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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전속결(3)
서학사가 본래의 얼굴을 드러냈다.
그가 살기를 드러내자 앞서의 그 품위 있고 인자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졌다. 과연 서학사는 대부분의 악인들이 그러하듯이 피냄새를 빨리 맡았다.
“추잡스러운 개새끼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서학사의 말에 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주로 방심한 상대의 뒷목을 물어뜯어서겠지?”
“과연 그럴까?”
“뭐, 아니라도 상관없지.”
밖에서 제법 시끄러운 소리가 났음에도 이 방은 방음시설이 너무나 잘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의 대화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설계된 방이었는데, 반대로 바깥의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평소에 그는 극도로 방해받는 것을 싫어했던 모양이다.
자신의 비밀을 유지하는 것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에게 걸맞은 방이었다.
“그나저나 쥐새끼처럼 이곳까지 숨어들다니. 대단하군.”
“왜 숨어들었다고 생각하나? 쥐새끼가 다 물어 죽이고 왔을 수도 있지.”
그러자 서학사가 피식 웃었다.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뜻이 담긴 웃음이었다. 내가 베고 온 자들을 생각하면 저 태도는 당연했다.
놈은 나를 잠입술이 뛰어난 살수로 여기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자리에 놓인 작은 무인상의 머리를 꾹 눌렀다. 아마도 바깥의 수하를 부르는 비상종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미 때늦은 시도였다. 내가 외부에 침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를 피신시켰어야 했다.
하지만 놈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 상황을 처음 겪었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규모 전투라면 모를까, 한 사람에게 이곳까지 뚫릴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워낙 많은 고수들이 있었기에 방심
한 부분도 컸고.
아무도 오지 않자 서학사는 반신반의하며 긴장했다.
“누가 보냈나?”
“짐작 가는 사람이 없나?”
“워낙 많아서.”
“그럼 그중 한 사람이겠지.”
말을 마친 내가 곧바로 검을 뽑았다. 이제 더는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살기를 드러내자 서학사의 몸에서 사기가 뿜어져 나왔다.
듣던 대로 아주 괴이한 기운이었다. 이런 기운을 처음 경험하는 무인이라면 이 기운만으로도 승기를 빼앗길 수 있었다. 늪에 빠진 것처럼 몸이 무거워지고 기분이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비슷한 기운을 내뿜는 사공의 고수들을 여럿 상대해 본 적이 있었다.
내가 놈의 사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자,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제법이군.”
깜짝 놀라 돌아보니 말을 한 사람은 놀랍게도 서학사였다. 마치 쌍둥이처럼 또 다른 서학사가 서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요즘 것들은 다들 성질이 급하지.”
세 번째 서학사가 책상 뒤에서 등장했다.
일종의 분신술이었는데 전혀 가짜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정교하고 실감 나는 분신술은 나도 처음이었다.
이들은 모두 가짜이고 환상이지만 그 공격은 진짜일 것이다. 그것이 분신술의 무서운 점이었다.
“간만에 재미있는 싸움이 되겠군.”
“쥐새끼는 다 때려잡아야지.”
한마디씩 던지며 계속해서 서학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것들을 쳐다보았다.
“이 방은 싸우기에 너무 좁군.”
다섯 번째의 말에 여섯 번째 분신이 말했다.
“그럼 넓은 곳으로 가면 되지.”
다음 순간, 주위가 바뀌었다.
휘이이이이잉.
갑자기 어디선가 모래바람이 불어왔다. 나와 일곱 명의 서학사는 끝이 보이지 않는 황무지에 서 있었다.
오호!
내가 내심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급의 진법이 발동했다고 여겨도 될 정도로 이곳 세상은 잘 꾸며져 있었다. 놈의 사술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정교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나를 포위한 일곱 명의 서학사들 중 누가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정면의 서학사가 내게 물었다.
“어떠냐?”
“정말 놀랍군.”
나는 솔직한 느낌을 밝혔다.
“두려운가?”
“신기하군.”
“후후, 건방을 떠시겠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 가르쳐 줄 텐가? 나도 분신들이 필요해서 말이지. 하나로는 밥을 짓고, 하나로는 뒷간을 치우고, 하나로는 추잡스러운 개새끼도 잡고.”
일곱 서학사의 표정이 일제히 일그러졌다.
