진 설혜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일전의, 황룡문에서 있었던 일로 인해 설혜라는 존재는 무림에 있어 북해빙궁의 유일한 후계자로 알려졌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천산설곡에서 주장하기를, 마땅히 빙궁의 후계자라면 자신들의 주인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자신들이 확인하기 전까지는 설혜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보이고 있었다.
자운이 피식 웃었다.
“웃기네, 이거.”
자운이 눈앞에 있는 종이를 구겨 버렸다. 그의 손에서 처참하게 구겨지는 종이.
한순간 솟구친 삼매진화에 종이는 순식간에 재가 되어버린다.
자운이 손에서 떨어지는 검은 가루들을 보며 이죽거렸다.
“개가 감이 주인을 고르려고 해? 개 주제에 감히 주인을 시험하려고 하는 거지?”
자운이 씨익 웃으며 설혜를 바라본다.
“가서 썰어버려.”
자운의 말에 설혜가 말없이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맑은 검명이 울리고, 허리춤에서 늘씬하게 잘 빠진 검이 뽑혀져 나온다. 설혜는 검을 뽑아 단칼에 휘둘렀다.
댕겅 하는 소리와 함께 탁자의 한 귀퉁이가 잘려 나간다.
“잘한다. 바로 그렇게 잘라 버려.”
자운이 신이 난 듯 주먹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그러다가 한 순간 몸이 굳어 버린다.
설혜가 자운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자운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하며 두 팔을 휘둘렀다.
“어허, 이러지 말라고. 그래, 다 죽일 필요야 있나. 네 밑에서 두고두고 부려먹으면 되는데. 그러니까 이 칼 좀 치워.”
자운이 손을 흔들며 그렇게 말했으나 설혜는 움직임이 없다. 한참 자운을 바라보던 설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운 오라버니.”
자운이 반색하며 답한다.
“응? 왜? 그것보다 제발 이 칼 좀 다시 넣어줬으면 하는구나.”
하나 자운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같이 가.”
자운이 급히 귀를 후볐다. 마치 잘못 들었다고 말하는 듯한 말투.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뭐라고?”
화악―
설혜의 검이 단번에 자운의 목 바로 앞까지 왔다. 자운이 대경해서 펄쩍 뛰었다.
“같이 가.”
“아니, 내가 왜 같이 가야 하는 건데?”
자운의 물음에 대한 답은 설혜가 아닌 운산 쪽에서 나왔다.
“서신에 보면 황룡문의 태상호법이 설 소저의 신분을 보증한다고 했으니 보증인도 함께 오라고 하던데요?”
자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시발!”
그리고는 서신을 찾아 보았지만 없다.
“대사형이 이미 삼매진화로 불태웠습니다.”
자운이 그 자리에 머리를 부여잡고 앉았다.
“젠장, 빌어먹을…….”
옆에서 설혜가 검을 꺼낸 채 다시 한마디 꺼냈다.
“같이 가.”
제10장
매우 안타깝게도 자운은 설혜와 함께 천산으로 향하게 되었다. 섬서에서 천산까지의 거리는 결코 짧지 않다. 말을 타고 간다 하더라도 그 거리는 보름을 훌쩍 넘길 정도의 거리다.
물론 무림인의 발걸음이 말에 비견되기도 하지만, 자운과 설혜의 걸음은 그보다 훨씬 더 빨랐기 때문에 말을 타고 가는 것보다는 일찍 도착할 것이 분명했다.
자운과 설혜가 천산에 도착한 것은 황룡문을 나서고 딱 삼육 일(三六日)째 되는 날이었다.
자운이 하늘 높게 솟은 천산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이놈의 산은 왜 이리 높은 거야.”
천산은 단 하나의 산이 아니다. 수백 개의 봉우리와 수십 개에 이르는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고, 눈 덮인 천산 꼭대기의 대지에서는 잘못 발을 디딜 경우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자운이 천산을 멀리서 살폈다.
“여기에 천산설곡이 있다는 말이지?”
자운의 말에 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북해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다.
물론 얼음의 대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땅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기운이 북해와 닮아 있었다.
빙공을 익히는 자들에게는 최고의 대지라 할 만한 것이다.
자운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확실히 빙궁의 후인을 자처하는 놈들이라서 그런지 땅 하나는 참 잘 골랐네.”
설혜가 느낀 기운을 자운이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지기라든지 허공을 부유하는 기운이 북해와 닯았음은 자운 역시 익히 느끼고 있었다.
자운이 주변을 휘휘 살피고는 설혜를 바라보며 물었다.
“안내인이 온다고 하지 않았나? 어디 있으면 안내인이 온다고 했지?”
자운의 말에 설혜 역시 고개를 들어 이리저리 휘휘 살피더니 중얼거렸다.
“광릉촌.”
