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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비술(2)
사흘 후, 나는 호북 의창(宜昌)에 있는 한 철방 앞에 서 있었다.
현판에는 철심(鐵心)이라는 특이한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이곳 주인이 마인인가?]
[한때는 그랬지. 하나 이제 마인은 남아 있지 않으니까.]
천마는 순순히 그가 마인이란 것을 밝혔다. 적어도 내가 상대가 마인이라는 이유로 죽여 버리는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마인이 없다고? 그들은 이미 상당 부분 마교를 부활시켰어.]
[멍청한 소리 집어치워라. 그딴 것은 흉내에 불과하다.]
[흉내라고? 그 흉내 너무 제대로 내던데. 환생한 기분에 취해 너무 많은 것을 알려준 것은 아닌가?]
[이 자식이!]
정곡을 찔린 천마가 발끈했다. 이 일로 그와 감정다툼을 하고 싶진 않았기에 내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이곳 주인장 이름이 뭐지?]
[두백(杜白). 나는 그를 두철장(杜鐵匠)이라 불렀지. 실력 하나는 끝내주는 사람이다.]
[자, 그 실력 직접 보세.]
내가 철방으로 들어갔다.
천마와 인연을 맺은 사람이라면 노인일 줄 알았는데 중년 사내가 나를 맞았다.
“어서 오시오.”
“두철장 계십니까?”
두철장이란 말에 사내가 흠칫 놀랐다.
“제 선친이십니다만.”
선친이라면 이미 죽었다는 뜻. 내가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미처 몰랐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하외다. 한데 젊으신 분 같은데 어찌 제 아버님을 아시오? 더구나 두철장이란 말은…….”
천마가 부를 때 사용했던 말이었겠지.
그때 천마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망할 늙은이. 뭐가 그리 급하다고 벌써 가버렸나?]
[생각해 보니 벌써가 아닌 것 같네.]
[다 덧없고 부질없다. 다 때려치우고 그냥 즐기며 살아라.]
천마도, 나도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잠시 잊고 있었다. 이렇게 둘이서 대화를 하니, 예전 그때라고 착각이 드는 것이다.
“혹 백천광이란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순간 두정이 깜짝 놀랐다. 이내 그가 놀라지 않은 척 말했다.
“처음 듣는 이름이오.”
“괜찮습니다. 저는 그 백천광이란 분과 가까운 사람입니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에게 내가 차분히 설명했다.
“혹 무림맹이나 혹은 다른 정파에서 예전에 죽은 마교주의 이름을 대면서 그대를 속이려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겠지요.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지.”
내 설득이 그에게 먹혔다.
“교주님과는 어떤 관계이시오?”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내가 백천광의 후예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두철장이라 부른 것이 효과가 컸다. 천마만이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사내가 자신을 소개했다. 사내의 이름은 두정(杜正)이었다. 비록 마교도 사라지고, 아버지도 죽어 마교와의 인연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한때 마인이었던 아버지를 존경하는 그였다. 내가 마교주와 깊은 인연이 있다는 말은
그에게 큰 의미로 작용할 것이다.
“이리 들어오시오.”
그가 나를 뒷마당 쪽으로 안내했다. 몇 사람의 젊은이들이 땀을 흘려가며 일하고 있었다.
뒷마당에 두정 본인만의 작업장이 따로 있었다.
작업장에 들어가자 나는 짊어지고 있던 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쿵하는 소리에 두정이 깜짝 놀랐다. 그제야 내가 짊어지고 있던 커다란 짐이 무거운 금속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만년한철을 천으로 싸두었기 때문에 그는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무거운 것을 들고 온 것이오?”
“그렇습니다. 이것을 재료로 쓰려고 합니다.”
“풀어 봐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대체 어떤 금속이기에 이렇게 직접 들고 왔나 궁금할 것이다.
두정이 꽁꽁 싸두었던 천을 풀었다. 안에 든 것을 확인한 두정이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이것은?”
“만년한철입니다.”
“맙소사!”
그가 설마하며 다시 만년한철을 살폈다. 몇 번을 살펴도 만년한철이 확실했다.
“이렇게 많은 양의 만년한철은 처음이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무인이 영약이나 천하제일의 비급을 발견했을 때의 심정과 비슷할 것이다.
“혹 아버님께 만년한철을 다루는 법을 배웠습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웠소. 하지만 옆에서 작업을 도왔을 뿐 혼자서 다뤄본 적은 없소.”
