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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옥풍운(1)
[마혈을 다 풀었네.]
내 말에 천마가 깜짝 놀랐다. 원래 예상소요 시간은 하루였고, 다음 예상은 여덟 시진, 그리고 정작 내가 마혈을 모두 풀어내는 데 걸린 시간은 여섯 시진이었다. 처음의 예상보다 딱 절반의 시간으로 마혈을 풀어낸 것이다.
[정말인가?]
[자네도 마혈이 풀렸다는 것을 알지 않나?]
[내가 어떻게 아나?]
[모른다고?]
[네 몸인데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나에 대해서 모두 아는 것은 아니란 것은 이미 앞서의 대화에서 알아차렸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시 그와 난 공유하는 것과 공유하지 않는 것이 확실히 나눠져 있었다.
문득 드는 한 가지 의문.
[그럼 처음에는 어떻게 나인 줄 알았지?]
[그건…… 나도 모르겠다. 그냥 너인 줄 알았다.]
그도 나도, 아직은 알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다. 어떤 부분들은 감정을 깊이 공유하고, 또 어떤 부분들은 한 몸에 있지만 전혀 알지 못하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알아내야 할 일이었다.
[어쨌든 여섯 시진 만에 풀었단 말이지?]
분명 천마의 말에는 놀람과 감탄이 섞여 있었다.
[자네였다면 얼마나 걸렸을까?]
[나였다면 네 시진이면 충분하지.]
[목소리가 떨리는군. 거짓말을 할 때면 항상 이렇게 표가 나나?]
[젠장.]
아마도 그가 직접 했다 해도, 비슷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 여긴 모양이다. 그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처음 배웠는데 천마와 비슷한 효과를 낸다?
그가 이렇게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주눅 든 그를 위해 한마디 해주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사람과 무공과는 궁합이 있지 않나? 역천해법이 나와 잘 맞는 모양이야.]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역천해법은 정말 대단한 마공이었다. 아무리 내 무공의 경지가 높다 하더라도, 역천해법은 마공이었다. 마공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익히고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역천해법이란 무공 자체가 워낙 높은
수준의 무공이란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역시 그렇지?]
금방 천마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이럴 때보면 애 같지만, 천마는 애가 아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차마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어둠과 악이 존재하는 마교의 교주다. 저 천진함에 속으면 절대 안 되는 것이다.
[아쉽군. 자네가 본교에 들어왔다면 내 후계자가 되어 천마가 되었을 텐데.]
[과연 그렇게 되었을까?]
[무슨 뜻이지?]
[자네가 나 같은 재능 있는 후계자를 그냥 놔뒀겠는가 하는 말이지.]
[흥! 나를 짐승으로 여기는군.]
[역시 목소리가 떨리는군.]
[헛소리 마라! 정파의 위선자들에게 이런 취급을 당하니 상당히 기분이 나쁘군.]
[정파는 무조건 위선자라는 것, 그것도 상당히 나쁜 선입견이야.]
[마교주는 후계자를 잡아먹는 짐승 같은 놈이다, 네가 먼저 시작한 선입견이지.]
[하긴 그렇군.]
내가 순순히 인정했다. 그도 나도, 우린 상대에게 너무나 많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는 잘 통했지만, 우린 서로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가령 그가 나를 후계자로 받았을 때, 그가 어떻게 나왔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내 재능을 아껴서 총애받는 후계자가 되었을지, 그래서 정말 천마가 되었을지도. 아니라면 앞서 내 말대로 재능이 드러났을 때 제거당했을 수도 있었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상상하는 것과 현실은 전혀 다른 법이니까. 직접 그 상황이 되어 봐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법이니까.
어쨌든 마혈은 모두 풀었고, 이제 단전의 봉쇄를 풀어야 했다. 몸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만, 아직 내공은 사용할 수 없었다.
마혈과 단전을 이중으로 제압을 해두었기 때문이다.
역천해법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단전의 봉쇄를 푸는 데에는 좀 더 적은 시간이 들 것 같았다.
[자, 이제 내공도 풀어볼까?]
그 말을 하고난 지 정확히 다섯 시진 후.
[단전의 봉쇄도 모두 풀었다.]
앞서 마혈을 풀면서 걸린 시간은 여섯 시진, 이번에는 한 시진을 줄인 것이다. 역천해법이 더욱 익숙해진 것이다.
천마는 이번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딱 이 반응 정도였다.
[음…….]
