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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혈로(1)
천소선은 혈신이 되지 못했다.
천란에서 나온 십만 혈군이 내뿜는 혈기를 흡수해서 비로소 최종적으로 혈신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혈군도 나오지 않았다. 너무 믿기지 않아서 다시 천란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혈군이 나온 곳과 이 세상을 이어주는 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놈이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일반 사람 십만 명을 죽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혈신의 수하들인 혈수들이었다.
제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내공이 고갈되어서 죽게 될 것이다. 천 명이라면 모를까, 자그마치 십만 명이었으니까.
게다가 벽리단은 멀쩡해 보였다. 십만 명의 혈군을 죽인 자의 모습이 어찌 저리 멀쩡해 보일 수가 있단 말인가?
‘젠장!’
세상의 선악을 바꾸는 것도 실패했다. 그 역시 혈군이 세상을 지배해야 가능한 일이었는데, 모든 것이 엉망이 된 것이다.
그녀는 놀람과 당황과 분노가 뒤섞여 혼란 속에 빠져 들었다.
송화린은 벽리단이 모습을 보인 이후, 단 한순간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은 이제 내가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깊은 애정이었다. 순수하게 벽리단을 다시 봐서 너무나 좋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함께 죽을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함께해서 좋은 마음을 넘어서서 함께 죽을 수 있어 기쁜 것이다.
스윽.
양사휘가 송화린의 목에 검을 겨눴다.
“검을 내려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네 여자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머리통이 잘려 죽게 될 거다.”
옆에 있던 송우경이 깜짝 놀랐다.
“이놈! 그 검 내려놓지 못하겠느냐?”
당장에라도 달려들려는 것을 벽도준이 막았다. 송우경의 놀란 마음이야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벽리단이 온 이상 아들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였다.
벽리단이 차분히 말했다.
“당신, 제압당한 여자를 인질로 삼을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니었다는 과거형의 표현에 양사휘는 내심 울컥했다.
“그래, 아니었지. 바로 네놈 때문에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지. 네놈에게 대법을 시행하려고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아느냐? 분명 네놈 마음을 어지럽히는 데 성공했는데, 어떻게 혈신강림을 막은 것이지?”
그 말에 벽도준과 임예화가 깜짝 놀라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내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들이 왜 갑자기 변해버렸는지. 나아가 왜 갑자기 다시 좋아졌는지도 이해했다.
양사휘가 아들의 심성을 파괴하려 했고, 그것이 실패하면서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온 것이라 이해한 것이다.
두 사람이 벽리단을 바라보았다. 눈빛에 더 깊은 이해와 애정이 담겼다.
양사휘가 벽리단을 노려보며 말했다.
“결국 너 때문에 혈신이 현신하지 못하셨다.”
“그게 나 때문인가?”
“그래, 너 때문이다.”
“그럼 왜 그녀를 죽이지 않는 것이지?”
순간 양사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이군.”
“그래, 아직 늦지 않았다. 분명 혈신을 강림시킬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나는 평생을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 살아왔다.”
벽리단은 노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누군가는 자네가 바라보는 쪽 반대편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을 것이네.”
아마도 양사휘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가 추구하려는 이상도, 그 과정도 용서할 수 없지만, 적어도 저 목표를 이루려는 의지만큼은.
“이해한다.”
바로 그때였다.
쉬이이이익!
서걱!
양사휘의 목이 베어지면서 그의 머리통이 바닥을 뒹굴었다. 머리통을 잃은 몸뚱이가 앞으로 쓰러졌다. 앞서 송화린을 목을 잘라 죽이겠다는 협박했는데, 그 모양대로 자신이 죽음을 맞은 것이다.
뒤에서 그를 벤 사람은 바로 천마였다.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천마는 지금까지 송화린을 구하기 위해 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사휘가 격정에 빠져 주위를 살피지 못하던 이때, 단숨에 그를 베어버린 것이다.
천마가 양사휘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새끼야. 네놈의 혈신이 현신하지 못한 것은 너 때문이다. 네가 병신처럼 일처리를 했겠지. 그러니 남 탓하지 마라!”