그럴 것이다. 만년한철을 직접 다루는 경험을 하는 것은 철방의 장인에게 기연과도 같은 일이었으니까.
[젠장! 두철장이 있어야 하는데.]
[음. 꼭 그렇다고 생각하진 않아.]
[무슨 말이냐?]
[실력이야 아버지보다 못하겠지만, 내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여기 이 사람이 더 잘 만들 수도 있다는 뜻이지.]
[어째서냐?]
[더 젊으니까. 그리고 실력이 좋다고 항상 더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은 아니잖아?]
[실없는 소리다! 그냥 가자.]
괜히 자기가 소개를 해주고 일을 망칠까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반면 나는 오히려 두정이 잘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믿어보자고.]
[하여튼. 망치고 내 탓이나 하지 마라.]
[당연히 망치면 당신 탓이지. 저 사람이 뭔 죄야?]
[뭐? 이 자식이!]
두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것으로 무엇을 만들고 싶으시오?”
당연히 병장기였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금속을 가지고 의자를 만들 생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검은 수라명왕검으로 충분했다. 이미 수라명왕검은 나와 정신적으로 교감하고 있었다. 예전에 나를 보고 울었던 것만 봐도 그러했다.
그래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그에게 몇 장의 종이를 꺼내 보여주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틈틈이 만들었던 설계도였다. 대충 알아볼 수 있게 그림을 그리고 옆에 수치와 설명을 적어 두었다.
그것을 꼼꼼히 읽어보던 두정이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이런 물건들은 처음 보오.”
“만드실 수 있겠습니까?”
두정이 다시 설계도를 내려다보았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나는 만년한철 작업이 처음이오. 이런 나를 믿으시겠소?”
“믿겠습니다.”
“좋소. 그렇다면 한번 만들어 보겠소.”
그의 눈에 어떤 의지가 엿보였다. 철방의 장인으로 평생에 다시없을 기회였다.
“얼마나 걸리겠소?”
“적어도 석 달 이상은 걸릴 거요.”
“괜찮으시다면 저도 옆에서 돕겠습니다. 아마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을 겁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소.”
원래는 안 될 일이었다. 만년한철을 다루는 자신만의 비법이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내가 마교주와 깊은 인연이 있다고 생각해서 특별히 허락한 것이다. 또한 내가 특별해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만년한철을 짊어지고 와서 처음 보는 물건을 만들어 달라고 했으니까.
그날부터 우린 작업에 들어갔다.
밤낮없는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 * *
산동으로 돌아온 송화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버지와 담판을 짓는 일이었다.
“우리 송가장을 산동제일문파로 키우고 싶습니다. 그 일에 앞장서고 싶습니다.”
산동을 장악해 달라는 벽리단의 부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한 지역의 패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또한 그 일의 시작은 자신의 가문부터 장악하는 일이라는 것을.
송우경은 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앞서 일부러 딸을 데리고 가문의 일을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송화린은 말 그대로 자신을 돕는 역할에 그쳤다. 한데 지금은 자발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강호의 일을 제대로 배우고 싶습니다. 앞으로 많이 가르쳐 주세요, 아버지.”
“하하하, 얼마든지 가르쳐주마.”
송우경은 송가장의 여러 일들을 그녀에게 맡겼다. 그는 딸의 변화를 감지했다. 단순히 충동적인 변화가 아니었다. 진심이 담긴 변화였고 노력이었다.
송우경은 알 수 있었다. 그 변화의 원인이 벽리단이란 사실을.
그날 이후 송화린은 송가장 일부터 외부의 일까지 온갖 일들을 도맡아 움직였다.
처음에는 그녀를 보는 시선이 대내외적으로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갑자기 쟤가 왜 저러나,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꿋꿋이 주어진 일에 몰두했다. 잠을 줄여가며 무공을 수련했고, 송가장 일을 처리해 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 대한 시선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녀가 능력을 발휘하는 근원에는 정신적인 변화도 있었지만, 동시에 무공실력의 향상도 크게 작용했다.
벽리단에게 전수받은 진화검술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마했다. 그녀는 후기지수들 중 발군임은 물론이고, 이제 어지간히 경험 있는 산동의 고수들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실력이 된 것이다.
실력이 있으니 누굴 대하더라도 자신감 있게 대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미모 역시 일처리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벽씨검문이야 당연히 가장 가까운 우방이었고, 산동제일방파인 양소방이 송가장과 본격적으로 손을 잡았다.
양소방주 정여는 벽리단에게 충성을 맹세한 인물이었으니까, 이젠 한 몸처럼 움직였다.
