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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혈상인 (4)
한 여인이 욕조에 몸을 담근 채 목욕을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몸매가 드러나는 장난스런 물장구는 그녀의 귀여운 얼굴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누군가 이 장면을 보았다면 소름끼치는 모습에 심장이 얼어붙었을 것이다.
바로 욕조에 가득 찬 것은 물이 아니라 피였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피비린내에 견디지 못할 것인데, 여인은 태연히 몸을 담그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치 온천에 몸을 담근 사람처럼, 온몸의 피곤이 풀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인은 바로 매혈상인이었다.
그녀가 핏물 위로 손을 한번 내저었다.
차라랑!
그러자 핏물에 시혼대법에서 나타난 얼굴이 떠올랐다. 욕조에 담긴 핏물, 그 안의 미녀, 그리고 그 핏물 위에 떠오른 얼굴. 이 모든 것들은 더없이 기괴하고 무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너는 누구냐?"
나직이 물었지만, 핏물 위의 얼굴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녀가 다시 손을 한번 내저었다. 그러자 얼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때였다. 욕조의 핏물이 부글거리더니 큰 핏물방울이 하나 부풀어 올랐다.
그 핏물방울이 잿빛 눈동자를 지녔던 젊은 수하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놀랍게도 그 형상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암흑대상이 찾아왔습니다."
"모셔라."
"네."
핏물방울이 터져서 사라졌다.
잠시 후 그곳으로 암흑대상이 들어왔다.
매혈상인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
"죄송해요, 보시다시피 이런 상황이라서 예를 갖추지 못하겠네요."
"죄송할 것 없네. 세상의 어떤 사내가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마다하겠나?"
"세상의 어떤 사내도 시뻘건 핏물에서 목욕하는 미친년을 보고 싶어 하진 않겠죠."
"자네와 같은 절세미녀라면 용암에서 목욕을 하더라도 사내들은 달려들 것이라네."
"대상의 칭찬이 너무 달콤하네요."
암흑대상이 욕조 옆에 앉았다. 이런 말을 서슴없이 주고받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아주 조심하고 있었다.
암흑대상은 비록 자신의 수하이긴 하지만, 그녀의 사술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판단하기에 그녀는 누군가의 밑에 있을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천왕군이 다른 목적을 가졌듯, 이 여인 역시 자신의 수하로 남은 것에는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 다만 서로 모른 척 할뿐이다. 각자의 목적을 위해서.
매혈상인 역시 암흑대상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암흑대상 역시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 엄청난 부를 지켜내는 보이지 않는 힘이 분명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설쳤다간, 아무리 대단한 사술을 지녔어도 그에게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놈을 찾는 일은 잘 되고 있나?"
"그런 대단한 자를 쉽게 찾을 수 있겠어요? 대상의 부탁에 엉겁결에 받아들이긴 했지만 이번 일은 제 능력 밖의 일인 것 같아요."
그녀는 괜히 엄살을 부렸지만 추적에 특화된 혈영들이 하루가 다르게 추적의 범위를 좁혀나가고 있었다.
암흑대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한 가지 도움을 주려고 이렇게 찾아왔네."
"감사한 말씀이네요. 도움은 얼마든지 받겠어요."
"자네에게 성총관을 내주지."
"오호!"
"현재 놈과 유일하게 접족하는 자이니, 분명 자네에게 도움이 될 것이네."
매혈상인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성총관은 조직 내에 중요한 인물인 줄 알았는데요?"
"한때는 그랬지. 하나 그는 전형적인 반골이라네. 천왕군과의 관계에서도 그것을 드러냈고, 이번에 확실해 졌지."
"대상을 배신하다니? 나중에 산 채로 배를 갈라서 놈의 간이 얼마나 큰지 제가 꼭 확인해 보죠."
무서운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활짝 웃었다.
"도움이 되겠나?"
"물론이에요."
"그럼 난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그녀가 말했다.
"함께 목욕 하실래요? 대상이시라면 들어오셔도 되는데."
진담인지 장난인지 알 수 없는 여인의 유혹에 암흑대상이 싱긋 웃었다.
"다음에!"
"기대하죠."
암흑대상이 그곳을 걸어 나갔다.
그녀가 다시 손을 한번 휘젓자 피물방울이 생겨나며 수하의 얼굴이 되었다.
"지금 당장 성왕보에게 혈문(血蚊)을 보내라."
"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피물방울이 터지며 사라졌다.