하지만 천마의 성격으로 볼 때 오히려 더 큰 반응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여섯 시진도 이해불가인데, 거기서 한 시진이나 줄였으니.
사실 나 역시 궁금했다.
과연 다른 마공도 이렇게 빨리 익힐 수 있는 것일까?
[이 정도라면 당신 독문마공도 금방 익히겠는데?]
[고작 역천해법 정도로 기고만장하는군. 네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나의 혈뢰천화공(血雷天禍功)을 익힐 수 없다.]
혈뢰천화공은 천마의 독문무공이다. 나의 추혼수라검술과 쌍벽을 이루는 천하제일의 마공이었다.
무시하듯 말했지만 사실 혈뢰천화공이 얼마나 대단한 무공인지는 내가 잘 안다. 그의 마지막 한수까지 다 경험해 봤으니까.
[혈뢰천화공을 익히려면 반드시 혈뢰심법(血雷心法)이 바탕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혈뢰심법은 너희 정파의 심법과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운용된다. 이미 정파의 심법을 익힌 너는 진기를 다스리다가 혈맥이 터져버리거나 주화입마에 빠져버릴 거다.]
[과연 그럴까?]
무공에 있어 예전과는 생각이 바뀐 부분이 있다.
미리 한계를 짓지 말자는 것.
추혼수라검법과 선학비술의 조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도 그런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고. 정공심법을 익힌 사람이 마공심법을 익힐 수 없다는 것도 미리 한계를 짓는 일일 것이다.
[당연히. 다시 한 번 붙어봐야 정신을 차릴 셈이더냐?]
다시 붙으면 또 죽을 것이라고 놀릴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의 마지막 자존심을 건들지는 않았다. 나 역시 누군가 추혼수라검술을 폄하한다면 화가 치밀 테니까.
[하긴. 혈뢰천화공이 대단하긴 했지. 그 초식 이름이 뭐였지? 여덟 가닥의 뇌전이 내리쳤었는데?]
[팔뢰비정인(八雷非情刃).]
[그 수법은 정말 위협적이었어. 그때 정말 죽는 줄 알았지.]
[그걸 피한 것도 네가 처음이었다.]
[거의 한쪽 팔이 날아갈 뻔했다고.]
[정말?]
[이제 와서 거짓말을 왜 하겠나?]
[젠장! 내공을 아끼지 말고 그때 다 쏟아부었어야 했군. 멍청하게 다음 수에 승부를 보려고 할 게 아니라.]
[나로서는 정말 다행이군.]
천마와 무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의 무공을 높이 사기도 하고, 때론 무시하며 툴툴대었지만, 그와 무공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린 대화만으로 무학의 깊이가 조금씩 더 깊어지고 있었다.
* * *
저녁 시간이 되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세 사람의 간수가 뇌옥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온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못 보던 얼굴이었다.
두 사람이 족쇄를 푸는 사이 다른 간수가 한옆에 식사를 차려주었다. 뇌옥의 음식치고는 제법 잘 차려진 밥이었다.
그때 내게 전음이 들려왔다.
-저는 천망회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오늘 처음 본 간수가 보낸 전음이었다.
-전음을 보내지 못할 테니까 듣기만 하십시오. 갈군사가 걱정하고 있습니다. 뇌옥으로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지에 대해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만약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 쪽이면 국을 먼저 드시고, 아니라면 젓가락으로…….
-대기하고 있으라고 전해주시오.
-헉! 전음을 보낼 수 있으시군요? 대체 어떻게?
-제압당한 마혈을 풀었고, 내공 역시 사용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있으라고 전하시오.
-네, 알겠습니다.
간수가 한쪽 팔의 제압을 풀어주며 내게 말했다.
“반 각 내에 다 먹도록!”
“알겠소.”
나는 밥을 먹었다.
그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스스로 마혈을 제압했다. 저들이 제압한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는데, 대신 언제든 내 스스로 풀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확인하면 여전히 마혈이 제압당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단전의 내공 역시 스스로 봉인했다.
내공 역시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빠른 시간 내에 봉인을 풀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봤을 때는 여전히 자신들이 봉쇄해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천마가 내게 물었다.
[왜 마혈을 다시 봉쇄하지? 여기서 안 나갈 건가?]
[기왕 들어온 것, 이 상황을 이용해 보자고.]
[어떻게?]