하나로는 강호를 지배하고, 하나로는 천하제일의 미녀를 얻고, 하나로는 천하제일의 거부가 되고. 이 끝에 자신을 죽이는 내용이 있었다면 이들은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가치가 밥 짓고, 뒷간을 치우는 일에 비유된 것이다.
일곱 명의 서학사가 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똑같은 목소리가 합쳐졌음에도 여러 목소리가 합쳐진 것 같이 묘한 느낌으로 울려 퍼졌다.
쉬이잉!
정면의 서학사가 날아들어 공격을 개시했다.
쇄도한 놈은 손가락으로 내 눈을 찌르며 공격했다.
촤아아아악!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하며 그를 베었다. 손목의 힘을 이용해서 가볍게 쳐내듯 베었다.
퍼엉!
붉은색 연기를 일으키며 서학사가 사라졌다.
매캐한 연기가 콧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그것이 극독임을 알 수 있었다.
앞서의 공격도 날카로웠지만 진짜 공격은 바로 이 독연이었던 것이다.
독에 중독된 것처럼 내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서학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조롱과 멸시에 찬 눈빛이 모여들었다.
“별것도 아닌 놈이.”
“크크크.”
“완전히 숨을 거두기 전에 팔다리를 다 뜯어버리자!”
“이놈 이상한데?”
“어?”
나는 어느새 무덤덤하게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씩 웃는 그 순간, 내 검이 빠르게 회전했다.
쉬이이이익!
첫 번째 공격에 몇몇의 발목이 잘려나갔고, 두 번째 공격에 쓰러진 자들의 몸통이 잘려나갔다.
펑! 퍼엉! 펑!
공격을 피해 달아난 자들도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적어도 검술로는 내 공격을 피할 수준이 아니었다.
펑! 퍼어엉!
그들이 각기 다른 색의 독연을 품어내며 터져나갔다. 시커먼 색도 있었고, 녹색과 푸른색도 있었다. 모두 각기 다른 치명적인 독들이었다.
만독불침인 나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마지막 놈까지도 연기를 내며 터졌다. 놀랍게도 모두가 가짜였던 것이다. 나타난 분신이 분명 여섯이었는데, 아마도 이곳 황무지가 만들어지면서 진짜는 사라지고 새로운 하나가 추가되었던 모양이었다.
당할 수밖에 없는 아주 정교한 속임수였다.
갖가지 색의 독연이 사라지자 그곳의 풍경은 다시 바뀌어 있었다.
사방에 동경이 가득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수십 개의 거울이 각기 다른 각도로 세워져 있었다. 나의 모습이 사방에서 비쳤다. 너무 많은 모습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보통의 동경이 아니라 사기를 뿜어내는 거울이었다.
쨍강!
가까이 있는 거울을 부수니까 그 자리에 두 개의 거울이 생겼다.
쨍강!
다시 부수니까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다시 두 개의 거울이 생겨났다. 거울이 늘어날수록 더욱 어지러워졌다.
정말이지 기묘하고 대단한 사술이었다.
사술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듯, 새로운 공격을 개시했다.
“죽어!”
거울 속의 내가 튀어나오며 나를 향해 검을 내지른 것이다. 이번에는 내 분신이 나를 공격하는 것이다.
차앙!
거울 속에서 튀어나온 나의 공격은 진짜였다. 다행히 거울 밖의 진짜 나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촤아아악!
공격했던 내가 사라졌다. 하지만 빈 거울에는 다시 나의 모습이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른 거울들에서 또 다른 내가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라 셋이었다.
다시 연속해서 그것들을 베었다.
나는 차분했다. 처음 이 일을 당하면 많이 당황하게 될 것이다. 머리는 어지럽고 귀신에 홀린 듯한 상태에서 자기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침착했다. 나 정도의 고수가 되면, 마음속으로 자기 자신과 비무를 겨루기 한다. 그래서 자신을 베는 일은 생소한 일이 아니다.
나는 공격을 막아내면서 거울들을 하나씩 자세히 살폈다. 모두 같은 모습처럼 보였지만 다른 모습의 내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 파훼법을 생각해 낸 것은 근래의 진법공부 덕분이었다.
현란하고 모호한 것들일수록 가장 단순한 원리로 만들어진다는 것, 그리고 반드시 파훼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몸소 배웠기 때문이다.
베고, 찾고. 다시 베고, 또 찾고.
결국 나는 찾아냈다.