그때였다. 천소선이 신경질적으로 지풍을 날렸다. 어차피 양사휘는 자신이 죽이려고 했지만, 남이 그를 죽이니 짜증이 솟구친 것이다. 그 대상은 천마가 아니라 송화린이었다. 양사휘가 죽이려고 했던 그녀를 먼저 죽이고, 다음에 천마를 죽이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피이잉!
꽝!
천소선이 날린 지풍을 누군가 막았다.
이번에 나선 사람은 바로 광두였다. 그 역시 주변에서 송화린을 구하기 위해 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맹호단에서 호위를 위해 익힌 은신술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한 순간이었다.
“광단주님, 괜찮으신가요?”
“난 괜찮소.”
울컥.
말과는 달리 광두가 울컥 피를 토해냈다. 다행히 아주 큰 부상은 아니었다.
벽리단은 일부러 대신 공격을 막아주지 않았다. 광두의 실력이라면, 치명상은 피하고 막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광두와 송화린의 관계가 한 단계 더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냥 놔둔 것이다. 물론 자신과의 관계를 위해서도.
벽리단이 광두를 향해 말했다.
“고맙다, 광두야.”
이번만큼은 맹호단주가 아니라 광두라고 친근하게 불렀다.
그러자 광두가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내며 말했다.
“이제야 진정한 칼받이가 된 기분이에요.”
“미안하지만 그건 아니지.”
“네?”
“너는 내 칼받이가 되기로 한 것이잖나?”
“이걸 또 해야 한다고요? 아, 아파요.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은 마세요.”
격 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지만, 벽리단을 향한 광두의 눈빛에는 한없는 존경심과 기쁨이 담겨 있었다.
뒤에 서 있던 천마가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왜 내겐 고맙다고 안 하느냐? 맨 처음 네 여자를 구한 것은 나였는데.”
“친구의 여자를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잖아?”
“허허.”
천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벽리단과 천마는 서로를 마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잘 돌아왔다.”
“그래, 다시 보니 좋네.”
벽리단이 이번에는 백표를 보고 말했다.
“자네도 화린이 구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척 보면 알지. 내상부터 다스리게.”
“네, 맹주님.”
백표가 그제야 안도했다.
송화린이 눈물을 글썽이며 모두에게 말했다.
“감사해요, 제가 뭐라고.”
천마와 광두, 그리고 백표까지 자신을 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벽리단을 향했다. 두 사람이 애정 가득한 눈빛을 주고받자 천소선이 다시 반응했다.
쉬이잉.
또다시 천소선이 기습적으로 지풍을 날렸다. 앞서 날렸던 것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했다.
펑!
하지만 그것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번쩍하는 순간에 이동한 벽리단이 송화린 앞을 막아서며 검을 휘둘러 지풍을 해소한 것이다.
뒤에서 광두가 소리쳤다.
“왜 자꾸 송소저를 노리는 거냐? 너보다 예쁘니까 질투 나냐?”
그 말에 송화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벽리단이 흐뭇하게 웃자 천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모두의 감정교류가 천소선을 계속 자극하고 있었다.
“내가 비록 혈신이 되진 못했지만 너희 같은 것들은 벌레처럼 밟아 죽일 수 있지.”
반신반인의 경지에 오른 그녀였다.
벽리단은 여유롭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실력만큼은 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신이 될 뻔했지? 사실 나도 그래.”
그녀의 눈빛이 굳어졌다.
벽리단의 말을 듣던 모두가 깜짝 놀랐다. 천마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로 짐작할 수 있었다. 벽리단이 마신이 되지 못했음을. 아니, 스스로 포기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 격조 있게 싸워볼까?”
그러면서 벽리단이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천소선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지어졌다.
“너를 죽이고 이것들도 모두 씨를 말려버릴 거다.”
“그래, 그러려면 나부터 죽여야겠지?”
“따라와.”
쉬이익.
천소선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천마와 갈사량이 벽리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래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싸우라는 마음이 표정에 드러났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벽리단이 하늘로 날아올라 갔다.
* * *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맑을 수가 있을까 싶을 날씨였다.
그 창천의 가운데 천소선과 마주서 있었다. 내공이 마르지 않았기에 나는 이제 이 하늘에서 영원히 살 수도 있다. 아, 물론 밥도 먹고 생리현상도 해결해야 하니 그럴 수는 없겠지만.
천소선과의 싸움을 길게 가져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무리 내공이 마르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인간이었다.
