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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중비화(2)
송화린과 벽리단은 말없이 걸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벽리단이 진심으로 섭섭해하고 있다는 것을.
녀석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한창 혈기왕성한 녀석인데 저 풋풋하고 예쁜 송화린과 이별하고 싶겠는가?
그렇게 한참을 뒤따라가다 보니 우린 대숲을 지나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오는 아름다운 대숲이었다.
아! 여기는?
내가 깨어난 적이 있었던 대숲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깨어났던 여러 장소는 벽리단과 송화린이 주로 다녔던 곳인 모양이다.
과연 내 예상대로였다. 대숲을 빠져나가 그들이 도착한 곳은 폭포가 떨어지는 물가였다. 이곳 역시 내가 깨어난 적이 있었던 곳.
지금까지 아무렇게나 마구 꾼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풍! 풍! 풍! 퐁!
벽리단이 납작한 돌멩이를 던져 물수제비를 만들었다.
송화린은 다소 미안하고 안타까운 얼굴로 벽리단의 눈치를 보았다.
“안 가면 안 돼? 무공은 아버지에게 배우면 되잖아? 송장주님도 무공이 고강하시잖아?”
“아버지는 내가 당신보다 더 뛰어난 무인이 되기를 바라셔. 너도 알잖아? 내가 우리 집안에서 아들 역할을 해야 하는 것.”
“나중에 내가 하면 되잖아? 가지 마! 가지 말라고!”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두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벽리단에게 이런 과거의 단면이 있었다는 사실에 내 가슴이 아릿해왔다.
문득 오래전 광두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왜 내게 이렇게 잘해주느냐? 이전의 나는 쓰레기 같은 놈이었는데.”
“그 이전도 있었으니까요.”
“뭐?”
“어려서는 좋은 사람이었거든요.”
이전부터 이 무렵까지의 벽리단이었을 것이다. 지금 보이는 벽리단은 내가 깨어났을 때의 그 개망나니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대체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단아, 너무 섭섭해하지 마. 해마다 집에 올 거야. 그때 보면 되잖아?”
지금 송화린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무공수련을 마칠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남자 수련생들도 있겠지?”
“……있겠지.”
“있는 정도가 아니라 대부분이 남자들이겠지?”
“걱정 마. 다른 애들에겐 눈길도 안 줄 테니까. 우린 뱃속에서부터 혼약을 맺은 사이잖아?”
“젠장! 넌 그렇겠지만 딴 놈들은 안 그럴 거라고!”
풍덩!
벽리단이 돌멩이를 물에다 던졌다. 물이 튀어서 얼굴과 옷을 적셨다.
어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벽리단의 불안과 상심을 전적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벽리단은 이번 일을 자신이 어찌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 잊지 마.”
벽리단의 안타까운 눈동자를 보는 순간, 새소리가 들려왔다.
쪼로로롱, 쪼로로롱.
침상에서 눈을 떴다.
내가 의도해서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몽련비술을 익힌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보통의 경우, 내가 깨고 싶을 때 깨어났었으니까.
아마 다음 꿈에서 다음 이야기를 볼 수 있는 모양이었다.
벽리단을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쨌든 이야기가 끊기는 것을 보니, 다음 꿈은 폭포에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난 언젠가부터 다시 보여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과연 몽련비술의 구결을 외웠지만 잠이 들지 않았다. 나중에 밤에 다시 시도해봐야 할 것 같았다.
난 오랜만에 침상에서 내려왔다.
* * *
천소선이 홀로 객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마철군에게 들렀다 오는 길이었다. 아직 돈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멍청한! 그것 하나 준비도 못 하고!’
이렇게 시간만 보내다간 정말이지 천왕군의 말처럼 몸이라도 팔아야 할 모양이다.
시간이 필요했다.
아직 천왕군의 약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었고, 사악해지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앞자리에 처음 보는 젊은 사내가 앉았다. 다른 빈자리도 많이 있었기에 자리가 없어서 앉은 것도 아니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허락도 구하지 않고 이렇게 앉으면 안 될 일이었고.
‘뭐지? 이놈은?’
그렇잖아도 화가 난 상황이었기에 일장에 때려죽이고 싶은 살심이 치밀었다.