"일이 점점 더 재미있어 지는군."
여인이 욕조 속으로 머리까지 몸을 담그자 핏물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 * *
한 대의 마차가 길가에 멈춰 섰고, 마차에서 성왕보가 내렸다.
약속장소는 눈앞에 펼쳐진 갈대밭 너머였다.
그가 호위를 거느리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른 키만큼 자란 갈대 사이로 얼마나 걸었을까?
모기 한 마리가 날아와서 그의 눈 위에 앉았다.
"앗!"
탁! 무심코 모기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모기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가 소맷자락으로 찝찝하고 간지러운 눈 위를 닦았다. 피가 묻어 나왔다.
"젠장!"
그는 알지 못했다. 눈두덩에 묻었던 모기 피는 지워졌지만, 그의 눈동자 가운데 붉은 점 하나가 찍혔다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그때 그의 앞으로 사내 하나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는 바로 백표였다.
"이쪽으로 따라오십시오."
백표가 원래 약속장소로 향하는 길이 아닌 곳으로 성왕보를 안내했다.
갈 숲을 해치고 한참을 걸어가니 숲으로 이어진 작은 오솔길이 나왔다. 갈 숲 사이사이, 나무 위아래, 그곳 주위에 흑표대 무인들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백표는 말할 것도 없고 수하들 하나하나가 대단한 기도를 드러냈다.
오솔 길 끝 작은 공터에 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성왕보를 이쪽으로 보내며 백표가 미행이 없음을 수신호로 알려왔다.
성왕보가 내게 다가오며 인사했다.
“잘 지내셨소?"
"당신 때문에 하마터면 죽을 뻔 했지. 그것도 두 번씩이나."
"오해시오."
"오해? 당신은 배짱이 좋은 것인가? 뻔뻔한 것인가?"
"첫날 약속이 함정이란 것을 알리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소.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장소를 택한 것도 그 때문이지요. 분명 영민하신 분임을 알기에 내 위험신호를 알아차릴 것이라 여겼소."
과연 내 예상대로였다. 당시의 나는 성왕보의 이런 반응을 예상했었다. 굳이 따지고 들면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 밝혀낼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가 나를 선택했다면 성왕보를 철저히 이용할 작정이었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소. 뜬금없는 장소였으니까."
"과연! 내 예상대로 알아봐 주셨구려!"
"한데 오늘은 왜 나를 보자고 하셨소?"
"그때 내게 물으셨지요? 저들이 쌓아올린 산을 무너뜨릴 테니까, 살아남아서 가장 높은 산이 되지 않겠느냐고?"
“그랬소."
"바로 그 가장 높은 산이 되고 싶소이다."
그는 이런 말 몇 마디로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지하 상계에 대한 모든 정보를 주시오."
"물론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드리겠습니다. 하나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겁니다."
"그대는 조직의 총관 일을 맡고 있지 않소?"
"내가 하는 일은 숫자를 다루는 일에 불과하오. 정확히 그들이 누군지는 오직 암흑대상만이 알고 있지요."
그 역시 거짓이 아니라 생각했다. 내부 사정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면 그는 이미 제거되었을 테니까.
"게다가 이 늙은이가 관리하던 천가 역시 사라져버린 상황이라서, 그 부분 역시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오."
나는 말없이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아쉬운 쪽은 성왕보였다. 어차피 지금 칼자루는 내 손에 쥐어진 상태, 그가 하는 말을 다 듣고 나서 판단하면 된다.
이윽고 성왕보가 자신이 준비해온 투항선물을 내놓았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내겐 돈이 가장 소중하오. 그것을 빼앗긴다면 나는 삶의 의미를 잃게 될 거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저 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럼에도 난 내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내어놓겠소."
그의 입에서 깜짝 놀랄 말이 흘러나왔다.
"대륙상단을 내어놓겠소."
그의 상단인 대륙상단은 중원삼대상단 중 하나였다. 비단 재산만의 가치만이 아니었다. 상권과 인맥, 정보망까지. 그것을 판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금액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워낙 덩치가 커서 분산해서 파는 것조차 쉽지는 않겠지만, 나에게는 훌륭하게 그 일을 해낼 공수찬이란 인재가 있었다.
성왕보는 발악과도 같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암흑대상이 성왕보를 죽이려고 결정을 내렸고, 성왕보가 그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성왕보가 이런 결론을 내렸을 리 없다.
"대가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지하상계를 없애주시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오."
