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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1)
금고의 금붙이들을 모두 처분해서 객잔으로 돌아왔을 때, 광두는 탁자에 앉아 있었다.
입구로 들어서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 멍하게 있던 녀석이 벌떡 일어났다. 반가움을 표하며 들소처럼 내게 달려올 줄 알았는데 녀석은 객잔 뒷문으로 뛰어나갔다.
“잠깐만 기다려요.”
그때 내 옆을 지나가던 점소이가 슬쩍 말을 건넸다.
“공자님 가시고, 저게 첫 끼입니다. 밤새 잠도 안자고 기다리셨어요.”
앉아 있던 탁자를 보니 돈 아낀다고 제일 싼 음식을 시켜서 먹고 있었다. 그것조차도 젓가락 한 번 대지 않은 채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점소이에게 광두가 좋아할만한 요리를 시켰다.
잠시 후 광두가 돌아왔다. 녀석의 눈은 빨개져 있었다. 나를 보는 순간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낸 모양이다.
“여기 밥도 한 그릇 추가!”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녀석을 위해서 시켰다. 혼자서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도 않을 테니까.
“이놈아, 도련님을 사지로 보내고, 밥이 넘어가더냐?”
“밥 제때 안 챙기면 속 쓰려요. 그리고 말은 바로 해야죠. 보내긴 누가 보냈다고.”
“배고프다, 밥이나 먹자.”
그렇게 둘이서 새로 나온 요리와 밥을 싹 다 비웠다.
광두가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좋네요.”
“그렇구나.”
진심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 먹고 부른 배를 쓰다듬고 있으니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문득 옆에 내려놓은 전표가 든 혁낭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 뱃속이란 것이 이렇게 한 끼 먹으면 배부른 것인데, 양기철은 과한 욕심을 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참, 아니죠?”
“뭐가?”
“혈견이 양소방주를 죽이고 재물까지 털어서 달아났다는 소문이요. 아까 왔던 무인들이 그런 말들을 나눴어요. 아니죠?”
“그런 일이 있었대?”
“아니죠? 도련님이 한 일 아니죠?”
“혈견이 했다면서?”
“그렇죠? 하긴 당연히 그렇겠죠. 도련님이 어떻게 양소방주를 이길 것이며 혈견을 이겼겠어요? 그래요. 그냥 우연의 일치죠? 마침 도련님이 갔는데, 그런 일이 먼저 벌어져 버린 거죠? 그렇기는…… 개뿔. 그런 우연한 일이 벌어질 리가 없잖아요? 대체 어떻게 하신 거죠?”
“내가 죽인다고 했잖아.”
“맙소사!”
광두가 두려운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도련님이 직접요?”
“그래. 내 손으로 직접.”
“그럼 혈견이 훔쳐갔다는 재물도 도련님이 훔쳤어요?”
“훔치다니? 보상금이다.”
“보상금요?”
“놈은 우리 부모님, 나와 너, 우리 가문의 모두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우릴 멸문시키고 우리 가문이 가진 모든 것을 뺏으려고 했지. 마음 같아선 놈의 모든 것을 다 뺏고 싶었는데.”
진심이었다. 정말 주방의 젓가락 하나까지 다 뺏어버리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었다.
“얼마나 가져왔는데요? 아뇨. 말하지 마세요. 알고 싶지도 않아요.”
“왜? 궁금하면 말해 줄게.”
“싫어요! 무서워요! 자고로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으면 제일 먼저 죽는다잖아요?”
“후후후.”
“그런 이상한 웃음 짓지 마시라고요!”
놈의 금고에서 얻은 것을 돈으로 바꾸자 정확히 삼만이천 냥이었다.
만약 양소방에 더 머물면서 이것저것 팔아치우면 훨씬 더 많은 돈을 차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냥 깔끔하게 여기서 빠지는 것이 상책이다. 괜히 욕심을 부렸다간 내 존재가 드러날 수도 있고 여러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내가 떠나기 전, 정여는 내가 벽씨검문의 망나니 후계자임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감히 나를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는 양기철과 혈견을 한 자리에서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오히려 나를 더욱 두려워했다.
그는 내가 무공을 숨기고 살아온 잠룡(潛龍)이라 여겼고, 충성을 맹세했다. 물론 난 이 충동적이면서 절박한 충성을 믿을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이용하는 정도면 충분하리라.
어차피 그도 깊숙이 개입된 이상 내가 벌인 일이란 것을 밝힐 리는 없었다.
광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양기강도 죽였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광두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왜? 그렇게 당해놓고도 놈이 불쌍해?”
“아직 어린놈이잖아요?”
“스무 살이면 애 아니다. 그리고 옳고 그른 일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 어리든 늙었든, 죽을 짓을 했으면 죽어야 지.”
굳이 나를 죽이려 한 일을 제외하더라도, 놈이 시비들에게 한 짓만 해도 충분히 죽어 마땅했다.
“그렇긴 하지만요.”
착해서 그렇다. 나는 광두의 이 선함이 좋다. 호의가 약점이 되고 선함이 어리석음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었기에, 그래서 더욱 좋다.
“너 때문에 죽인 것 아니야. 그날 놈은 나를 죽이려고 했어. 그 복수를 한 것뿐이야.”
혹시나 모를 마음의 짐을 덜어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따라 나와라.”
나는 광두를 데리고 객잔 뒤쪽 숲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걸어들어가 인적이 없는 곳에 마주섰다.
두려운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며 광두가 물었다.
“마지막 말을 남겨야 할 순간인가요?”
“그렇다면?”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너를 죽이려는 사람에게 감사는 무슨.”
“그래도요.”
농담이었지만, 광두는 반쯤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이대로 죽인다 하더라도 감사했다는.
“광두야.”
