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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도 눈물도(2)
송화린이 동경 앞에 섰다.
처음보단 붓기가 많이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얼굴은 부어 있었다.
참으로 낯선 느낌. 같은 사람인데 얼굴이 부었다고 이렇게 다르게 보이다니?
그때 뒤에서 수란이 말했다.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응?”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던 모양이다.
“애도 아니고 얻어터졌다고 울 수는 없잖아?”
“전 벽공자를 용서할 수 없어요.”
“그러냐?”
“아가씨! 남의 일처럼 말씀하시지 마세요. 이건 중대한 사건이라고요.”
“이번 일로 그 사람을 원망할 생각 없다.”
송화린은 그날 이후 하루에도 몇 번이나 그 싸움을 떠올렸다.
“어려서부터 무공을 배우면서 숱한 비무를 했지만 그런 비무를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 비무는 뭐랄까…….”
정말 싸우는 것 같았다. 아니, 진짜 싸우는 것보다 더 진짜로 싸우는 것 같았다.
“그는 나보다 강하다. 그것도 훨씬.”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속상한 마음에 던진 말이었지만, 그날 비무를 지켜보았기에 수란도 알 수 있었다. 벽리단의 무공이 더 강하다는 것을. 송화린보다도, 자신보다도 더 강했다.
“그날 바닥에 쓰러져 있는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니?”
“무슨 생각이 드셨습니까?”
“후련했어.”
“네? 후련하셨다고요? 대체 왜요?”
깜짝 놀란 수란에 반해 송화린은 담담했다.
“가슴 속에 맺혀 있던 것이 내려가는 기분이었어. 그런 기분 이해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게 좀처럼 잘 안 되는 거야. 왠지 내키지 않고, 귀찮고. 하긴 해야 하는데, 그러다 시간만 자꾸 가고. 그런데 그 날, 그렇게 미루
고 미뤘던 일을 해치운 후련함을 느꼈어. 일 년 만에 목욕을 하고 나오는 그런 기분?”
“맙소사! 그게 두들겨 맞는 일이었다고요? 전 이해할 수 없어요.”
송화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도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데…….’
처음에는 그 후련함이 초식의 약점을 알아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단지 그 이유 때문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벽리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때론 완전히 인정해야만 벗어날 수 있는 일들도 있는 법이니까.”
그때 자신은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었다. 자신은 절대 변화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동경을 바라보았다.
퉁퉁 부은 얼굴.
어쩌면 동경 속 자신의 모습에서 변화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평소라면 수란처럼 화를 냈을 일인데, 화를 내지 않고 있는 마음의 변화에 기뻐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자신이 가장 바랐던 것은 ‘변화’가 아니었을까?
송화린이 천천히 창쪽으로 걸어가다가 휘청했다. 수란이 달려가서 부축하려 하자 송화린이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혼자 힘으로 창까지 걸어간 그녀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뜨거웠던 여름은 어느새 다 타버리고 이제 소슬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참 좋네.”
* * *
기다렸던 광두가 돌아왔다.
녀석은 평소와는 달리 진중하고 심각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 이유가 분노 때문임을 느낄 수 있었다.
“말씀하신대로 마정수가 제남 외곽에 무관을 지을 땅을 사들였습니다. 이미 계약이 끝난 상황이었고, 조만간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광두는 정확한 위치와 규모, 공사에 들어갈 인원들까지 모두 알아왔다.
광두를 화나게 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런데 마정수는 그 땅을 아주 헐값에 사들였습니다.”
“얼마나?”
“터무니없이 싼 값으로요.”
“주인이 팔려고 하지 않았을 텐데.”
“맞습니다. 원래 땅주인이 팔지 않으려고 했답니다. 한데…….”
광두가 화난 얼굴로 말했다.
“계약을 거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가 나서 그의 막내딸이 죽었답니다.”
“사고?”
“집에 불이 나서…….”
생각만 해도 울컥했는지 광두가 잠시 말문을 잇지 못했다.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광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다음 달에는 큰 아들이 낙마해서 크게 다쳤고, 땅주인의 늙은 모친이 음식을 잘못 먹고 급사했습니다. 땅 파는 것을 반대했던 총관은 취객의 칼에 찔려 죽을 뻔 했고요. 무림맹 지부에 알렸지만 사건의
연관성을 찾지 못한 모양입니다. 결국 땅주인이 땅을 팔았고, 그 길로 가족들을 데리고 제남을 떠났다고 합니다.”
광두가 주먹을 불끈 쥔 채 부르르 떨었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광두는 이 모든 것이 의도된 사고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이 옳다. 우연이 이렇게나 겹칠 리가 없지.
내 마음은 이미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 분노를 드러내지 않았다.
“마정수가 직접 와서 계약한 것이냐?”
