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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눈에서 눈물이 나면(1)
또다시 임연정이 묵고 있는 장원에 짐이 도착했다.
묵묵히 짐을 내리는 사람은 일호와 칠호였다.
“방으로는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일호가 그녀에게 짐을 내주었다.
임연정이 자신에 대해 그다지 좋은 감정을 지니지 않아서였다. 임연정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싫은 것은 확실히 싫었고, 굳이 싫은 사람은 보려 하지 않았다.
“요즘 일은 어떤가?”
“괜찮습니다.”
“임연정은?”
“여전히 변함없습니다. 즉위식 이후 본격적인 대법이 시작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더 말이 없자 칠호가 돌아섰다.
“그럼 이만.”
그녀가 몇 걸음 걸어갔을 때, 뒤에서 일호가 말했다.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칠호가 뒤로 돌아섰을 때, 일호는 성큼성큼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일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마지막 말을 괜히 던졌다는, 자신답지 않았다는 자책감이 깃든 표정을.
하지만 그 표정을 보지 못했기에, 설령 보았다고 해도 그의 마음을 알지 못했기에, 정작 칠호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상관이라면 한 번쯤 던질 수 있는 말이었으니까.
“네.”
짤막하게 혼잣말처럼 대답한 후 칠호는 짐을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임연정은 자신의 서재에서 본격적인 대법준비에 한창이었다. 상자 속 재료들은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고, 그것들은 정리되거나 합쳐져서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되고 있었다.
“새 물건이 도착했습니다.”
“여기 올려놓으세요.”
칠호가 탁자 위에 상자를 올려놓았다. 대법에 필요한 물건들은 중원 곳곳에서 오고 있었다. 때론 막 수확된 약초나, 살아 있는 독충들이 오기도 했다.
“정리는 제가 하죠.”
“그러시지요.”
칠호가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임연정이 그녀에게 말했다.
“좋은 이름이에요.”
“네?”
“백련, 당신에게 잘 어울려요.”
칠호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진흙 속에서도 자라는 것이 연꽃이라지만, 하지만 그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있노라면, 언제나 자신과는 멀게만 느껴졌으니까.
듣기 좋으라고 해주는 말일 것이다.
칠호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 밝은 미소로 대답했다.
“감사해요.”
하지만 그럼에도 벽리단이 이름을 붙여주던 그 순간은 잊을 수가 없었다.
들판에서 그와 술을 마시며 여러 이야기를 하다, 이름을 잃은 지 오래란 말을 지나가듯 말했다. 한데 고맙게도 그 말을 벽리단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겠지만…… 이 백련이란 이름이 너무 좋았다.
* * *
“우선 마궁태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마궁태, 마양화가 고수를 보내와 우릴 죽이려는 것에 대비해 갈사량이 작전을 세웠다.
“흔히 마궁태가 다혈질적이고 무분별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사실 놈은 상당히 영리한 놈입니다.”
“위장이다?”
“네, 그렇습니다. 겉은 곰인데, 속은 여우지요. 반면 마양화는 겉으로는 차분하고 마음이 넓은 것 같지만 의심이 많고 손해를 보기 싫어하는 성격입니다.”
“만약 두 사람을 분열시켜야 할 상황이 생기면 마양화를 먼저 공략해야겠구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손해 보기 싫어하는 성격은 공략하기 쉬운 성격이다. 계산이 많다 보면 결국 오산도 하게 되는 법이니까.
“그들이 우릴 죽이려고 나선 이상, 어설프게 상대하지 않겠소. 마양화와 마궁태, 그리고 그를 따라온 수하들을 모두 다 없애버릴 생각이오.”
우릴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이제 확실히 보여줄 것이다.
“놈들은 지금 어디에 있소?”
“현재 마양화와 마궁태는 주철룡의 손님으로 무림맹 내원 광월단의 객청에 있습니다.”
“가장 안전한 곳에 숨었구려.”
“그렇습니다.”
그들 역시 이번 일이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놈들을 외부로 끌어내야겠소. 그러려면 그들이 믿을만한 사람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갈사량이 한 사람을 생각해냈다.
“다행히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사람 중에서 그들이 믿을 만한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그게 누구요?”
갈사량이 씩 웃으며 말했다.
“함께 가서 보시겠습니까?”
* * *
반 시진 후, 나와 갈사량은 무림맹 본단 지하뇌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우린 간수의 안내를 받아 이중, 삼중으로 엄중한 경계가 펼쳐져 있는 뇌옥의 복도를 걸어갔다.
아직 갈사량은 무림맹의 총군사였기에 자유롭게 뇌옥에 들어올 수 있었다. 사실 맹칙만 따지자면 현재 무림맹의 최고권력자였다.