사실 광릉촌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천산이 넓다고는 하나 척박한 대지인 만큼 마을이 많지 않았기에 근처의 봉우리를 몇 개 뒤진 끝에 광릉촌을 찾을 수 있었다.
자운과 설혜가 광릉촌 내부로 들어가자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와 함께 속삭임이 들려온다.
굳이 귀를 기울여 듣지 않더라도 충분히 들리는 수군거림.
이런 오지의 마을에는 사람들이 오는 일이 적다.
기껏해야 소규모의 상단이 일 년에 몇 차례 왕래할 뿐이다.
그 외에 들어오는 외부인이라고는 중원에서 죄를 짓고 들어오는 도망자들. 그들은 무림인이든 그렇지 않든 대체로 흉악했다.
흉악한 범죄자들이 들어와 난리를 쳐 대었으니, 외부인에 대한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또한 얼마 전에 옆 마을에 마적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에 자운 등을 보는 그들의 시선은 더욱 곱지 못했다.
아낙 몇은 아이들을 품속에 숨겨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고, 사내들은 사냥용으로나 쓸 법한 석궁을 만지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자신을 향하는 석궁을 바라본 자운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거이거 별로 시선이 좋지 못한데?”
물론 석궁을 당장에 쏠 것 같지는 않았고, 쏜다고 해도 맞아줄 생각도 전혀 없었지만, 병장기가 자신을 향하고 있는 감각은 과히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설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천천히 광릉촌 내부를 돌아다녔다. 안내인이 나와 있기로 하였는데 발견할 수가 없으니 어디서 잠깐 목이라도 축일 생각이었다. 하나 객잔이 없었다.
본래 광릉촌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적다. 하여 수입이 나지 않는 객잔을 운영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 년에 몇 차례 다녀가는 상단은 수입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던 탓이다.
하여 천산을 방문하는 상단은 대부분 마을 밖에 천막을 쳐 두고 왕래를 하며 거래를 하곤 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객잔은 없는 거 같은데, 그럼 우물가에 자리를 펴고 좀 쉴까?”
자운의 말에 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르래를 돌리자 시원한 물이 올라왔다. 천산의 꼭대기에서 눈이 녹아내려 대지로 스며들고, 스며든 물은 지하로 흘러내린다.
그리고 이렇게 우물을 통해서 솟아나는 것이다.
눈이 녹아내린 물이라 다른 물에 비해 훨씬 시원한 감이 있다. 자운이 물 한 사발을 그대로 쭈욱 들이켜고는 설혜에게 건네었다.
“크으, 시원하다. 너도 한 잔 마시지그래?”
자운의 말에 설혜가 물바가지를 받아 들어 천천히 들이켠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감각이 시원하기 그지없다. 물을 마시던 자운이 천천히 시선을 바닥으로 돌렸다.
자갈이 흔들리고 있다.
땅에서 느껴지는 진동이 발바닥을 통해 척추를 타고 흘렀고, 뇌리로 전해졌다.
뛰어난 감각 덕분에 금방 알 수 있다.
자운이 피식 웃으며 전방을 주시했다.
이 정도로 바닥이 흔들리는데,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뭔가 오는데?”
이 정도의 진동이라면 말 떼다. 그리고 천산에서 말 떼를 몰고 다니는 이들이라면 단 하나밖에 없다.
바로 마적들. 자운이 피식 웃었다.
설혜 역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자운이 털며 진동이 시작되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필 털어도 이런 곳을 터냐.”
자운이 이죽거렸고, 설혜가 무감각하게 그 말을 받았다.
“장사 접어.”
설혜의 말에 자운이 배를 잡고 웃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나 이상하게 웃겼던 것이다.
한참 배를 잡고 웃던 자운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네. 오늘 그 마적들, 장사 접어야겠네.”
천산에 몇 개 되는 마적단 중 꽤 규모가 있는 마적단의 단주 갈무기가 히죽히죽 웃었다.
오늘 또 마을 하나를 털 생각을 하니, 당분간 이어질 풍족할 생활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이다.
과거 무림에서 죄를 짓고 천산으로 도주한 그는 작은 마적단의 단주를 쓰러뜨리고 단주 자리를 꿰어찼다. 나름 한 지방에서 이름을 날릴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적단의 단주를 쓰러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고수가 단주가 되자 규모가 작았던 마적단의 규모가 더 커졌다. 지금은 천산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거대한 마적단이 되어 있었다.
“킬킬킬.”
갈무기가 웃었다.
그는 마적단 안에서는 왕이다.
아니, 마적단의 단주로 생활하는 동안은 천산에서 감히 그를 핍박할 이는 없을 것이다. 마음대로 갈취하고, 가지고 싶으면 가진다.
그것이 여자든 돈이든 상관없다. 돈이라면 죽이고 뺏는다. 여자라면 겁간을 하든 납치를 하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빼앗는다.
그가 어제 저녁 품었던 여자를 생각하며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싫다고 반항하는 게 아주 그만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