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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맹주 벽리단(1)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세상이 아무리 급박하게 돌아가도 결국 각자가 할 일은 따로 있는 법이다. 내 일은 조직의 결속을 다지는 것과 마신결의 수련이었다.
부모님과 송우경을 또 만났다. 내가 보내 드린 영약으로 모두들 일 갑자의 내공을 늘린 상태였다.
이제 내 행동이나 행보에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내 운명의 흐름이 자신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인정했고, 묵묵히 내게 힘을 실어주려고 하셨다.
소검대의 관휘와 무인들을 만나 오랜만에 무공을 지도해 주었다. 잘못된 자세들을 잡아주고, 그들 수준에 맞는 무학의 이론을 설명해주었다.
운이 좋거나 특히 노력하는 이들은 이번 교육으로 성취를 이룰 것이다.
무공에 관련한 것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감사의 말도 전했다.
내가 벽리단으로 깨어났을 때, 광두를 비롯해서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운명의 흐름 속에서 중심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집안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면? 나의 운명은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고맙다.”
나는 진심으로 그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항상 내게 가르치시려는 수하들을 대하는 수장의 마음과도 닿아있었다.
광두를 만나러 태성상단에 갔을 때, 광두와 수란이 함께 있었다.
“오랜만에 함께 한잔하시죠?”
내 제안에 수란이 깜짝 놀랐다.
“아가씨 빼고요?”
“때론 이렇게 셋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화린이도 이해해 줄 겁니다.”
그렇게 셋이서 술을 마셨다.
이 자리는 어디까지나 광두와, 그의 사랑을 위한 자리였다.
굳이 드러내서 광두를 치켜세우지 않았다. 괜히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였다.
대신 광두에게 솔직한 내 마음을 전했다. 난 그녀를 의식하지 않았다.
“관휘와 소검대에게 고맙다고 하고 오는 길이다. 그 고마움의 백배쯤 고맙다, 광두야.”
“관대주가 섭섭해하겠는데요?”
그러자 수란이 귓속말을 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관대주에게 반대로 말하고 오셨을지도 모르죠.”
광두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는가 싶더니.
“그럴 리가…… 있으시죠. 확실히 있죠. 아마 관대주에게는 나보다 천 배쯤 고맙다고 말하고 왔을 겁니다.”
“하하하. 이렇게 용하니, 돗자리 하나만 깔면 둘이 굶어죽진 않겠구나.”
다시 광두와 수란이 귓속말을 하듯 대화를 나눴다.
“지금 우리 도련님, 구렁이 담 넘으십니다.”
“배우세요, 광무인께서는 너무 진실되셔서 때론 고지식해 보일 때가 있어요. 능수능란한 저런 모습, 배우셔야 해요.”
“네, 배우겠습니다. 저도 구렁이 꼬리라도 꽉 물고 악착같이 함께 담 넘겠습니다.”
내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둘이서 이런 분위기를 낼 줄은 정말 몰랐다. 특히 정말 고지식했던 수란은 광두의 분신처럼 굴고 있었다. 이래서 사랑을 하면 서로 닮는다고 하는 것인가?
이런저런 너스레를 신나게 떨고 난 후 광두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예전에 제게 말씀하셨죠? 강호인이 되는 데 중요한 것은 집안이나 사부가 아니라 인연이라고.”
기억난다. 녀석과 양소방이 있는 동평으로 마차를 타고 가면서 했던 말이었다.
“제가 그때 여쭸지요. 인연이 있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그때 도련님이 그러셨어요. 도련님도 모르신다고.”
“그랬지.”
“도련님.”
“왜 그러느냐?”
“사실 지금도 강호와 인연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제가 이렇게 빗자루 대신 칼을 잡고 있어도 되는 것인지, 여전히 어색하고 낯선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옆에 수란이 있었기에 하기 어려운 말이었을 텐데, 광두는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마음을 밝히고 있었다.
“한데 한 가지는 알 것 같아요. 강호와의 인연은 몰라도 강호를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인연은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도련님을 만나고, 여기 수란 소저를 만나고, 태성상단의 제 수하들, 백대주와 갈군사, 송소저…… 너무 소중한 인연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광두가 일어나더니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도련님. 이 모든 인연이 도련님 덕분에 이뤄진 것입니다. 도련님이 제 인생을 바꿔주셨습니다. 제가 죽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어쩌면 광두는 이 맹세를, 이 이야기를 수란에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사람이니, 선택은 네가 하라고.
문득 광두가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광두가 너무나 좋았지만, 이렇게 멋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광두는 멋진 녀석이다.