그때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거짓말처럼 치밀던 살심이 흩어지며 사라졌다. 상대의 기도가 자신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도의 상대라면?
천소선이 한 사람을 떠올리며 흠칫 놀랐다.
“설마 당신은?”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군.”
천소선은 나를 알아보았다.
그와는, 아니 이제 그녀라고 불러야겠지. 그녀와는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지만 그때마다 나는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진면목을 드러낸 것이다.
“할아버지는 당신이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셨지.”
천소선은 지금도 내가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있는 줄 오해하고 있었다. 이렇게 젊은 상대일 줄은 생각지 못할 테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암흑상계에 내 정체가 밝혀진 데다가, 지켜야 할 사람들은 내 보호하에 있었으니까.
오히려 천소선은 자신의 정체가 밝혀진 것에 신경이 곤두섰다.
“어떻게 나인 줄 알았지?”
“강호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지.”
천소선이 붉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적어도 이 비밀만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비밀이었을 것이다.
지풍을 쏴서 죽이고 싶겠지만 감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난 그녀가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었으니까. 손을 내밀면 닿을 거리에 있었지만 그녀의 광살풍은 피할 수 있었다.
“왜 나를 찾아왔지?”
“나와 손잡고 천왕군을 죽이자.”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천소선이 깜짝 놀랐다.
“지금 나와 함께 우리 할아버지를 죽이자는 말을 하는 건가?”
“당신 할아버지? 누가?”
나는 천왕군이 완전히 변해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소선이 지금 여인의 모습으로 내 앞에 앉아 있는 것도 그것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세상의 어느 할아버지가 손자의 가장 아픈 상처를 이렇게 드러내놓게 하겠는가?
그녀는 어떻게든 천왕군을 죽이려거나 혹은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을 것이다.
“마철군에게 부탁한 돈은 포기해야 할 거다.”
“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사실까지 내가 알고 있다는 것에 크게 놀란 것이다.
“생각할 시간을 하루 주지. 내일 같은 시간에 이 자리에서 보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소선이 등 뒤에서 내게 물었다.
“그를 죽이고 나면 나를 죽일 텐데, 왜 내가 당신을 도와야 하지?”
내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노력을 해야겠지. 내가 당신을 죽이지 않을 만한 이유를 보여줘. 살기 위해선 그 정도 노력은 해야 하잖아?”
* * *
그날 밤, 나는 다시 몽련비술로 꿈속 세상으로 들어갔다.
쪼로롱, 쪼로로로롱.
잠에서 깬 곳은 주로 깨어났던 그 들판이었다. 과연 내 예상대로였다. 꿈속의 내용은 폭포의 그 장면에서 이어지지 않았다. 아마 그때 꿈에서 강제로 깬 것도, 이렇게 보여줘야 할 순간들이 시간 차를 두고 있어서인 것이다.
들판에서 벽리단은 무공수련을 하고 있었다. 왜 이곳에서 주로 깨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벽리단이 여길 가장 자주 왔던 것이다.
쉭쉭쉭!
벽리단이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가전무공인 백월검술이었다. 송화린이 무공수련을 떠나고 한참이 지난 시기처럼 보였다.
송화린이 강해져서 돌아올 테니, 자신도 강해지겠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때 그곳으로 누군가 달려왔다.
누군지 확인한 내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도련님!”
숨이 턱에 찰 정도로 달려온 녀석은 바로 광두였다. 지금보다 사뭇 앳된 얼굴의 그였다.
“무슨 일이냐? 화린이에게 서찰이 왔느냐?”
“아뇨.”
실망하는 벽리단에게 광두가 말했다.
“지금 여기서 수련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지금 무림맹주님께서 산동에 내려오셨어요.”
“무림맹주님이? 여기 산동에?”
“네. 그것도 여기 곡부지부에 오신대요. 우리도 가서 구경해요. 지금 마을이 난리가 났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무림맹주라면 바로 나였다.
설마 내가 벽리단과 인연이 있었던 것인가?
“가자, 광두야.”
“네!”
두 사람이 저잣거리를 향해 내달렸다.
나도 두 사람을 따라 달려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무림맹 곡부지부였다.
당시에 내가 왜 이곳 곡부지부에 왔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산동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 들렀던 모양이다.
