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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천마-48화 (48/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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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도 눈물도(3)

다시 양소방주 정여를 만났다.

그는 내가 금고를 털어내는데 성공한 것을 크게 기뻐했다.

“벽공자께서 반드시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또한 그리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방주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오.”

“제가 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다 벽공자가 하신 일이지요.”

“그대가 비밀통로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어찌 내가 시곤보다 먼저 그 방에 가 있을 수 있었겠소? 다 정방주 덕분이오.”

내가 공을 그에게 돌리자 정여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의 적극적인 도움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놈들이 그대를 의심하지는 않고 있소?”

“다행히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애초에 놈들은 우릴 촌방파의 촌놈들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감히 중원오세에 덤빌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 지역방파의 그 누구도 그러지 못했으니까.

“놈들은 지금 어떻소?”

“산동상회에 선을 대려는 듯 보였습니다.”

산동상회는 일전에 송가장을 끌어들이려다 실패한 바로 그곳이었다.

산동상회는 힘이 필요했고, 마정수는 돈이 필요했으니까 그야말로 절묘한 조합이라 볼 수 있었다.

“산동상회를 끌어들이면 돈문제가 해결되겠군.”

“그렇습니다. 어쩌면 더 많은 돈이 흘러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왜 웃으십니까?”

“그럼 내가 더 많은 돈을 얻을 수도 있지 않소?”

“하하하.”

정여가 기분 좋게 웃었다. 농담으로 받아들였지만 나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기왕 대롱을 꽂았으니 제대로 빨아야지.

게다가 산동상회는 애초에 내 눈밖에 난 상회다. 자신들이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송가장을 이용해 먹으려고 했으니까. 일부러라도 가서 응징해야 할 상대였는데, 이렇게 마정수의 일과 얽히는 것이다.

“정보상에 산동상회와 관련된 것을 의뢰해 두었습니다.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고맙소.”

정여는 내게 충성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 덕분에 방주가 되었기에 베푸는 호의로 보기에는 너무나 적극적이고 큰 충성심이었다. 당장 이번 금고 일만 해도, 잘못되면 자신의 목숨이 달아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는 이제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정방주.”

“네.”

“그대의 꿈이 양소방을 잘 키우는 것이라고 했소?”

“그렇습니다.”

“더 큰 꿈을 꾸고 싶은 생각은 없소?”

순간 정여가 흠칫했다. 내 물음이 어떤 의미인지 그는 대번에 알아들었다. 함께 대업을 꿈꾸지 않겠느냐는.

“저를 믿으십니까?”

정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좀전의 내 물음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음을.

“잘 모르겠소.”

“한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그대는 한 번쯤 믿어보고 싶은 사람이니까.”

지난 생에서는 나는 아무나 믿지 않았다. 여러 검증의 과정을 거쳤고, 내가 아니면 갈사량이 그 일을 맡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는 언제나 건조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마치 내가 죽는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믿었던 이들이 돌아섰다.

이제와 생각하니 그들과 나의 관계는 충성으로 맺어진 것이 아니었다.

우리 관계를 유지시킨 것은 공포였다.

내게 잘못 보이면 끝장이 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관계의 핵심에는 믿음 대신 그것이 있었던 것이다.

이십 년이 넘는 그 관계는 만난 지 일 년도 안 되는 정여와의 관계보다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 생에서의 인간관계는 좀 다르게 가져가 보려고 한다.

검증이나 확신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본능에 따르려는 것이다.

“한 번쯤 믿어보고 싶은 사람이라…… 어쩌면 그것은 제 마음과도 같군요.”

정여가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그 역시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가 나를 믿는다고 했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것이다.

그래, 이게 그와 나의 정확한 거리다.

날 도와줬다고 더 가까이 있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내 제안을 거절했다고 너무 멀리 있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전에 그대가 그랬소. 자신이 그렇게 선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네, 그랬지요.”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것은 선함이 아니오.”

이미 선한 사람은 내 옆에 있었으니까.

“배신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낼 사람이 필요하오.”

어쩌면 이 말에 그가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진심이자 진실이었다.

“그대에 대한 기대는 거기서부터 시작하겠소.”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정여가 담담히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오. 몇 달이 걸려도 좋고, 몇 년이 걸려도 좋소. 충분히 하시오.”

“감사합니다.”

