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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소방(1)
광두가 자신이 한 옆으로 치워둔 눈더미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쌓여있는 눈보다 훨씬 많죠.”
그리고 그 빚의 결과는 쌓인 눈의 불편함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원래 검대도 세 개나 있었어요. 점점 규모가 줄어들면서 지금은 하나로 통합되었지만요. 하인들과 시비들의 숫자도 반 이상 줄었고요. 잘 모르긴 해도 요즘도 재정이 상당히 어렵다고 들었어요. 정말이지 미꾸라지 한 마리가…….”
광두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결과적으로 서중이 말한 ‘나 때문에 가문 전체가 힘들다’는 것은 아주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내용을 말한 것이었다.
“월봉이 밀렸겠군.”
“아직 월봉이 밀리진 않았습니다. 가주님이 저희들 월봉만큼은 최우선적으로 챙겨주셨으니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원래라면 올라야 할 월봉이 오르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 가문이 쇠락하면서 이곳 출신이기에 얻을 수 있는 이점도 줄어들 것이다. 결국 난 그들의 미래를 좀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웅덩이는 내가 흐렸다고 치고. 넌 다 저녁에 웬 난리냐?”
“돈 빌려준 사람이 오는데 깨끗이 해야죠. 저 바쁘니까 나중에 얘기해요.”
광두가 뛰어갔다. 바삐 대화를 마무리 짓는 느낌이 들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양소방의 소공자가 광두 오라버니를 때렸어요.”
돌아보니 시비 한 명이 서 있었다. 이름이 송희였던가? 아주 착한 아이라고 광두가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놈이 광두를 때렸다고?”
어제 그 재수 없었던 면상이 떠올랐다. 그 자식이 감히 광두를 때려?
“네. 예전에는 꼼짝도 못했는데. 우리 가문이 기울어지자 온갖 위세를 다 부리고 있죠.”
“광두는 왜 때렸지?”
“마당에 쓰레기가 버려져 있었다고요. 게으른 하인 놈은 얻어 터져야 한다고요. 하지만 그 쓰레기는 그 공자가 버린 것이라고요! 양공자는 그냥 우리 광두 오라버니를 때리고 싶었던 것이라고요!”
광두가 이 늦은 저녁에 왜 청소를 한다고 난리인지 알 수 있었다.
송희는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분해하고 있었다. 광두를 많이 좋아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혹시 그 자리에 나도 있었나?”
그러자 송희가 나를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이미 그 행동으로 대답이 되었다.
“술에 취하셔서…… 킬킬대고 있었어요.”
젠장. 망할, 병신 머저리 같은 새끼. 때린 양기강보다 벽리단에 대한 분노가 더 치밀어 올랐다.
“왜 내게 이런 말을 해주는 거냐?”
“어제 광두 오라버니가 그러더라고요. 도련님이 좋게 변하고 계신다고. 이제는 믿을 수 있을 것 같다고요. 전 아직은 도련님을…… 믿진 못하겠어요. 하지만 광두 오라버니 말은 믿어요.”
그 말을 끝으로 처음으로 발휘한 송희의 용기가 모두 떨어졌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뒤돌아 뛰어갔다. 눈물이 앞을 가렸는지 넘어질 뻔 했는데,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 부산히 비질을 하고 있는 광두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마음이 울컥해진다.
“너는 그런 일을 당했는데도 나를 이렇게 좋게 대해주고 있었구나.”
* * *
그날 밤에 양소방 사람들이 방문했다.
호위무인까지 이십여 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그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원래 다른 가문에 늦은 시간에 방문하는 것은 크게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상대를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거나 일부러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부득이 늦은 시간에 오게 되면 인원을 최소로 오는 것이 상식.
양기철이 느긋하게 걸어오며 아버지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하하, 잘 지내셨소? 벽문주.”
“밤길에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양방주.”
아버지가 좋은 얼굴로 그를 맞았다.
예전에는 아버지를 벽대협이라 부르며 버선발로 뛰어왔다던데, 이젠 호칭도 바뀌고 뒷짐에 팔자걸음을 걷는다고 했다.
인간관계에 있어 상대방을 판단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어려운 상황에 빠져보는 것이리라.
양기철을 뒤따라 들어오는 무리 중에 양기강도 있었다.
녀석이 나를 발견하자 제 눈을 가리키며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눈깔에 힘을 빼란 뜻 같았다.
나를 향한 무례는 참을 수 있다지만…… 이놈이 광두를 때렸단 말이지?
양기철이 아버지에게 묻지도 않은 말을 먼저 꺼냈다.