“그래, 고맙다. 관대주보다 만 배쯤 고맙다.”
내 농담에도 불구하고 경건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나와 광두를 번갈아 쳐다보던 수란이 귓속말 하듯 나직이 말했다.
“혹시 제가 사귀는 남자도 저런 말에 홀라당 속는 그런 부류인가요?”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광두의 대답에 수란이 짐짓 한숨을 내쉬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럼 할 수 없죠. 제가 더 잘해야겠네요. 다른 사람보다 주군에게 만 배쯤 충성하는 남자와 같이 살려면.”
광두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 것이다. 미래를 약속한 것이다.
좋은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광두야, 잘해라.
* * *
그날 밤, 수련을 위해 몽련비술로 꿈속으로 들어갔다.
지난번에 천마와 마지막 싸웠던 곳에서 깨어났었는데, 이번에는 지난번과 다른 곳에서 깨어났다.
[경치 좋네. 여긴 어디지?]
[선학봉이다.]
[선학봉?]
지난번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참 의외였다.
[왜 이곳에서 깨어난 걸까?]
[네 마음에 이곳이 있었나보지.]
[나중에 여기 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다.]
[과연 그럴 만한 곳이다.]
천마까지 감탄할 경치였다.
[여기를 파괴하는 것은 아깝네.]
물론 꿈속이니 진짜 파괴하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적인 내 소망을 파괴해야만 마신결의 대성을 이룰 수 있는 것인가?
[기왕 부수는 것 시원하게 박살 내버려.]
[자, 시작해 볼까?]
하늘로 날아올랐다. 마신영풍보를 먼저 수련했다.
마신부운으로 하늘 끝까지 날아올랐다. 원래도 높은 곳에서 다시 날아오르니, 정말이지 하늘 끝까지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숨이 터질 것 같아 더 올라갈 수 없는 곳까지 올라갔다.
저 아래로 구름이 흘렀다.
쉬이이이이익.
이번에는 마신비행으로 하늘을 날아가다가 마신지로를 사용했다. 번쩍하는 순간 저 멀리 내가 지목한 곳까지 이동했다. 이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를 이동했다.
이번에 천왕군과의 싸움 때문이었을까? 내공을 모두 소진했을 때, 마신영풍보가 팔 성에 도달했다.
마신영풍보의 수련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구 성에 이른 마신결이 이번 천왕군과의 싸움을 거치면서 강제로 마신영풍보를 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이 역시 새로운 경험이었다.
어쨌든 마신영풍보가 팔 성으로 올라서면서 내 무공실력도 다시 발전했다. 마신결의 대성에 한 걸음 더 다가선 것이다.
[축하한다.]
[고맙다.]
[넌 정말 끝없이 성장하는구나.]
[당신 덕분이다.]
[고마움을 아는 것을 보니 정신적으로도 성장하고 있고.]
[하하하.]
운기조식으로 내공을 다 채운 후 추혼수라검술과 선학비술을 연마했다.
지난번에도 확실히 느꼈지만, 내 무학의 경지가 오르면서 두 무공의 수준도 함께 상승한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정과 마, 그리고 둘을 이어주는 정마지간의 무공.
물론 셋 중 가장 높은 봉우리는 마신결이다. 그건 부정할 수가 없다. 그 봉우리의 양옆 조금 아래에 추혼수라검술과 선학비술이란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는 그런 형국이다.
두 무공을 마친 후 끝으로 마신결의 검술을 연마했다.
일초식부터 오초식을 차례대로 펼친 다음, 다시 한 번 육초식 마검혈우를 발출했다.
쏴아아아아아아악!
이번에도 그것을 축소해서 천왕군을 상대할 때처럼 발휘했다.
집중력의 차이였을까? 그때처럼 깔끔하게 내리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제대로 마검혈우를 펼치려다가 문득 드는 생각.
[이게 의미가 있을까?]
[무슨 뜻이야?]
[그 싸움처럼 조절해서 수련을 할 필요가 있을까? 천왕군과의 싸움에서 마검혈우를 축소한 것은 기존의 틀을 깬 것이잖아?]
[그렇지.]
[한데 그런 방식으로 평소에 사용하려고 수련하는 것은 다시 그 자유를 틀에 집어넣는 것 아닐까?]
[음. 일리는 있는데.]
[그런데?]
[혹시 어려워서 수련하기 싫은 핑계는 아닌가?]
[하하하.]
[웃으니까 수상한데.]
[아니야. 그럴 리가 있나?]
또 설령 그러면 어떠할까? 그냥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겠지.
쉬이이이익.