간수가 우릴 한 철문 앞으로 안내했다. 작은 구멍 사이로 보이는 사람은 바로 이전의 총군사 사마천이었다.
간수가 문을 열어주었고 나와 갈사량이 안으로 들어갔다.
“자넨?”
갈사량을 발견한 사마천이 깜짝 놀랐다. 퀭한 눈에 핼쑥한 얼굴, 산발이 된 머리카락과 정리되지 못한 지저분한 수염까지. 그는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피폐해져 있었다.
“잘 지내셨소?”
“너! 이게 다 네가 집법당주와 짜고 꾸민 짓이지?”
흥분한 그에 비해 갈사량은 차분했다.
“조벽 같은 자를 오른팔로 뒀기 때문이겠지요.”
“이 자식! 죽여 버린다!”
사마천이 달려들어 갈사량의 멱살을 잡으려고 했다. 내가 그를 제지해서 뒤로 물러나게 했다.
사마천은 내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냥 갈사량을 지켜주러 온 사람으로 여겼다.
“침착하시오.”
“내가 지금 침착하게 생겼나?”
“그래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길길이 날뛰다가 날려버리겠다고?”
그 말에 사마천이 흠칫 놀랐다.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고?”
“나는 여전히 무림맹의 총군사이고, 맹주 자리는 비어 있소.”
다시 말해 뇌옥에 갇힌 죄수 하나쯤은 충분히 빼내 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막말로 그가 반란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으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맹주를 죽인 것이 자네인가?”
“아니오.”
“그럼 누군가?”
“배후에 있던 자들이오. 당신도 그들 존재를 알고 있었을 텐데?”
사마천은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사실 그도 배후의 실체를 느끼고 있었다. 다만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모른 척했을 뿐이다. 결국 자신이 뇌옥에 갇힌 것도 그 무책임과 자기기만의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넨 나를 속였군.”
자기 밑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며 한물간 군사처럼 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날카로운 갈사량의 모습을 보니 그 모든 것들이 다 거짓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를 다시 총군사 자리에 앉힌 사람은 당신이 모시던 마봉기였소.”
“멍청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그 대상은 물론 마봉기였다. 자신을 다시 꺼내줄 생각을 안 하고 갈사량을 총군사에 앉힐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이지 죽어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마천은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더는 이 지옥 같은 뇌옥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어떻게 나를 꺼내준다는 말인가?”
“질문이 잘못되었소.”
갈사량이 그를 응시하며 차갑게 덧붙였다.
“당신은 이렇게 물어야지. 내가 무엇을 해줘야만 나를 꺼내줄 것인가?”
* * *
갈사량과 내가 거처로 돌아왔을 때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방문자는 바로 칠호였다.
“여긴 어쩐 일이시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오래 기다리셨소?”
“아뇨, 방금 왔어요. 안 계신 것 같아서 이제 막 돌아가려고 했는데, 마침 오셨네요.”
그녀답지 않게 부연설명까지 했다. 아마 오래 기다린 모양이다.
갈사량이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었다.
“나는 피곤해서 먼저 쉬어야겠네.”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밖으로 나가지는 못할 것 같소. 여기서 이야기해도 되겠소?”
“괜찮아요.”
그녀와 마당을 산책했다. 작은 마당이지만 곳곳에 나무와 꽃들이 보기 좋게 자라고 있었다.
물론 이곳에 설치된 흑암거해진은 현재 닫혀 있었다. 만약 진법을 발동시키면 이곳은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는 죽음의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물론 진법이 완성되면 그땐 더 무서운 곳이 될 테고.
“고마웠어요.”
“뭐가 말이오?”
“이름 지어 주신 것이요.”
“아, 괜한 짓을 한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소.”
“아뇨. 그 이름 마음에 들었어요.”
“다행이오.”
“그날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못 한 것 같아서…….”
그때 갑자기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 당황한 것은 내가 아니라 오히려 그녀였다.
“어?”
마치 눈물을 처음 흘려본 사람처럼 그녀는 당황했다.
“왜 갑자기 눈물이 나죠?”
슬픔이 차올라서 천천히 나온 눈물이 아니라 갑자기 울컥하면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 모양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온 것 같았다.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을 처음 본 사람처럼, 그녀가 손바닥에 떨어지는 눈물을 바라보았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던 바로 그때였다. 낯익은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도련니이이이이임!”
돌아보니 광두가 나를 부르며 달려오다가 칠호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어?”
광두 뒤에 송화린이 서 있었다.
칠호와 내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보자 모두들 놀란 표정이었다.
그들의 등장에 칠호가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여인이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자 모두들 놀랐다.
송화린도 당황했고, 광두도 당황했다. 수란은 아예 인상까지 굳혔다.
그곳에 침묵이 흘렀다.
“여자도 다 울리고. 남자네요, 우리 도련님.”
