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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단전에 모이면(2)
계단을 모두 내려가 바닥에 내려서자 위쪽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그곳은 어두웠다. 하지만 벽에 희미한 표시가 나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는 성분이 벽에 발라져 있었던 것이다.
벽을 따라가니 작은 탁자 위에 화섭자가 놓여 있었다. 화섭자로 벽 곳곳에 달려 있는 등잔에 불을 붙였다.
내부 구조는 단순했다. 중심에 방이 하나 있었고 그 뒤쪽으로 통로가 하나 있었다. 입구 쪽이 막혔을 때 빠져나갈 통로인 모양이었다.
통로의 끝은 막혀 있었는데, 부수고 나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곳을 부수는 순간, 이곳은 안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다시 가운데 방으로 돌아왔다.
작은 침상이 하나 있었고 그 위에 등에 멜 수 있게 된 혁낭이 놓여 있었다.
침상이 있는 이유는 부상이 심각한 경우 이곳에 누워서 쉬란 뜻이리라.
필요한 물건은 혁낭에 들어 있을 것이다.
물건들을 모두 혁낭에 넣어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적들에게 쫓기는 상황이라면 이곳에 와서 혁낭만을 가지고 곧장 뒤쪽 통로로 뛰쳐나가란 의도인 것이다. 그야말로 이곳은 비상시에 사용하는 안가였다.
갈사량이 이곳을 특별하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 혁낭 속에 든 물건 때문이 아닐까?
나는 조심스럽게 혁낭에 든 물건을 하나씩 꺼냈다.
우선 가장 먼저 손에 잡힌 것은 약병들이었다. 꺼내서 살펴보니 내상과 외상을 치료하는 약들이었다.
참으로 세심한 배려란 생각이 들었다. 부상을 당했을 때, 가장 먼저 찾을 수 있게 가장 위쪽에다 넣어둔 것이다.
절대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곳이니, 아마도 갈사량이 직접 혁낭을 준비했을 것이다. 정말이지 그의 꼼꼼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독을 해독하는 해약이 있었다. 내가 만독불침이긴 했지만 혹시라도 부상이 심해 몸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를 대비한 모양이다.
다음에 든 것은 붕대로 사용할 깨끗한 천이었다. 역시 부상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리고 깨끗한 속옷과 갈아입을 무복이 두 벌 있었다. 하나는 회색이었고, 다른 하나는 검은색이었다.
가령 피 묻은 무복을 갈아입는다면, 낮이라면 강호인들이 가장 많이 입는 회색을 입고 나가고, 밤이면 눈에 띄지 않는 검은색 무복을 입으라는 배려였다.
중원의 중요장소를 표시한 지도와 유엽비도(柳葉飛刀) 열 자루가 든 암기상자, 어디서나 쓸 수 있도록 소액전표로 이천 냥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내가 원한 것이 들어 있었다.
어른 팔뚝 길이의 나무 상자였다. 분명 영초가 든 상자였다.
나는 살짝 실망했다. 영초 한 뿌리로 일 갑자를 채우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든 것을 보고 나는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아!”
놀랍게도 안에 든 것은 바로 만년설삼이었던 것이다. 영초 중에서도 최상급이라 할 수 있는 바로 그 만년설삼이다.
보통의 경우 일갑자 반, 그러니까 구십 년의 내공을 올려주는 희대의 영초였다.
물론 그것은 내공이 평범한 경우의 기준이었다. 지니고 있는 내공이 많을수록 영약으로 얻을 수 있는 내공의 양은 줄어든다.
내가 지닌 내공이 이 갑자니까, 구십 년의 내공을 다 흡수하진 못할 것이다. 내가 필요한 내공의 양은 일 갑자인 육십 년.
과연 이 한 뿌리로 얻을 수 있을까?
가능할 것도 같았고, 약간 모자랄 것도 같았다.
해보는 수밖에.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그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삼 갑자의 내공에 이르는 것은 내게 있어 아주 특별한 일이었으니까.
내가 천천히 만년설삼을 복용했다.
정말 오랜만에 먹어보는 만년설삼이었다. 실제 맹주 시절에도 만년설삼은 한 뿌리만 먹어보았다. 그만큼 귀한 영초인 것이다.
스스스스스스.
영약의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천무호심결을 발휘하면서 그 기운을 모두 흡수했다.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기운이 되어 온몸의 혈맥을 내달렸다. 벽리단으로 다시 태어나서 복용한 그 어떤 영약보다 강력한 기운이었다.