“하북팽가(河北彭家)의 팽문도(彭紋都) 대협 아시지요?”
“당연히 알지요.”
“이번에 본장이 팽가과 손을 잡고 새롭게 일을 벌이게 되었소. 그래서 그분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오. 하하하.”
“오! 그러셨군요.”
“내가 팽대협에게 우리 벽문주 이야기를 잘해두었소.”
과연 그랬을까? 아니라고 본다.
양소방주 양기철은 아들만큼이나 첫인상이 좋지 못했다.
난 전생을 통해 강호의 온갖 수장들을 만나보았다. 대리석처럼 차갑고 매끄러운 거대 문파의 수장부터 어떻게든 눈에 띄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작은 소문파의 수장들까지. 따라서 권력에 가까이 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많이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첫 느낌이 좋지 않은 자는 반드시 그 느낌을 설명할 행동을 하곤 했는데, 양소방주가 딱 그런 부류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크하하하. 아시지 않소? 우리 벽문주 챙겨주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것을.”
생색을 내는 눈빛과 행동 하나하나에 숨길 수 없는 천박한 거드름이 느껴졌다.
“자, 자세한 말씀은 들어가서 나누시지요.”
“그럽시다.”
아버지와 양기철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를 비롯해 여럿이 양기철에게 인사하러 나와 있었는데, 그는 이쪽으로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뭐, 차라리 이편이 낫다.
저런 인간이 와서 어른행세라도 할라치면 정말 짜증이 날 테니까 말이다.
검대주 서중이 양소방 무인들을 접객했다.
다행히 그쪽 무인들의 책임자는 서중에게 무례하지 않았다. 오히려 존경심을 표하며 깍듯이 대했다.
나는 그 이유를 광두를 통해 들은 바 있다.
셋이었던 검대가 하나로 줄어드는 과정에서 여러 일들이 있었다고 했다.
가세가 기울자 다른 두 검대주는 돈을 더 준다는 다른 문파로 떠나버렸다. 하지만 서중은 끝내 떠나지 않고 아버지에게 충성을 바쳤다.
당시에 다른 문파에서 가장 원했던 사람은 서중이었다고 한다. 평생 벌어도 못 벌 액수를 제안했지만 서중은 모두 거절하고 우리 집안에 남았던 것이다.
모두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존경하는 것이리라.
“어이, 또 만났네.”
어제의 비호감이 건들거리며 내게로 걸어왔다. 자신에 대한 내 감정이 분노로 바뀐 줄도 모르고.
단전의 내공이 꿈틀거린다.
개 패듯이 패버리고 싶은 욕망이 치밀어 올랐다. 한창때의 나였다면 일단 아구창부터 날리고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집안을 생각해서 한 번은 참기로 했다. 놈을 팬 이유가 밝혀지면 돌고 돌아 광두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었고.
광두야, 미안하다. 이번 한 번만 참고 넘어가자.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광두는 한 옆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놈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다시 화가 버럭 났다.
젠장.
더 있다간 정말 사고 치겠구나.
“왔으니 밥이나 먹고 가라.”
양기강에게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고 그냥 돌아섰다. 그러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이죽거림.
“하여튼 거지새끼들이 자존심은 강하지. 새끼야, 헛소리 집어치우고 돈이나 갚아. 이만 냥이나 되는 돈을 어느 세월에 다 갚을래?”
이만 냥. 한 중소문파를 재정난에 이르게 할 충분한 액수다.
대체 무슨 사고를 쳤기에 이만 냥이나 되는 돈을 빌려야 했을까?
“콱 그냥 낭인시장에 내다 팔아버릴까 보다. 하긴, 그래봤자 열 냥이나 받겠나마는.”
모두가 있는 자리였기에 본가의 무인들이 인상을 굳혔다. 하지만 나서서 그를 제지하거나 나무랄 수는 없었다. 자신들이 모시는 쪽도 못지않은 놈이었으니까.
내가 돌아서지 않은 채 되물었다.
“네게 진 빚은 아니잖아?”
“이 새끼가? 아직도 네가 산동제일방파의 후계자인줄 아느냐?”
“아닌 줄 안다.”
“뭐?”
“내가 쓰레기인줄 안다고.”
지켜보고 있던 서중이 눈을 반짝였다. 긴가민가한 내 변화에 조금 더 힘이 실리는 순간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인정하는 모습을 처음 봤을 테니까.
더는 말을 섞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뒤에서 애처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꺄아악!”
돌아서니 양기강이 한옆에 서 있던 송희를 억지로 안으려 하고 있었다.
“네 쓰레기 주인이 안 놀아 주니, 너라도 놀아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