다른 얼굴이 담긴 동경을. 딴생각을 하고 있는 눈동자와 다소 경직된 표정의 나였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미세한 차이였기에 남과는 비교할 수 없을 대단한 관찰력과, 날아드는 공격을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무공, 그리고 반드시 있을 것이란 확신이 없었다면 결코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거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과연 그것이 약점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른 거울에서 일제히 내가 튀어나와 나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내가 한발 빨랐다.
바람처럼 빠르게 날아가 거울 속의 나를 찔렀다.
푸우우욱!
쨍강 소리를 내던 앞서와 다른 소리가 났다.
거울 속의 내가 서서히 변하기 시작하더니 서학사로 변했다.
내 검이 서학사의 가슴을 관통해 있었다.
“제발…… 살려줘.”
입에서 피를 울컥 뿜어내는 서학사에 내가 말했다.
“애원은 아껴둬. 지옥에 가서 숱하게 해야 할 테니까.”
촤아아아악.
검을 비틀어 베어 올리자 서학사의 몸이 싹둑 잘려나갔다.
그가 죽자 주위가 바뀌었다. 사방에 가득했던 거울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곳은 처음의 그 방안이었다.
등잔의 기름을 부어서 불을 붙였다.
불에 타오르기 시작한 그의 시체를 보며 내가 말했다.
“내 비기를 본 이상 살려둘 수는 없지.”
그가 다른 연구자들을 죽였을 때 했을 법한 말이었다.
나는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낡은 건물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 * *
“큰일 났습니다.”
천소선이 동굴로 뛰어 들어왔다.
“쉿!”
노인이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며 돌아섰다.
두통에 시달리던 아이가 이제 막 잠이 든 것이다.
천소선이 이렇게 서두르고 놀란 모습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노인은 침착했다.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침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와서야 비로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서학사가 죽었습니다.”
“뭣이?”
하늘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노인이었지만, 이번에는 깜짝 놀랐다.
천소선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반복했다.
“서학사를 지키던 이들까지 모두 죽었습니다.”
대법을 앞두고 정말 생겨서는 안 될 일이 터진 것이다.
“갈사량의 짓인지, 마철군의 짓인지 지금 조사 중에 있습니다.”
노인의 눈빛이 더없이 깊어졌다. 지금까지의 여러 실패들은 큰일에 자연히 따르는 변수 정도라고 여겼다.
“갈사량이나 마철군 따위가 아니다.”
이제 노인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는 또 다른 거대한 운명이 생겨났음을.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데 저 하늘이 그냥 있을 리 없겠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는 노인이 차분히 물었다.
“대법과 관련된 자들도 모두 죽었느냐?”
“아닙니다. 서학사를 도울 두 사람은 모두 살아 있습니다.”
“그들을 불러들여라. 우선 그들이라도 살려야 한다.”
“네.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대법을 시행할 수 없습니다.”
“그렇겠지. 그 문제는 내게 맡기고, 너는 그들을 살려라.”
“알겠습니다.”
천소선이 훌쩍 몸을 날려 동굴 입구로 날아갔다.
혼자 남은 노인이 침상으로 걸어갔다.
아이는 여전히 잠이 들어 있었다.
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앞서 마철군의 상황을 빗대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세상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구려.”
* * *
“저길 보세요.”
칠호의 말에 임연정이 창가로 걸어갔다.
그곳 장원으로 백석이 황급히 들어오고 있었다. 그가 마당에서 일호와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았지만 뭔가 중대한 일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칠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해낸 것 같아요.”
임연정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벌써?”
“네.”
칠호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 확신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내가 왜 그 사람을 믿었는지 이제 확실히 알 것 같아요.”
“왜죠?”
“믿을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에요.”
결과론적인 이상한 말이었지만, 칠호는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연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자신의 삶에도 그런 사람이 한 명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무명대협.
자신을 살려주고 떠난 그 사내다.
칠호가 벽리단을 믿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만약 상대가 무명대협이라면 자신 역시 칠호와 같은 신뢰를 가졌을 테니까.
밖에서 일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임연정이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일호가 들어와서 빠르게 말했다.
“장소를 옮겨야겠습니다.”
“무슨 일이죠?”
“상부에서 급한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우선 몸부터 피하시죠.”
“그러죠.”
밖에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마차에 타자 일호가 마차를 몰고 달려 나갔다.
이번 일이 얼마나 위급한 일인지를 말해주듯 마차는 미친 듯이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마차가 속도를 올리면 올릴수록 창밖을 바라보는 칠호의 미소는 짙어졌다.
‘그가 성공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