나는 그것이 마음껏 내 몸을 내달리도록 놔두었다.
솨아아아아악.
다른 영약과는 기분이 달랐다. 고급스러운 비단옷을 걸친 것처럼, 보검을 손에 든 것처럼, 잘 달리는 명마를 타고 내달리는 것처럼,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내게 멋진 기분을 선사한 후, 만년설삼의 기운이 단전으로 모여들어서 기존의 내공과 하나가 되었다.
내가 천천히 눈을 떴다.
복용하기 전보다 더 떨리는 마음으로 단전의 내공을 살폈다.
“됐다!”
운명이 짜놓기라도 한 것처럼, 단전의 내공은 정확히 삼 갑자였다. 육십 년 내공을 흡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아!”
하늘을 날아갈 듯이 기뻤다. 이제 드디어 육초식 대멸겁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대멸겁은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초식이었다. 그 엄청난 위력도 위력이지만, 진기를 다스리는 것이 워낙 까다롭고 어려워서 잘못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내상을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생에서도 실전에서 사용한 것은 혈천신교의 교주를 상대했을 때뿐이었다.
드디어 나는 전생의 무공을 모두 회복했다.
만약 누군가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면, 나는 그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밖으로 나왔을 때, 갈사량은 저 앞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나온 것을 보자 그가 긴장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지만 대답을 듣기 전에 내 표정에서 결과를 알아차렸다.
“감축드립니다.”
“고맙소. 다 갈군사 덕분이오. 안에 있던 혁낭, 직접 준비하셨소?”
“네, 그렇습니다.”
과연 내 예상대로였다.
“어떻게 그 귀한 만년설삼을 넣어둘 생각을 하셨소?”
“당시 맹주님은 이미 천하제일인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안가로 피해야 할 상황이라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겠지요. 만약 그렇다면 적어도 만년설삼쯤은 있어야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정말 현명하신 생각이셨소.”
“물론 당시의 맹주께서는 만년설삼이 필요치 않은 상황이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요.”
“덕분에 삼갑자에 이르렀소.”
“정말 감축 드리옵니다. 드디어 추혼수라검법의 마지막 초식을 사용할 수 있게 되셨군요.”
그에게 대멸겁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함부로 사용했다간, 내상을 입을 위험을 떠나 이곳 소망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소망이 담긴 이곳을 그렇게 날려버릴 수는 없는 일.
정말 고맙다, 사량아.
갈사량이 이곳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이런 준비를 해두지 않았다면 절대 이룰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내가 웃으며 그에게 광오한 농담을 던졌다.
“혹시 죽이고 싶은 놈이 있소? 만약 그가 인간이라면 내가 반드시 죽여주겠소.”
* * *
소망평을 떠난 우린 곧장 거처로 돌아왔다.
“자, 이제 마양화와 마궁태를 처리합시다.”
그것이 우리가 수면 위로 부상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였다.
“그들이 보낸 고수들이 무한 인근에 흩어져 있습니다. 아마 즉위식이 있는 날, 그 혼란을 틈타 움직일 것 같습니다.”
“혹 생각해 두신 방안이 있소?”
“그들의 약점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약점 말입니까?”
“서로 힘을 합쳤다 하더라도 마봉기의 혈육들은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이 점을 이용하면 놈들을 자중지란에 몰아넣고, 나아가 배후 인물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겁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후에 천소선이 있을 거요.”
나와 갈사량은 그에게 마봉기가 죽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때 본 천소선의 느낌은 매우 특별했다.
나이는 젊었지만 보통이 아님을 나는 알고 있었다.
당시 그를 만났을 때, 놈의 진면목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물론 놈도 나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했다. 실력이 거의 같다는 뜻.
물론 이번에 내공이 삼 갑자가 되고 육 초식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내 실력은 그보다 한 수 위가 되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우리가 제거해야 할 사람은 천소선의 뒤에 있는 자요.”
이번 음모는 아주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온 것이다. 천소선 뒤에 반드시 노회한 누군가가 존재하고 있다. 전대의 괴도였던 천보명과 관련이 있는 어떤 자가.
“항상 그자가 있음을 염두에 두시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가 알아내야 할 것이 있소.”
“무엇입니까?”
“사형은 만독불침의 경지에 이른 상태였소. 한데 대체 어떻게 죽인 것이겠소?”