정여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그가 옆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이 현재 그가 내게 내어준 거리다. 이 거리가 어떻게 변할지는 그의 결정에 달렸으리라.

* * *

화선노대를 제거하기에 앞서 한 사람을 찾아야 했다.

광두의 말에 따르면 제남에서 여러 사건들이 터질 때, 화선노대는 자신의 소재를 증명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는 말은 누군가 수족처럼 부리는 자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긴, 화선노대가 직접 그 일을 했을 리는 없겠지.

누군가 분명 그의 손발이 되어 주는 자가 있다.

마정수와 함께 내려온 상황에서 자신의 수족을 드러내놓고 부릴 수는 없을 테니까, 아마 인근에서 대기하며 명령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 놈부터 찾아내야 한다. 놈의 입을 통해서 그 일이 자신이 저질렀고, 화선노대가 시킨 일임을 자백 받아야 할 것이다. 추측만으로 놈들을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또 다시 새 인피면구를 하나 구입했다. 이 일에 양소방에 출입하는 면구를 사용할 수는 없었으니까.

이번에는 상급 면구로 샀다. 한 번 쓰고 버릴 것이 아니었다.

면구는 철저히 봉해진 상태로 판매되기 때문에 그것을 파는 잡화상 주인도 그것이 어떤 얼굴인지 알 수 없었다. 당연히 사는 사람도 그것이 어떤 얼굴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성별과 나이 대는 고를 수 있다. 이번에 내

가 산 면구는 삼십 대 남자의 얼굴.

물론 돈을 조금 더 주면 몇 가지 특징이 있는 면구를 고를 수는 있다. 예를 들자면 칼자국이라거나 화상자국 같은 것들.

예전에는 면구 전문가가 일일이 분장하듯 면구를 만들어 줘야했는데, 이젠 이렇게 편한 시대가 된 것이다. 게다가 품질 역시 놀랄 정도로 좋다. 정말 상급면구는 누가 봐도 구분이 가지 않았으니까. 물론 값은 비쌌지만.

나는 새 얼굴로 화선노대를 미행하며 관찰했다. 그의 무공실력이 보통이 아니었기에 미행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미행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었기에 최대한 멀리서 그의 동선만 파악했다.

화선노대는 참으로 부지런하고 계획적인 사람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인근의 대숲을 산책하고, 아침을 먹고, 다루에서 차를 한 잔 마신 후에 일을 시작했다.

그는 여기저기 부지런히 오갔다. 주로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저 바쁜 모든 일들이 제남의 비극처럼 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나흘째 되던 날, 나는 드디어 꼬리를 포착했다.

매일 아침 산책하는 대숲에서 누군가와 접선하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나는 대숲으로 따라 들어가지 않았고, 멀리 밖에서 그의 산책을 지켜보았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선노대가 떠나고 나서도 계속 기다려보았다.

그러자 대숲에서 어떤 사내가 나왔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그 사내는 화선노대가 떠나고 일정한 시간 후에 대숲에서 나왔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공교로웠고 나오는 시간도 일치했다.

미행한지 닷새가 되던 오늘, 화선노대가 떠나고 나는 곧장 대숲으로 들어갔다.

촤아아아아아아아.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소리가 마치 물소리처럼 들려온다.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길 끝에서 그 사내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산책 나온 사람처럼 여유롭게 길을 걸었다. 사내도 계속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렇게 서로 스쳐지나가던 바로 그 순간.

쇄애애애애액.

사내의 검이 뽑혀 나오며 내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빠른 발검 속도, 사내는 상당한 실력자였다. 하지만 놈에게는 불행하게도 나는 방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꽈악!

검이 허공에 딱 멈췄다. 내 손이 사내의 팔목을 붙잡은 것이다. 상대가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죽이려는 것만 봐도 놈이 어떤 자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놈의 팔을 비틀었다. 그가 내공으로 버텼지만 내 내공을 감당하지 못했다.

꽈드득.

팔이 수수깡처럼 비틀리며 부러졌다.

“끄아악!”

사내는 비명을 내지르며 검을 떨어뜨렸지만, 그 와중에도 다른 팔의 손가락으로 내 눈을 찔렀다.

재빨리 손가락을 낚아채며 그것도 부러뜨려 버렸다.

꽈드득.

“윽!”

사내의 입에서 다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제 그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없었다.