“네, 도련님.”
“이제부터 네게 무공을 가르쳐 줄 생각이다.”
광두의 얼굴에 놀람과 격정이 뒤엉켰다. 아마도 나를 만난 이후 가장 놀란 반응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냥 흉내만 내는 무공이 아니라, 진짜 무공 말이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시죠?”
“그래, 진심이다.”
“백월검법은 독문무공이라서…….”
“당연히 네게 전수할 무공은 다른 무공이다. 네가 배워도 되는.”
잠시 고민하던 광두가 입을 열었다.
“제가 배우고 싶다 하더라도, 무공을 배우기에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올해 스물다섯입니다.”
“그건 내게 맡기고.”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다. 하지만 가르치는 사람이 나다. 시기가 늦은 단점쯤은 상쇄할 수 있다.
“신중히 생각하고 대답해라. 네 인생이 바뀌는 것은 물론이고 목숨이 오가는 결정이니까. 내게 무공을 배워보겠느냐?”
광두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배우겠습니다.”
“그렇게 결심한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느냐?”
“당연히 도련님 때문이죠. 도련님이 달라지시고, 또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저도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저도 변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련님, 저도 도련님처럼 변하고 싶어요.”
“하나만 더 묻자.”
“네.”
“왜 내게 이렇게 잘해주느냐? 이전의 나는 쓰레기 같은 놈이었는데.”
“그 이전도 있었으니까요.”
“뭐?”
“어려서는 좋은 사람이었거든요. 저한테도 잘해주시고.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제가 열다섯, 도련님이 열 살 때였어요. 그때 제가 많이 아팠었죠. 열이 펄펄 끓어서 정신을 잃었으니까.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도련님이 제 이마에 찬 수건을 덮어주고 계셨어요. 전 아직도 그때 도련님의 걱정하는 눈길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누구도 제게 그런 진심어린 눈빛을 보낸 적이 없었지요.”
“둔한 녀석이네. 그깟 일에 잡혀 살다니.”
“누군가에는 그깟 일이, 또 누군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일이 되기도 하니까요.”
광두가 해맑게 웃었다.
막연히 쓰레기라고만 생각했던 벽리단에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니? 조금은 의외란 생각이 든다.
“제가 배울 무공은 어떤 무공입니까?”
천하제일인으로, 그리고 무림맹주로 평생을 살아온 나다. 괜찮은 무공을 여럿 알고 있었다.
그 중에서 내가 광두에게 전수할 무공은 바로.
“남해칠식(南海七式)이다.”
“남해칠식!”
광두가 몇 번이나 그 말을 반복했다.
광두가 차고 있던 도를 보고 떠올린 무공으로 위력에 비해 쉽게 익힐 수 있고 오래 전에 실전 되어 강호에서 이 무공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는 장점도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전하는 구결을 외우도록 해라.”
우선 남해칠식의 심법부터 전수했다. 확실히 광두는 총명했다. 몇 번 반복해서 알려주자 구결을 완벽하게 외웠다.
“똑똑하네.”
“이 정도는 보통이죠.”
저도 제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기쁜 표정을 지었다.
다음으로 혈도와 내력에 대해 설명해주었고 그 구결을 운용해서 운기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총명한 광두는 실제 가르쳐 준 것을 잘 이해했다.
“당분간은 심법부터 착실히 수련하자. 아마 제대로 운기하려면 적어도 열흘은 걸릴 거다. 초식은 이후에 가르쳐주마.”
전생에 제자를 두지 않은 나는 한 번도 누군가를 정식으로 가르쳐본 적이 없다. 그래서 조금 긴장되고 흥분된다.
“하루아침에 고수가 될 수 없다.”
“그렇겠지요. 마당을 청소하는 것도 관록이 필요한 일인데.”
“지금 기분이 어떠냐?”
“좋습니다. 날아갈 것만 같습니다.”
“이 기분을 잊지 마라. 네가 처음 무공을 배우던 바로 이 순간을.”
그 말을 하면서 나는 나의 처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처음 무공을 배울 때의 그 감격스러운 순간을. 너무나 오래전이지만 아직도 생생한 그 날을.
흔히 가르치는 것에서 얻는 것들이 있다고 한다. 가르치는 과정에서 마음의 우물은 넓어지고 더 맑고 깊은 물이 찬다고 한다.
과연 광두를 가르치면서 내가 얻게 될 것들은 무엇일까?
“한데 지금 이 고마운 상황에서 드릴 질문은 아니지만…… 이 무공은 언제 배우셨어요?”
“예전에 우연히 배울 기회가 있었다.”
광두가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대체 언제, 어떻게, 왜, 묻고 싶은 것이 많겠지.
녀석아, 포기해라. 앞으로 네가 보고 겪게 될 일들을 생각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이제 너는 내 몸종이 아니다. 이제부터 너는 내 수하다.”
광두의 얼굴에 격정이 스쳤다.
“이제 제가 도련님의 오른팔이군요.”
“그럴 수도 있고…… 새끼손톱이 될 수도 있고.”
“아뇨, 제가 오른팔 합니다. 도련님 옆에 제가 있어야죠. 죽도록 노력해서 그 팔, 제가 하겠습니다.”
광두가 넙죽 절을 올렸다.
“강호인들은 무공을 배우게 되면 이렇게 절을 한다면서요?”
“오냐. 절 잘 받으마.”
광두를 제자로 삼을 생각은 전혀 없다. 수하에게 한 수 가르쳐 준 것에 가깝다. 그래도 고마움의 절 정도는 받아도 되겠지.
이번 여정에서 나는 세 가지 성과를 거뒀다.
양소방이란 후환을 없앴고, 거금을 얻었으며, 가장 중요한 광두라는 충성스러운 수하를 얻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