이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할 부분이었다. 나 역시 만독불침이다. 하지만 이 만독불침을 깰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다면, 현재의 나도 위험할 수 있었으니까.
갈사량이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역시 염두에 두고 있겠습니다.”
“고맙소.”
갈사량이 있어 든든했다. 그가 없었다면 이 모든 것들을 내가 다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머리를 쓰는 일들은 그에게 맡겨두고, 나는 무공과 주위 사람만 챙기면 될 것이다.
“그들이 나에 대해 알아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저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혀내야 하오.”
* * *
노인과 천소선은 바둑을 두고 있었다.
“행마(行馬)는 빠르고 경쾌한 것이 좋다. 지금 네 행마는 답답하기만 하구나.”
노인의 말에 천소선이 대답했다.
“신물경속(愼勿輕速)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은 바둑의 위기십결 중 하나로 서두르지 말고 신중하게 두라는 말이었다.
그들이 바둑을 두고 있는 장소는 예전의 그 동굴이었다. 한옆 청옥 침상에는 소년이 누워 있었고, 근처 널따란 바위 위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신중함과 답답함은 엄연히 다른 것이지.”
“피강자보(彼强自保)라고도 했지요.”
역시 위기십결에 있는 말로 상대가 강한 곳에서는 우선 안전을 도모하란 말이었다.
노인이 고개를 들어 천소선을 응시했다. 천소선이 자조적인 미소와 함께 말했다.
“사실 바둑에는 영 흥미가 가질 않습니다.”
“요즘 초조하더냐?”
“그래 보입니까?”
“평소의 너답지 않구나. 혹 갈사량 때문이냐?”
“처음에는 천하진 아래에서 머리나 굴리던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데 제가 예상한 역량보다 훨씬 뛰어난 자였습니다.”
“그래봤자 지나가는 바람이고 파도일 뿐이다.”
“태풍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나 바다에서 부는 태풍에 육지 사람이 죽는 일은 없다.”
“해일이 되어 범람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제가 직접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안 된다!”
노인이 버럭 목청을 높였다.
“태풍은 그냥 바다에서 불게 놔둬라. 해일이 일면 그땐 이 할애비가 막아주마. 그러니 너는 직접 바다에 뛰어들지 마라.”
천소선은 자신의 조부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눈도 깜짝하지 않고 수백 명의 사람을 죽여 버리는 사람이었다. 잔혹하고 비정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더없이 좋은 사람이었다.
때론 무서울 때가 있다.
혹시라도 저 인자한 마음에도 어떤 다른 독심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지. 결국은 가까운 사람마저 찌르고 마는, 어쩔 수 없는 본질적인 악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할아버지에게는 없는데…… 어쩌면 그것이 자신에게 있는 것은 아닌지.
바로 그때였다.
스르륵.
침상 위의 소년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에게로 걸어갔다. 천소선은 뒤에 물러선 채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했다.
아이는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주 잘생긴 소년이었다.
가까이 다가간 노인이 말했다.
“오늘은 기분이 어떻소?”
친근하면서도 정중한 어조였다. 결코 아이에게 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아이가 노인 쪽을 돌아보았다. 텅 빈 눈동자는 이상하게 무서웠다.
“……기분이 좋지 않다.”
말에 이상한 울림이 있었다. 동굴 속이라서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아이의 인상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프다.”
고통이 심해지는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끄아아아!”
점차 비명이 커졌다.
“조금만 참으시오.”
노인이 품에서 작은 약병을 하나 챙겨서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가 허겁지겁 약을 마셨다.
약을 마셨지만 아이는 한참 동안을 머리를 감싸 쥐고 고통스러워했다. 노인이 그를 안은 채 한참을 다독인 후에야 아이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노인이 아이를 다시 침상에 눕혔다.
아이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잠들기 직전 아이가 말했다.
“……너는 누구냐?”
그 말을 끝으로 잠이 들었고 다시 원래대로 아주 평온한 상태가 되었다.
그제야 천소선이 침상 쪽으로 다가왔다.
“약이 점점 듣지 않고 있다.”
“괜찮을까요?”
“어떻게든 견디게 해야지.”
노인의 시선이 천소선을 향했다.
“멀리 보고 크게 봐라. 이번 일이 성공하기만 하면 저 먼 바다의 태풍 따윈 부채 바람에 불과하게 될 테니 말이다.”
노인의 두 눈에서 야망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긴 세월의 염원이 담긴 그것은 영원히 꺼질 것 같지 않은 뜨거운 불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