이미 곡부지부 주위에는 나를 보기 위해 구경나온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무림맹주님을 뵙게 되다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구나.”
“맹주님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군.”
“에끼, 이 사람아. 귀하신 분의 손을 어찌 잡을 생각을 하시나. 꿈 깨시게.”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지.”
“우리 맹주님이 안 계셨다면 이 세상이 암흑천지였을 것이네.”
“암, 그렇지. 우리 맹주님은 하늘이 내리신 분이시지.”
옆에서 듣고 있기 부끄러울 정도로 나를 치켜세웠다.
이때는 육십 대의 나이로 이미 강호를 안정시킨 후였다. 천하제일인으로 이름을 날렸고, 사파와 마교를 궤멸시키고 강호일통을 이룬 후였다. 거기에 정파의 반대파들까지 모두 정리한 후, 한창 강호를 위해 힘쓸 때였다.
난 바르고 선한 사람들을 위한 맹주였다. 그들의 희망이었다.
“여기선 잘 안 보인다. 광두야, 저기로 가보자.”
벽리단이 지부 건너편에 있는 객잔의 난간으로 달려갔다. 이미 그곳에 많이들 자리하고 있었는데 마침 한 사람이 앉을 자리가 났다.
“도련님, 어서 올라가세요.”
벽리단이 난간으로 올라가 앉았다.
“전 저 앞에 가서 볼게요. 이따 봐요.”
광두가 사람들 틈바구니를 파고들어갔다.
그때 저 앞으로 환호성이 들려왔다.
“와아아아아아! 맹주님이 오신다!”
몇 대의 마차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지부 앞에 멈춰선 마차에서 내가 내렸다. 과거의 내 모습을 지켜보니 기분이 묘했다.
내가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한차례 흔들어준 후에 지부 건물로 들어갔다.
“맹주님!”
“와아아아아아!”
이렇게들 좋아하는데 좀 더 반갑게 만나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사람들 손이라도 한 번씩 잡아주고 들어가지.
물론 당시에 호위상의 이유로 맹호단에서 절대 그런 행동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보니 후회가 되었다. 좀 더 친근한 맹주가 되었어도 좋았을 것 같았다.
이번 생에 여러 번 느꼈다. 지나 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당시에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을.
“아, 정말 끝내준다.”
벽리단의 두 눈에 존경심이 가득했다.
그때 벽리단의 옆에 있던 사내가 말했다.
“소형제. 겉으로 멋져 보여도 속은 다를 수 있다네.”
벽리단이 돌아보니 한 사내가 자신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주 잘생기고 매력적이었는데 나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무슨 뜻입니까? 천맹주님께서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천맹주님은 절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오호, 천맹주에 대한 믿음이 크군. 믿음이 크면 실망도 큰 법인데?”
“아무리 그리 말씀하셔도 저는 천맹주님을 존경합니다.”
나는 내심 크게 놀랐다. 벽리단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 몰랐던 것이다.
“존경이라? 그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사내는 살살 벽리단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냥 말상대를 하지 말아버리면 그만인데, 어린 벽리단은 그에게 말려들고 있었다.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니셨고 강호일통을 이루셨잖습니까? 무인이라면 모두 맹주님을 존경할 겁니다. 맹주님처럼 되는 것이 제 꿈입니다.”
“소형제. 그 꿈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네.”
“왜 그런 부정적인 말을 하십니까?”
“꿈은 원래 이뤄지지 않는 법이니까. 이뤄진다면 그걸 꿈이라 부르겠는가?”
사내의 말에 벽리단이 뭐라 대답을 못했다.
“게다가 천하제일인이 되고 맹주가 된다고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네.”
“천하제일인이 되고 무림맹주가 되었는데도 행복하지 않다고요?”
항의하듯 반문하는 벽리단에게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세상 어디에도 쉬운 일은 없지 않나? 사는 건 고행이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벽리단이 묘한 눈빛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특이한 사람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소형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통성명이나 할까?”
사내가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난 잠에서 깨어났다. 귓가에서 새소리가 멀어져갔다.
“망할 새끼!”
나는 알 수 있었다.
저 만남에서부터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우연히 벽리단의 몸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