벽씨검문과 송가장, 그리고 양소방이 본격적으로 손을 잡고 본격적으로 다른 세력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각 문파의 상황이나 사정에 따라 작전을 달리했다.
그렇게 송화린은 산동에서의 영향력을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변화를 두고 송우경은 벽리단의 부친인 벽도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우리 사위 덕분에 딸아이가 변했다네.”
이제 대놓고 벽리단을 사위라고 부르는 그였다.
“그게 어찌 단이 때문이겠나? 화린이가 철이 든 것이지.”
“아니네, 아니야. 우리 사위가 큰 영향을 끼쳤다네.”
사실 벽도준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들은 주위 모두를 변화시키고 있었으니까. 당장 벽씨검문만 해도 아들이 정신 차린 후에 많이 바뀌었다. 소검대는 계속 확장하며 성장했고, 기존의 검대 역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
도로 강해졌다.
이제 순수한 무력만 놓고 본다면 산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내실을 다진 것이다.
“이제 애들이 품 안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나보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좀 섭섭하군.”
“이 사람아. 오히려 좋은 일이지.”
“그래도 화린이가 갑자기 어른이 돼버린 것 같으니, 기분이 이상하네.”
“하긴. 나도 그랬다네.”
자기 갈 길 떠나는 자식은 하루만 울지만, 남은 부모의 슬픔은 오래 계속된다는 말이 있다.
언젠가는 자식을 품안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들이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려서부터 친구였는데, 어느새 자식걱정을 하는 부모가 되어 있었다.
벽도준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애들 다 키운 후에 우리끼리 놀러 다니자고 하지 않았나? 이제 그때가 오고 있는 듯하네.”
* * *
천기심환공을 발휘해서 다시 천마를 만났다. 기준점을 잡은 것은 철방 뒷마당이었다. 두정이 내준 숙소 창문으로 보이는 마당이었다.
만들어진 장소에는 온갖 종류의 철방 도구들이 각기 다른 크기로 자리 잡고 있었다. 다행히 불가마가 커지지 않아 거대한 불길을 옆에 두고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되었다.
오늘 이 자리는 천마가 보자고 몇 번이나 졸라서 만들어졌다.
[바쁘다니까 그러네.]
[잠시 이야기 할 시간 정도는 괜찮잖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바빴다.
두정과 나는 거의 밥 먹고 자는 시간만 빼고 철방에서 작업에 몰두했다. 나는 완벽하게 두정의 손발이 되어서 그를 도왔고, 작업은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왜 보자고 했나?]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던 천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학비술의 구결, 내게 알려줄 수 있나?]
[싫다.]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망할 놈! 내 말이나 들어보고 거절해야지.]
[들어보나 마나다. 싫다.]
[비정한 놈! 나쁜 놈! 잔인한 놈! 무례한 놈!]
한바탕 퍼부은 후에 천마가 명분을 끌고 왔다.
[우리 할아버지가 창시한 무공이다. 너는 내게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군.]
[오! 알려줄 텐가?]
[아니.]
[젠장! 망할! 이 도덕심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정파 꼰대 같으니라고!]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회유책도 썼다. 천마가 부드러운 어조로 나를 불렀다.
[이봐, 하진이.]
[싫다.]
[제발.]
[싫다니깐.]
[네 무공이 완벽하지 않다고 가르쳐줬잖아? 그런 중요한 말을 해줬으면 보답을 해야지.]
[그래, 말 잘했다. 네 말처럼 추혼수라검술은 완벽하지 않다면 이제 선학비술이 내 최고 절기가 되는 셈인데, 그것을 함부로 가르쳐줄 수는 없지.]
순간 천마가 아차하며 침묵했다.
곧이어 말을 바꿨다.
[추혼수라검술은 완벽했어! 네가 그것을 못 쓰게 하려고 작전을 쓴 거야.]
[그럼 성공했네. 다신 안 쓸 테니까.]
[아! 제발 알려줘!]
천마를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나는 의도한 방향으로 대화를 끌어가고 있다.
[앞으로 내 이름 마음껏 부르게 해주마.]
[지금도 마음껏 부르잖아.]
[비무를 하면서 네 실력을 키워주마.]
[지난 비무에서 당신이 졌다는 것을 잊었어?]
[젠장!]
그의 마음이 달아오를 만큼 올랐다 싶었을 때, 내가 불쑥 말했다.
[좋아, 알려주지.]
[뭐? 정말? 넌 역시 최고로 멋진…….]
[단,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