마신부운으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당분간은 수련에 집중할 생각이다. 천왕군과의 싸움이 분명 무학의 증진에 기여했다.
하지만 앞으로 그와 같은 고수를 다시 만난다는 보장이 없다. 거의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망할 필요 없다.
그런 대단한 싸움이나 기연이 아니라도, 그냥 수련으로 대성에 이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매일 수련하다보면 그날의 수련이 대성에 이르는 마지막 한 걸음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니까. 세상에 정해진 것은 없지 않겠나?
* * *
“으윽! 그만!”
마철군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단전에 손을 대고 있던 노인이 뒤로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노인은 바로 원로원의 고수인 서복(徐福)이었다. 혈도를 제압하고 푸는 데 무림맹 내에서 일가견이 있다고 알려진 그였음에도, 마철군에게 가해진 제압은 풀 수가 없었다.
“제 내공으로는 도저히 풀 수가 없습니다. 무능한 저를 벌해주시옵소서.”
“젠장! 그대라면 이 정도는 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빌어먹을!”
마철군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자 서복 역시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필 마철군에게 그 표정을 들켰다.
버럭 한마디 하려다가 마철군이 참았다. 이런 일로 문제를 만들었다간 그렇잖아도 나쁜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들 것이다.
“고생하셨소. 그만 물러가시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정중히 인사를 한 후에 서복이 돌아서 임시 맹주전을 나왔다.
그에게 비밀을 먼저 안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묘한 미소가 번져나가고 있었다.
‘보아하니 마맹주의 단전을 되돌리기는 영영 틀렸다. 그렇다면?’
새로운 맹주가 들어서게 되는 것은 결국 기정사실이 될 것이다. 지금도 하루가 다르게 마철군이 맹주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여론이 커져가고 있었다.
‘기회군.’
이럴 때 재빨리 맹주가 될 만한 누군가를 지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가 새 맹주가 되면, 비로소 권력의 떡고물을 주워 먹을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마철군이 이를 악물었다.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 나가는 뒷모습이 너무나 얄미웠다.
‘방법을 찾아야 해.’
맹주자리를 내놓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봉쇄당한 단전을 영원히 풀지 못할 수도 있었다.
맹주 상태에서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라면, 맹주마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때 그곳으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정말 천왕군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온갖 병신 짓은 혼자 다 하고 있구나.”
들어선 사람은 바로 마령인이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마철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정말 아쉬웠나보네. 욕이 나와도 몇 번은 나왔을 상황인데?”
“헛소리 말고 앉아라.”
“내가 앉을 자리가 있나? 자기 자리도 못 챙기는 사람이 남 자리는 챙겨줄 수 있을까?”
“내 자린 절대 못 내놓는다. 네가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부탁이야? 명령이야?”
“네 마음대로 생각해.”
마령인이 마철군 앞에 마주앉았다. 마령인을 좋아하진 않지만, 적어도 저 여유로운 모습만은 가끔 부러울 때가 있다.
단전이 제압당한 것은 자신이나 마령인이나 마찬가지인데, 놈은 한결 여유로워 보인다. 자신보다 나이도 어린놈인데. 마령인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반드시 마령인이 필요하다. 영악한 녀석이니 이미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보자마자 날아드는 빈정거림을 참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고.
“어떻게 해야 하지?”
마철군의 물음에 준비된 대답이 나왔다.
“우선 내공부터 되찾아야지. 힘이 없으니까, 놈들이 개무시 하잖아? 책임을 지고 내려오라고? 만약 형이 힘을 잃지 않았어도 저딴 말을 할 수 있을까?”
못 하겠지. 당연히 못 할 것이다. 그래서 더 못 내려간다.
“내공을 어떻게 찾지?”
“원로원 늙은이마저 못 푼다면 방법은 하나잖아? 천왕군을 죽인 놈을 찾아야지.”
어떻게라고 또다시 물으려다가 마철군은 무기력한 자신을 느끼며 ‘젠장’이란 말로 대신해서 삼켰다.
“놈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천왕군을 죽인 것은 아닐 거야.”
“그렇겠지.”
“천왕군쯤 되는 자를 상대하려면 분명 조직을 갖추고 있을 거야. 당연히 상당한 정보망도 있을 거고. 큰 정보조직에 흘려. 무림맹주가 꼭 만나고 싶어 한다고. 분명 놈의 귀에 들어갈 거야.”
“그가 만나줄까?”
“놈을 움직일 만한 조건을 걸어야겠지.”
어떻게란 말이 또다시 나오기 전에 마령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건은 직접 생각해. 설마 밥상을 차려줬는데 밥까지 떠 먹여 달라는 것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