퍽! 퍽! 퍽! 퍽!

내 주먹이 연이어 놈의 옆구리와 가슴에 박혔다. 놈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끄으으으.”

사내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방금 들어간 주먹에 몇 대의 늑골이 부러진 것이다. 물론 목숨과는 상관없는 곳을 의도적으로 부러뜨렸다.

놈이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누구냐?”

“누군지도 모르면서 죽이려고 했냐?”

적어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놈이었다. 다짜고짜 나를 죽이려 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보통 이런 부류들은 오히려 제 목숨은 정말 소중히 여기는 자들이 많다. 만약 그렇다면 다루기 쉬울 것이다.

“살고 싶냐?”

사내가 대답을 망설였다.

스르릉.

내가 검을 뽑아서 치켜들었다. 단칼에 베어버리려고 하자 사내가 다급히 말했다.

“살고 싶습니다!”

나는 검을 쳐든 채로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무관 부지와 관련해서 제남에서 저지른 살인, 화선노대가 시킨 일이냐?”

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말을 했다간 화선노대에게 죽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하지만 이미 그는 몸의 반응으로 대답을 한 상태였다.

대답을 망설이자 사정없이 검을 내리쳤다.

“잠깐!”

파앗!

검이 녀석의 어깨에 박혔다. 검날이 박힌 어깨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내가 멈추지 않았다면 어깨가 잘리며 죽었을 것이다.

놈은 내 손속에 사정이 없음을 알아차렸다.

“내가 응징하려는 자는 화선노대다. 화선노대도 이렇게 목숨 걸고 너를 지켜주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

사내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화선노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모든 일은 화선노대가 시킨 일입니다.”

어깨에 박혔던 검을 뽑았다.

피가 뿜어져 나오는 어깨를 혈도를 눌러 지혈해 주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입을 열었으니까 살려주겠다는 행동처럼 보였기에 사내는 모든 사실을 고백했다.

“직접 사람을 죽이란 명령은 내리지 않았습니다만 헐값에 땅을 사기 위해서 어떤 일도 마다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영리한 화선노대는 절대 직접적인 살인명령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칼잡이 사내에게 어떤 일도 마다하지 말라는 명령은 그게 곧 살인명령이었다.

“화선노대와는 매일 만나나?”

“네.”

언제나 처음이 어렵지, 한 번 입을 연 사내는 술술 대답했다.

“오늘은 무슨 말을 전했지?”

“이번에 함께 내려온 여인이 있습니다. 요즘 계속 그녀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도 필요한 정보였다.

“같은 편이 아니었나?”

“네, 그 여인은 무림맹주 마봉기가 딸려 보낸 여인입니다.”

“여인이 함께 온 이유는?”

“마정수를 감시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래서 그녀에 관해 알아낸 것은?”

“없습니다. 여러 곳에 수소문해서 알아보고 있지만 그녀의 인상착의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평소에는 뭘 하고 지내나?”

“양소방에 머물 때도 있고,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질 때도  있고. 행동 역시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현재 가장 위험한 존재는 바로 그녀다.

강호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나보다 강한 상대가 아니다. 바로 정체를 모르는 적이다.

“내일도 이곳에서 화선노대를 만나기로 했나?”

“그렇습니다.”

“따로 접선 방법이 있나? 암어라든지?”

“아뇨, 없습니다. 저 안으로 조금 더 걸어가시면 작은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그곳에 먼저 기다리고 있으면 노대가 옵니다.”

“알겠다.”

“그럼 저는?”

기대에 찬 그의 눈동자에 내 손바닥이 날아드는 모습이 비쳤다.

퍼억!

내 일장에 사내의 두개골이 부서졌다. 그는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내가 살려줄 것이라 믿었기에 그는 억울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살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화선노대가 시킨 일인지 확실히 하기 위해 잠시 살려주려는 척 했을 뿐이다.

죽어 마땅한 자다.

아무리 명령이라지만 선량한 사람의 땅을 빼앗기 위해 무공을 모르는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아이와 노인을.

놈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걱정마라, 내일 아침에는 네 주인을 만날 수 있을 거다.”

물론 너희들이 볼 광경은 이 아름다운 대나무가 아니라 불이 이글거리고 긴 꼬챙이에 악인들이 꽂혀 있는 광경이겠지만.

하나씩, 하나씩 다 보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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