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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제일부자(3)
“공평하게 제비를 뽑읍시다.”
그렇다고 상인들끼리 치고받고 싸울 수도 없는 일이고, 주판을 두고 셈 계산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좋소이다.”
“나도 좋소.”
두 사람이 암흑대상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암흑이상이 두 장의 종이를 가져와서 한 장에는 표시를 하고 나머지는 표시를 하지 않고 접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나머지 네 사람은 내심 초조해졌다.
그들은 절대 재산의 반을 내놓을 생각이 없던 이들이었다. 죽으면 죽었지 재산을 내놓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절박하게 제비뽑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 내심 초조해졌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마치 절벽을 향해 내달리는 마차에서 하나둘씩 뛰어내리고 있는데, 혼자 고집을 부리고 있는 옹고집 노인네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재산의 반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공통된 마음은 이것이었다.
‘어떻게 모은 돈인데.’
온갖 짓을 다해서 번 돈이다. 이 돈을 벌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했는지, 그 과정에서 흘린 피는 눈물과 함께 강물이 되어 흘러갈 정도였다.
그런데 반이나 내어놓으라고? 그야말로 어림없는 소리였다.
“아! 살았다!”
“젠장!”
제비뽑기에서 이긴 사람은 십상이었다. 환호하는 그를 보며 구상이 버럭 소리쳤다.
“다섯 명만 뽑겠다는 것은 우릴 놈에게 제물로 바치고 그대들만 살 생각을 하는 것 아니오?”
제물이란 말에 순식간에 장내가 얼어붙었다.
암흑대상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제물이라니? 제물이라니! 나를 어떻게 보고 하는 말인가?”
준엄하게 꾸짖듯 말했지만, 일부러 제물이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
“그렇다면 숫자 제한을 두지 말고 원하는 사람은 모두 받아들이시오.”
“그건 불가능하네. 다섯도 내가 그대들을 위해 사정사정을 해서 얻어낸 것이란 말이네.”
“그를 더 설득하시오.”
“그럴 수 없네. 이보시게. 정말 내가 그대들을 배신이라도 하리라 여기시는가?”
“대상은 그러지 않을지 몰라도…….”
구상의 시선이 옆에 있는 다른 네 명에게로 향했다.
배신을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네 명이나 더 있었던 것이다.
순간 침묵이 흘렀다. 제물이란 말에서 시작된 의심이 모두를 짓눌렀다. 자연스럽게 이어진 하나의 가정.
‘만약 나라면?’
선택되지 않은 다섯 명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이 반대 입장이라면 과연 배신하지 않을까? 상대를 바치고 내가 살 수 있다면? 과연 그렇다면 의리를 지킬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혼자라면 배신이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다섯이라면 죄책감은 오분지 일이 될 것이다.
남은 네 명은 이제야 깨달았다. 이것이 공평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또 하나의 선택지가 저쪽에 있는 것이다. 이쪽을 팔아넘기고 자신들이 살아남는다는 선택이.
이쪽에서 먼저 저쪽을 팔면 되지 않느냐고?
안 된다. 저쪽에는 그들을 지켜줄 벽리단이 있었으니까.
네 사람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들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일어났다.
“나도 참가하겠소!”
“우리도 반을 내겠소.”
“우릴 버리지 마시오!”
“공생공사합시다!”
그들이 앞다투어 소리쳤다.
암흑대상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누구도 그 얼굴 뒤에 숨겨진 득의만면한 웃음을 보진 못했다.
암흑대상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네. 그대들과의 인연을 생각해서 내 다시 그에게 부탁해보지.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무릎이라도 꿇어서 반드시 모두를 지켜주게끔 하겠네.”
대상 주위로 네 사람이 모여들었다.
“고맙소이다.”
“우린 대상만 믿겠소.”
“부탁합니다.”
“부디 우릴 살려주시오!”
지켜보던 암흑이상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고맙다는 소릴 들으며 그들을 팔아넘기고 있는 암흑대상이었다. 그가 얼마나 치밀하고 무서운 사람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 * *
“암흑대상이 그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백표의 보고에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해내는군.”
“욕심들이 많아서 설득에 시간이 많이 걸릴 줄 알았는데, 뜻밖에 쉽게 해내는군요.”
“지켜야 할 것이 많을수록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할 때가 있지.”
암흑대상은 절박한 상황이었다. 암흑이상과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썼을 것이다.
어차피 암흑대상이 실패하더라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난 함께 왔던 그들의 수하들을 모두 처치하고, 그들 역시 고문으로 쥐어짜낼 생각이었으니까.