반면 천소선은 반신반인의 상태. 내공으로 메꿀 수 없는 실력 차라는 것이 있다. 만약 그녀와 나 사이에 그 차이가 있다면, 나는 이곳에서 죽게 될 것이다.
그녀를 없앨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시 심검이었다.
하지만 나는 심검을 사용하는 것을 망설였다.
내가 망설이는 이유는 암흑신을 상대했을 때와 반대되는 이유였다.
암흑신을 상대할 때는 그에게서 마음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마음이 너무나 명백히 느껴졌다.
한껏 독이 오른 분노한 그녀의 악심이. 그것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져서 지금 당장이라도 그것을 반으로 갈라버릴 수 있었다.
그래서 망설여졌다.
과연 저 마음을 베는 것으로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반신반인에서 신(神)이 아니라 인(人)의 심장만을 베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드는 것이다.
한 사람을 상대할 때, 심검을 여러 번 사용할 수 없었다. 심검은 한 상대에게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다. 대신 반드시 죽일 수 있는 한 수다.
과연 저 천소선의 마음을 베는 것으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을까?
“어느 순간부터 계속 여인의 모습만 보게 되는군. 그 모습이 편한가?”
“같잖은 도발하지 마라.”
이미 언행은 사내의 모습일 때와 같았다.
“도발? 내가 너를 도발하려 했다면 좀 전처럼 점잖게 묻지 않았겠지.”
“개새끼! 죽인다!”
그녀의 분노가 드디어 폭발했다.
내가 먼저 검기를 날렸다.
쉬이이이익!
그러자 동시에 그녀의 몸 주위로 핏빛 안개가 생겨났다. 미세한 핏방울들이었다.
휘류류류류류.
그 핏방울들이 그녀의 몸을 휘감은 것이다. 그야말로 피의 갑옷이었다.
촤아아아아앙!
그녀는 마치 피의 갑옷의 위력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검기를 피하지 않았다.
촤아아아앙!
내 검기가 튕겨나갔다. 정통으로 검기에 맞았지만 그녀는 전혀 충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녀가 지풍을 발출했다. 앞서도 몇 번 날렸던 바로 그 광살풍이었다.
슁.
꽝.
검을 휘둘러 지풍을 막았다. 이제 그녀의 광살풍은 내가 막을 수 있는 공격이었다. 물론 맨몸으로 호신강기에 의지해서 막기에는 부담스러운 공격이었다.
원래도 강력했던 광살풍은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다행한 점은 광살풍은 연속해서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는데…….
바로 그 순간.
슁! 슁! 슁!
세 줄기의 광살풍이 연속해서 날아들었다. 내가 몸을 비틀어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아슬아슬하게 광살풍이 내 몸을 스치며 지나갔다.
“젠장!”
그녀는 이제 광살풍을 연속해서 발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슁! 슁! 슁! 슁! 슁!
다섯 줄기의 광살풍이 다시 날아들었다.
다섯 광살풍 중 두 줄기는 흘리고 나머지 셋은 검을 휘둘러 막았다.
꽝! 꽈앙! 꽝!
손목이 제법 뻐근했다. 처음보다 위력이 더욱 강력해졌다. 피갑옷이 생겨난 후, 그녀의 공격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된 것이다.
그녀가 앞으로 내민 손가락을 접었다.
“재미없군.”
다음 순간, 내 신형이 사라졌다. 난 그녀의 방심을 놓치지 않았다.
나와 싸우면서 재미를 논하다니?
번쩍.
내가 그녀의 등 뒤에서 검을 내리그었다. 마신결의 초식 중 마신암영이 발휘된 것이다.
쉬이익! 키잉!
수라명왕검이 그녀의 피갑옷을 베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촤아악!
그녀가 빠르게 돌아서며 손을 휘둘렀다.
번쩍.
다시 한 번 마신암영을 발휘해서 그녀의 등을 베려는 그 순간.
파악!
어느새 돌아선 그녀의 손이 내 수라명왕검을 막았다. 마신암영의 속도를 따라잡아서 공격을 막은 것이다. 손바닥에도 그녀를 지켜주는 핏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검 날 너머로 보이는 그녀에게 자조적으로 말했다.
“재미를 논할 만하네.”
그녀가 내 검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이젠 진짜 재밌어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