그는 더 이상 바라지 않았다. 상단을 포기하더라도, 그가 지금껏 모아둔 돈도 막대할 것이다. 아마 그 돈으로 충분히 재기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상계의 정의를 다시 세워주시오."
그는 솔직하지 않았다.
차라리 솔직히 이러이러한 상황이니 살려달라고 했다면, 좀 더 그를 위한 마음이 생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밝히지도 않았고 속마음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그의 인생이 그러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허심탄회한 심정을 밝히기 보다는 언제나 계산적으로 상대를 대했을 테니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주판을 튕기고 저울을 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를 이용하면 그뿐이다.
내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힘을 합쳐서 놈을 없앱시다."
"감사하오. 앞으로 혼신을 다해 돕겠소."
"원한다면 우리가 당분간 머물 은신처를 제공해 줄 수도 있소만."
"괜찮소이다. 지금 당장 나를 죽이려 들지는 않을 것이오. 정 필요하면 도움을 청하겠소."
"알겠소.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은밀히 연락을 취할 것이오."
"기다리고 있겠소이다."
그가 안도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받아주지 않았다면 그는 죽은 목숨이었으니까.
돌아서 가려던 그가 다시 돌아서며 말했다.
"이 늙은이의 충성심을 의심하지 마시라고 한 가지 중요한 정보를 알려드리겠소."
"무엇이오?"
"매혈상인이라고 들어보셨소?"
"매혈상인?"
내가 금시초문이라며 고개를 내젓자 성왕보가 그에 대해 말해주었다.
"피를 이용해서 무시무시한 사술을 부리는 여인이지요."
"피로 사술을 부리는 여인이라?"
"나이를 예측할 수 없는 여인이오. 그대를 죽이려던 야시장이 폐장된 후 다음으로 그녀가 나선 것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알 수 있을 거요."
성왕보는 자신의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려는 듯 최대한 심각하게 말했다.
"그녀를 조심하시오."
성왕보가 그곳을 떠나고 나자 반대쪽에서 백표가 걸어 나왔다. 흑표대는 여전히 사방을 철통처럼 지키고 있었다.
"암흑대상은 성왕보가 배신할 가능성을 모르고 있을까요?"
"아마 이미 알고 있을 것이네."
"한데 왜?"
“어떻게든 그를 이용해서 나를 없애려는 마음이 있어서겠지. 성왕보가 배신하는 과정에서 잃는 것들보다, 그를 이용해서 나를 잡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지."
"그렇군요."
백표가 환하게 웃었다.
"왜 웃나?"
"이 냉철하신 모습,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서요."
"하하. 싱겁긴."
사실 나도 마찬가지다. 매번 벽리단으로 혼자 계속 활동하다가, 이렇게 수하들과 함께 움직이니 너무 든든했다.
내가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세."
* * *
"그녀를 조심해야 할겁니다."
눈을 감고 있는 매혈상인의 머릿속에 성왕보의 말소리가 들렸고, 보고 있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성왕보의 시야와 소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성왕보가 벽리단에게서 몸을 돌리고 숲을 떠나자, 여인이 눈을 떴다.
앞서 갈대숲에서 성왕보의 눈을 물었던 모기가 바로 혈문으로, 그것이 대상의 눈을 무는 순간부터 일정시간 동안 상대의 시선과 소리를 공유하는 신묘한 사술이었던 것이다.
"망할 늙은이가 내 정체까지 다 불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잿빛 눈동자 사내가 화난 얼굴로 말했다.
"당장 없애버릴까요?"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없애도 최대한 이용한 후에 없애야지."
“상대는 직접 보셨습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자였습니까?"
"묘한 자였다. 패도적인 것 같으면서 부드럽고, 분명 젊은 데 알 수 없는 연륜이 느껴졌지. 딱 뭐라 표현할 수 없이 묘한 느낌을 주는 자였다."
그녀가 다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좀 피곤하군."
일전에 시혼대법을 펼칠 때도 생각지 못한 진동이 있었다. 오늘의 대법도 평소와 달랐다. 평소보다 훨씬 더 피곤하고 더 많은 내력과 심력이 소모되었던 것이다.
"좀 쉬어야겠다."
"쉬십시오."
사내가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그녀가 다시 눈을 떴다.
"이 더러운 기분은 뭐지?"
뭔가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의 사술과 상성이 아주 나쁜, 마공을 상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어떤 굉장한 마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