“아닙니다. 계약을 주도한 사람이 화선노대였다고 합니다.”
이 비열한 늙은이가!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외부의 인사다. 마정수의 눈에 들어가려면 공을 세워야 했을 것이다.
화선노대는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저질러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른 것이다.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나면서도 한편으로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사람이 아니라서 그렇다. 그런 짓을 저지르는 자가 어찌 사람이겠느냐?”
“도련님! 혼내주십시오. 정말 혼내주십시오. 아직은 제가 힘이 부족해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광두의 두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광두를 만난 이후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진짜 화를 내고 있었다. 자신이 모욕을 당했을 때보다 훨씬 더.
“그러마.”
나의 짧은 한 마디. 하지만 백 마디 말보다 더 확실한 대답이었다.
광두가 내 대답에 담긴 의지를 읽었다.
“고맙습니다, 도련님.”
녀석은 성장하고 있었고, 진짜 강호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 분노해야지. 이런 악행을 응징하기 위해 우리가 무공을 갈고 닦는 것임을 깨달아야지.
“이번에 확실히 느꼈습니다. 약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요. 제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이 무기력함이 너무 싫습니다.”
“그 무력감을 좀 줄여주마.”
“네?”
내가 한 옆에 있던 혁낭에서 상자를 꺼냈다.
“열어봐라.”
“이게 뭡니까?”
광두가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든 것은 세 뿌리의 활력백시호였다.
“이 풀뿌리는 뭡니까?”
“강호에서 말하는 영약이다.”
“헉!”
광두가 화들짝 놀랐다. 상자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이게 영약이라고요?”
“아주 좋은 것은 아니고. 하급에 속한 영약이다.”
“그래도 비싸겠죠?”
“비싸지.”
“얼마죠?”
내가 솔직한 가격을 광두에게 알려주었다. 한 뿌리에 구천 냥이란 말을 듣자.
“헉! 엄청나군요! 이거 어디서 캘 수 있습니까? 당장 산부터 타겠습니다. 말을 탈 때가 아니었군요!”
내가 피식 웃었다. 녀석이 제법 능숙하게 말을 타고 돌아오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무나 산에 오른다고 구할 수 있으면 이게 이렇게 비싸겠느냐?”
“하긴 그렇겠죠. 한데 이걸 왜?”
무력감을 줄여 주겠다는 말에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 너 주려고 가져온 거다. 먹어라.”
“정말요?”
“그럼 자랑하려고 보여줬겠느냐?”
광두가 펄쩍 뛰었다.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도련님 드십시오! 절대 안 됩니다!”
광두가 또 경직되었다. 예전에 객잔에서 한 방에서 자자고 했을 때도 이렇게 경직되었었다.
하긴. 먹고 자는 문제야말로 사람에게 가장 본질적인 문제일 테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이만칠천 냥짜리가 입에 들어가면 제 싸구려 혀는 녹아버릴 겁니다.”
“난 이미 먹었다. 이건 너 주려고 사온 거다.”
“그럼 더 드세요.
“더 못 먹는다.”
“네?”
“음식과 똑같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너무 많이 먹으면 오히려 탈이 나지 않느냐? 영약도 마찬가지다.”
물론 같은 의미는 아니었지만 비슷한 뜻을 담은 말이었다.
“그럼 가주님과 대부인께 드리세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따로 챙길 거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먹어.”
“그래도 이 비싼 것을.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가져다 파세요.”
“팔지 못하는 물건이다. 그러니 어서 먹어라.”
“도련님.”
광두가 한숨을 내쉬며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정말 그런 것이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운기조식을 해봐서 알 것이다. 이 영약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자신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 것인지.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사양하는 것이다. 정말 먹고 싶은 것인데도.
이런 녀석이니까 아깝지 않다.
광두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정말 먹어도 되느냐고 이번에는 눈빛으로 물었고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먹겠습니다. 먹고 더 충성하겠습니다.”
“오냐, 죽도록 충성해라.”
광두가 상자를 안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건 어떻게 먹는 건가요?”
“그냥 꼭꼭 씹어 먹으면 된다. 먹고 나면 뜨거운 기운이 몸속에서 느껴질 거다. 그때 배운 대로 운기조식을 하면서 그 기운을 혈맥으로 흡수하면 된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내가 도와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그렇다면야…… 좋습니다. 한데 한꺼번에 다 먹어요? 아님 하나씩 먹고 운기해요?”
“한꺼번에 먹어라.”
“네.”
내가 옆에 없다면 한 뿌리씩 먹는 것이 안정적일 것이다. 간혹 영약 흡수를 실패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옆에서 도울 것이니 한꺼번에 먹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광두가 우걱우걱 열심히 씹어 삼켰다.
세 뿌리가 모두 목구멍으로 넘어갔을 때, 내가 말했다.