[이곳에 있으면 놈들이 나를 죽이려 들겠지? 대법을 방해한 나를 그냥 두진 않을 테니까.]
[역으로 놈들을 끌어 들이겠다?]
[그렇지.]
[흐음. 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한데.]
[왜? 저들이 당하는 것이 싫은가?]
천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과연 여전히 배후세력을 아군으로 여기고 있을까?
나는 천마에게 한 가지 사실을 물어볼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그 노인 말이야.]
[그는 왜?]
[그를 좋아하겠군. 당신을 다시 되살려줬으니까.]
천마가 코웃음을 쳤다.
[속셈이 있으니까 살렸겠지. 내가 살아나준 것을 그쪽에서 고마워해야지.]
[하하. 이래야 자네답지.]
[칭찬으로 듣지. 한데 왜 그자에 대해 언급했나?]
[그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나?]
[그다지 별로.]
천마가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어느 정도 감정적인 부분은 공유하기에 적어도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그 노인은 이미 이 강호를 다 가졌어. 자네도 마교를 운영해봐서 알겠지만, 그 정도 조직을 운영하려면 상상도 못 할 돈이 들지. 게다가 무림맹주조차도 자신이 원한 자를 뽑았고. 세상의 모든 돈과 가장 큰
권력을 모두 가졌다고 볼 수 있지. 한데 그런 자가 왜 당신을 다시 살렸을까? 당신은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어?]
천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긍정의 침묵이었다.
[한번 알아보자고. 대체 당신을 이용해서 무슨 짓을 꾸미려 했는지.]
* * *
다음 날 마철군이 나를 찾아왔다.
이미 나는 완벽하게 내 원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언제든지 내 본연의 무공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였다.
반면 마철군은 생각이 복잡해 보였다. 하긴, 이혼대법의 희생양이 될 뻔한 데다, 그 여인 문제까지. 이 상황을 풀어나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기도 할 테고.
“내가 자네를 왜 믿어야 하지?”
나는 알 수 있었다. 저런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이미 나를 믿기 시작했다는 것임을.
아마 폭발이 있었던 방에서 이혼대법의 흔적을 찾아낸 것이리라.
“이유는 없소. 다만 내가 했던 말은 진실일 뿐이오.”
“좋아. 자네가 나를 구하려 했다는 말이 사실임을 증명해 보게.”
“어떻게 말이오?”
“우선 자네 조직에 대해 아는 대로 다 말하게.”
“우리 조직은 철저히 점조직으로 이뤄져 있소. 그래서 각자의 영역만 알고 있을 뿐이오. 다만 혈천신교와 관련해서 여러 일들을 추진해왔다는 것은 말씀드릴 수 있소.”
“무엇이지?”
“예를 든다면 불회마령단을 제조하기 위해 연구를 계속해 왔다거나.”
불회마령단이란 말에 마철군이 깜짝 놀랐다.
그를 놀라게 할 말들이 계속 이어졌다.
“광혈무통군과 마번을 양성해 낸 것은 알고 있소.”
마철군에게는 하나같이 충격적인 내용일 것이다. 그는 마교의 준동이 자신을 무림맹주로 삼기 위해서 어느 정도 흉내를 낸 정도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내가 말한 세 가지는 혈천신교를 대표했던 위협적인 악
몽들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마철군이 나직하게 물었다.
“나를 맹주로 삼은 것, 정말 그 대법을 위해서였나?”
잠시 사이를 두고 내가 대답했다.
“그렇소.”
“빌어먹을!”
앞서 그가 찾아왔을 때도 대법의 희생자가 될 뻔했음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그것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철군은 분노했다. 그의 몸에서 살기가 치밀어 올랐다.
천마가 내게 말했다.
[저 미친놈이 널 죽일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경솔한 인물은 아니야.]
[인간의 광기를 우습게보지 마라. 생각지도 못한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 인간들이니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일정 부분은 동감했다.
천마의 말은 인간 자체에 대한 깊은 불신에서 나온 말이지만, 분명 그런 의외성을 지닌 것이 인간이기도 했으니까.
[내가 그녀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한,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다.]
과연 내 예상대로 마철군은 곧장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녀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소? 당신은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다고.”
“네 입으로 직접 말해!”
신경질적인 그의 반응에도 나는 차분했다.
“그 전에 하나만 물읍시다.”
“뭔가?”
가만히 마철군의 두 눈을 응시하며 내가 물었다.
“그녀를 위해 당신은 무엇까지 할 수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