어차피 그들 모두를 응징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암흑상계를 만들어서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재한 자들이었다. 이 일의 마지막에는 하나도 남김없이 빈털터리로 만든 작정이다.
하지만 이렇게 자발적으로 돈을 내어놓는다면 그 시기가 훨씬 단축될 것이다. 여덟 명의 재산을 동시에 처분할 수 있었으니까.
그 액수가 얼마가 될지는 작업이 끝나봐야 알 수 있었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축하드립니다. 중원제일의, 아니 고금제일의 거부가 되셨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되었군.”
전생에는 평생 돈과는 인연이 없이 살았다. 이번 생 역시 돈이 목적은 아니었다. 막강한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돈을 모으다보니 어마어마한 부를 쌓게 된 것이다.
“얼마를 가진 부자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돈으로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겠지.”
“그것만큼은 가장 걱정하지 않아도 될 분 아니십니까?”
“하하, 모를 일이지. 자넨 성왕보에게 가서 십상이 데려온 무인들 중에 살려야 할 자와 죽여야 할 자를 알아오게.”
“네,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모두가 바빠질 것이다. 갈사량과 공수찬은 그들의 재산을 인수해야 했고, 백표와 흑표대는 그 일을 도우며 두 사람을 호위해야 할 것이다.
백표가 떠나자 천마가 말했다.
[암, 저놈은 모르지. 네놈 속마음이 얼마나 음탕하고 시커먼지.]
[그건 당신이 들어있어서겠지.]
[후후, 과연 그럴까?]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축하주나 한잔하자.]
[아! 술 좋지.]
술을 준비한 후 천기심환공으로 그를 불러냈다.
나를 보자마자 그가 신난 얼굴로 말했다.
[자, 이제 엄청나게 벌었으니 즐기러 가자! 강호의 모든 미녀들 다 만나는 거다! 송소저는 버려! 막 놀자! 즐기라고!]
[욕구불만의 화신이 다시 깨어나셨군.]
[즐거움의 길잡이겠지.]
[이깟 돈이 뭐라고?]
[이놈아! 돈 욕심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 한 개인이 수십억 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강호가 생긴 이래 네가 처음일걸?]
[그런가?]
[무슨 반응이 이리 미지근해?]
[사실 당신이나 나나 돈 잘 모르잖아? 그냥 맹주고 천마니 풍족한 생활은 했지만, 한 번이라도 돈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 없잖아?]
[하긴. 그건 그렇지.]
[수하들에게 투자도 하고, 좋은 일도 하고, 네 말대로 즐기는 데도 쓰고, 뭐 쓸 일이야 많겠지.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 자, 한잔 받아.]
[으하하하! 고금제일부자의 술 한번 받아보자.]
늦게까지 천마와 함께 실컷 술을 마셨다. 천마의 아들 일에서 시작한 이번 일은 그야말로 엄청난 결실을 맺으면서 마무리되고 있었다.
* * *
섬서에서 일처리는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나는 그들의 수하들을 모두 흩어버렸다. 성왕보를 통해 죽여야 할 자들을 구분했다.
비록 명령이라고는 하지만 살인을 밥 먹듯 했던 악질적인 자들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베어버렸다.
죽을 정도의 죄를 짓지 않은 자들은 그 자리에서 흩어버렸다. 굳이 힘으로 협박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너희들의 주인이 더 이상 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조용히 그곳을 모두 떠났다. 충성심이 아니라 철저히 돈으로 계약된 무인들이었던 것이다.
여덟 명의 암흑십상의 재산이 속속 내게로 흡수되었다. 앞서 암흑이상과 대상의 경험을 있었기에, 아주 능숙하고 빠르게 일처리가 진행되었다.
배신을 해서 천왕군에게 붙었다고 알려진 성왕보가 뒤에서 모르게 일을 도왔기에, 훨씬 일처리는 쉬웠다.
그렇게 여덟 명 재산의 반을 흡수했다.
그들 각각의 재산은 오억 냥에서 칠억 냥 사이였다. 그렇게 얻은 재산이 이십사억 냥이었다. 원래 내가 가진 돈과 합치니 사십일억 냥이 되었다.
공수찬이 와서 돈이 어디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장부를 주었다.
내 이름으로 중원삼대전장에 각 삼억 냥씩 구억 냥, 중소규모 전장에 분산해서 일억 냥, 그렇게 십억 냥을 넣어두었다.
나머지는 모두 태성상단을 중심으로 중원의 수십여 개의 상단에 분산투자 되었다.