“자, 운기조식을 시작해라.”
녀석이 운기를 시작했다.
내가 한줌의 내력을 주입해서 녀석의 몸을 살폈다.
“천천히, 침착하게.”
운기를 시작하면서 활력백시호의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내가 주입한 한줌의 내력이 녀석의 내력을 이끌면서 흡수를 도왔다.
광두는 열심히 심법수련을 했었고, 누구보다 영리했기 때문에 내 의도대로 잘 따라주었다.
스스스스슷.
최대한 많이 영초의 기운을 혈맥으로 흡수했다.
“자, 이제 차분하게 진기를 일주천해라.”
광두는 시키는 대로 침착하게 따랐다.
이윽고 진기를 삼주천한 광두가 눈을 떴다.
“다 된 건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이리 간단해요, 하는 표정이 이번에는 걱정으로 바뀌었다.
“잘 됐어요?”
내가 한숨을 내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그러자 광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 되었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잘 안 되었으면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오히려 저를 안심시키려고 웃으셨겠지요.”
이 녀석,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네 말이 맞다. 잘 되었다. 어서 단전을 확인해 봐라.”
광두가 눈을 감고 단전을 느꼈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번쩍 뜨며 소리쳤다.
“엄청난 기운이 들어있어요!”
“하하, 엄청난 기운까진 아니고. 얼마나 있느냐?”
“이게 얼마나 있는 건지 전 모르죠.”
“하긴 그렇겠구나.”
내가 광두의 단전에 손을 올렸다.
광두의 단전에 든 내력은 팔 년의 내공이었다. 세 뿌리에서 삼 년, 삼 년, 이 년의 내공을 흡수한 것이다. 혼자 복용했다면 오 년 정도 얻었으리라. 내가 도와줬기에 삼 년 내공 정도의 이득을 보았다.
“네가 팔 년을 수련해야 얻을 수 있는 내공이다.”
“맙소사! 팔 년이라고요? 정말요? 정말이죠? 다시 보니 팔 일이다, 이러실 것 아니죠? 우하하하하.”
광두가 뛸 듯이 기뻐했다.
나야 저 기분을 잘 알지. 처음 무공을 배울 때, 무공이 한 단계씩 증진될 때마다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조심해야 한다. 비록 팔 년이지만 네 초식에 내력이 깃들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을 낼 것이다. 다칠 것이 이젠 죽을 거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겠습니다.”
광두의 무공에 대해서는 일전에 자신과 함께 산에 들어가서 수련을 하다가 우연히 고수를 만나 전수받은 것으로 이야기를 해두었었다.
남해칠식의 정묘함으로 내공 없이도 야수대 넷을 죽였는데, 이젠 팔 년의 내공까지 뒷받침되었다. 소검대는 물론이고 본검대에서도 대주인 서중을 제외하고는 광두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광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한 질문 같긴 한데, 내공이 많을수록 강한 겁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내공이 두 배가 된다고 두 배로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요?”
“내공은 초식의 위력에 확실히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공의 양만큼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초식이 요구하는 최대치의 내공까지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나머지는 초식을 발출하는 사람의 초식에 대한 이해도,
체력, 심리상태, 그가 지닌 무공에 관한 심득 등 여러 가지가 영향을 미치지. 오히려 내공이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지속성이라 볼 수 있다.”
“지속성이라 하시면 더 오래 싸울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 내공이 많을수록 더 여러 번 초식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아, 잘 알겠습니다. 한데 도련님, 왜 제게 이 영약을 먹이신 겁니까?”
“그야…….”
“저를 아껴서?”
“아니. 내 배가 불러서.”
내 장난에 광두가 눈을 흘기며 물었다.
“혹시 도련님이 위험할 때, 몸을 던져서 막게 하려는 것은 아니고요?”
“싸우다보면 그런 일도 일어날 수 있겠지.”
“한마디로 고기방패군요?”
“우리네 말로는 칼받이라고도 하지. 하하.”
입을 삐죽 내미는 녀석에게 내가 말했다.
“대신 절대 죽지 않는 칼받이로 만들어주마. 고수도 다 베어버리는 그런 칼받이로 만들어주마. 나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그 말에 광두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저도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광두는 확실히 가르치고 키우는 맛이 있다.
언젠가 무인들을 가르치는 무림맹 교관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가르치는 맛이 좋은 사람일수록 성장도 빠르다고. 아마도 광두와 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광두야, 약속도 지키마.
마정수의 어느 쪽 날개를 먼저 잘라야 할지가 결정되었다.
화선노대.
이 추잡스러운 늙은이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죄 없는 이의 부모를 죽이고 어린 자식까지 죽였단 말이지?
광두야, 지켜 보거라.
내가 어떻게 이 자를 끝장내 버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