광두의 실없는 소리에 언제나 웃어준 송화린이었지만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다시 흐르는 침묵.
이윽고 송화린이 천천히 칠호에게 걸어가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송화린이라고 해요.”
뜻밖에 송화린은 그다지 당황하거나 화난 기색이 아니었다.
칠호가 정중히 인사를 받았다.
“저는…… 백련이에요. 그럼 전 이만.”
“네, 다음에 봬요.”
그곳을 빠져나가는 칠호에게 수란이 쏘아보며 말했다.
“우리 아가씬 벽공자의 약혼자이십니다.”
약혼자란 말에 칠호가 흠칫 놀랐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벽군사와는 아무 관계도 아니니까요.”
오히려 그 말이 더욱 오해를 불러일으킬 상황이었다.
칠호가 빠르게 걸음을 옮겨 그곳을 걸어 나갔다.
어느새 다가온 광두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바람둥이.”
“오해야.”
“거짓말쟁이 바람둥이.”
이번에는 송화린이 내게로 다가왔다. 앞서 칠호를 대했던 것처럼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잘 지냈어?”
“덕분에. 연락도 없이 왔네?”
“광무인이 기별 없이 오면 더 놀랄 거라고 해서. 정말 놀라긴 했네.”
내가 광두를 쳐다보았다. 광두가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렸다.
“우리가 묵을 방이 있어?”
“당연히. 들어가서 왼쪽 끝 방을 쓰면 돼.”
“고마워.”
송화린이 수란을 데리고 건물로 들어갔다. 차분해도 너무 차분했다.
저 멀리 사라지는 송화린을 보며 내가 광두에게 물었다.
“별로 안 좋아 보이지?”
“네.”
“얼마나?”
“원수를 죽이러 가기 전날 밤, 결전전야의 고요함이랄까요.”
농담만은 아니었기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광두가 위로하듯 말했다.
“도련님, 그냥 한평생 저랑 같이 살아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너랑? 도순이는?”
“도순이가 누군데요? 이름 참 촌스럽네요.”
“또 잘 안 되었구나.”
이번에는 광두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자면 길어요. 아, 도련님. 그냥 우리끼리 살아요. 여자 없는 세상에서. 우린 잘 살 수 있어요! 질투와 오해가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자고요!”
웃어선 안 될 상황이었지만 결국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건물을 향해 걸어가자 광두가 뒤에서 물었다.
“어디 가세요? 설마 송소저에게 오해 풀러 가시는 것은 아니죠?”
내가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너랑 살 수는 없으니까.”
“배신자!”
“송소저를 놓치지 말라고 적극 밀었던 네 지난날을 생각하면 누가 배신자일까?”
광두가 웃으며 내 뒤를 따라왔다.
“제 방은 어딥니까?”
* * *
그날 밤, 나는 송화린과 마당에 나와 있었다.
왔다 갔다 말없이 달빛 산책을 즐기다가 결국 내가 먼저 물었다.
“화 안 났어?”
“내가 화내야 할 상황인가?”
“아니라면 다행이고.”
그녀는 여전히 담담하고 차분했다. 그녀가 담벼락 아래 화단에 쪼그리고 앉아서 꽃을 쳐다보았다.
“알다시피 나는 무남독녀로 자랐어. 아버지는 아들을 간절히 원하셨지. 내게 한 번도 표현하진 않으셨지만 나는 알고 있었어.”
그랬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특히 무림문파의 수장이라면 후계자를 생각해야 했으니까.
송우경이 나를 좋게 생각하는 마음에는 아버지와의 친분 이외에도, 한시 빨리 든든한 사위를 얻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아들 역할을 하려고 많이 노력했어. 여자라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혹은 우리 가문에 짐이 되고 싶진 않았지. 겁이 많이 났지만 그래도 꾹 참고 멀리 무공을 배우러 간 것도 그런 이유였고. 뭐 그건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지
만.”
그녀는 이제 사부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난 누군가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설령 그것이 너라 해도 말이야.”
지난번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저런 마음이 그녀에게 어떤 삶의 한계로 작용하고 있음을.
실제로는 아무도 짐이라 생각하지 않는데, 스스로 만들어 낸 족쇄 같은 것.
나는 그에 대해서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다. 한계는 스스로 깰 때,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니까.
“아까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봤을 때, 너에 대한 내 마음을 알았어.”
“어떤 마음인데?”
그녀는 미소를 지을 뿐 그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그날 내게 말했지? 어떻게 될지 가보자고.”
산동으로 오던 날, 그녀와 이별하며 해줬던 말이었다.
“그랬지.”
“나, 이제 진짜로 가보고 싶어졌어.”
달빛에 반짝이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지난 삶과 이번 삶을 겪으면서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인생은 목표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인생은 여정에 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