이들의 돈을 빼내오는 것은 비단 내 돈이 늘어나는 이득만이 아니었다. 바로 천왕군이 새로운 뭔가를 이루는 데 최대한 시간을 늦추는 효과까지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슬슬 돌아갑시다.”
“저들은요?”
“데리고 가서 우리가 관리를 해야지요. 나중에 골수까지 빨아먹을 것이오.”
마지막 한 푼이 남을 때까지 모든 재산을 다 뺏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암흑대상을 이용해서 천왕군을 상대해야 했으니까.
* * *
돌아가기 전에 천마의 아들에게 들렀다.
백성원은 병상에서 일어나 회복을 마친 상태였다.
“도움을 많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한데 천양 백천사는 어찌 아신 겁니까?”
천마가 백성원의 모친에게 남겼던 지명이었다. 어려울 때면 그곳에 연락을 남기라는 유일한 끈. 아들을 통해 내가 그곳 지명을 말했다는 것을 전해들은 것이다.
“저 역시 귀하신 분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천마의 수하로 나를 알렸다.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그분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역시 그러셨군요.”
백성원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혈천신교가 멸망한 것이야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마지막 싸움에서 천마가 죽은 것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래도 혹시나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어딘가에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고.”
백성원이 속마음에 숨겨둔 것을 꺼내놓았다.
“솔직히 어려서는 잘 몰랐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를 만나러 오던 아버지가 무서웠습니다. 정말 무뚝뚝하셨거든요.”
“성격 때문에 표현이 그러했을 뿐, 그분께서는 백무인을 정말 아끼셨을 겁니다.”
“네, 제가 아들을 키워보니 어떤 마음이셨는지 알겠더군요.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지만.”
그가 나를 보며 옅은 웃음을 지었다. 지나와야 아는 것들이 어디 부모자식일 뿐이겠는가마는, 그래도 가장 깊게 가슴에 사무치는 것이 바로 그 감정일 것이다.
“그분께서 남기신 것입니다.”
내가 봉투를 내밀었다. 천마와 의논해서 정한 액수였다. 아주 많은 돈이 아니었다. 병상에 눕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의 돈. 거기에 몇 년간 편히 쉴 수 있을 정도의 돈이 더해졌다. 갑자기 너무 많은 돈이 그의 삶을 뒤흔들 수 있다는 내 조언을 천마가 받아들인 것이다.
나는 대신 다른 것을 그에게 선물로 주었다.
“섬서 천양 백천사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앞으로 살면서 극복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곳으로 기별해주십시오. 아버님의 유지입니다.”
“아, 아버지께서는 끝까지 저희를 버리지 않으셨군요.”
백성원이 결국 한줄기 눈물을 흘렸다.
나는 거기에 더해 이곳에 삼안각의 특별지부와 고수를 배치했다. 이들의 삶에 절대 개입하지 말면서 멀리서 지켜주란 명령을 내렸다.
그들 가족과 작별을 고하고 집을 나서자 천마가 말했다.
[고맙다.]
나는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지만 앞서 아들이 울었을 때 어쩌면 천마 역시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긴.]
천마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까지 보니 한편으론 부러웠고 다른 한편으론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과연 난 자식을 잘 키울 수 있을까?
[부러워도 하지 마.]
[뭘 하지 마?]
[혼인. 그냥 혼자 자유롭게 살아.]
[해본 자의 여유인가?]
[당한 자의 충고다.]
[하하하. 당신이 뭘 그리 당했다고.]
[몰라서 그렇지 신경 많이 쓰인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가족, 쉽지 않다.]
그래, 나도 잘 안다. 전생에 혼자 산 이유 중 그 이유도 컸으니까.
[화린이는?]
[비무초친(比武招親)을 열면 사내놈들 호북에서 섬서까지 줄 설 거다. 똑똑해서 너보다 백배는 더 잘살 거다. 그러니 그녀는 걱정 마라.]
[하하하.]
[잠깐의 기쁨을 위해서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해야해. 내 말 잊지 마!]
농담 반, 진담 반이란 것 잘 안다. 오늘이라면 혼인하라는 편에서 농담을 할 것 같은데, 그는 반대쪽에 서 있다.
나는 그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너무 좋은 것이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저 아이들 옆에서 함께 살고 싶을 정도로. 이율배반적이지만, 그래서 말리고 싶은. 때론 너무 좋으면, 달아나고 싶기도 한 법이니까.
땅을 박차며 마신부운으로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처리할 놈부터 처리하고, 그다음에 생각하자.]
[좋지! 싹 다 쳐 죽여!]
쉬이이이이이이익.
곧이어 마신비행으로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며 하늘을 날았다.
향하는 곳은 바로 무림맹이 있는 호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