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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천마-2화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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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하다(2)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번에는 낯선 노인 한 명이 내 옆에 있었다. 얼굴에 곰보 자국이 가득했으며 체구가 왜소했는데  두 눈에 깃든 기운만큼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 역시 내 평생에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맙소사! 아직도 꿈이 안 깼다?

이렇게 생생한 꿈을, 그것도 이렇게 연속적으로 꿔본 적이 없었다.

마치 내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노인이 곧장 입을 열었다.

“부끄러운 줄 알게.”

내가 알아야 할 것은 그게 아니다. 대체 왜 이런 꿈을 계속 꾸는 것이지?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벽에 걸린 동경을 바라보았다.

아까 봤던 그 청년의 얼굴이다.

이번에는 조금 더 자세히 얼굴을 살펴보았다.

군데군데 멍이 들고 상처가 나 있었지만 제법 잘 생긴 얼굴이었다. 두 눈에 담긴 것은 철부지들의 그것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새파란 치기.

그리고 앞서 나를 때렸던 여인을 똑 닮아 있었다.

정말 그녀는 이 청년의 어머니구나.

“그녀는…….”

“그녀?”

“아니오.”

“아니오?”

내 말이 버릇없이 느껴졌는지 노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상대의 불쾌감이 이렇게나 생생하게 전달되는데, 이게 꿈이라고?

손을 내밀어 나를 덮고 있던 이불을 만져보았다. 천의 촉감이 생생하다.

“어제 일은 정말 실망스러웠네.”

“아무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이 청년의 삶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노인은 걱정 대신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그래, 자네다운 말이군. 자넨 책임이라곤 모르니까.”

그 말에 화가 났다. 내가 아니라 이 청년에게 한 말임을 알았음에도 화가 났다.

전생의 나는 맹주로 살면서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상벌은 명확하게, 복수는 확실하게, 어려운 일에 있어 상황을 탓하지 않고, 부하의 충성에 의지하지 않으며, 책임져야 할 일은 반드시 책임진다.

나는 내가 져야 할 책임을 남에게 미룬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사람이니까 싸움에 질 수도 있고, 한심한 짓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책임감은 있어야지?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다.

내 얼굴이 굳어진 것을 보자 노인은 방귀뀐 놈을 보듯 한심하게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넨…… 이 가문의 수치네.”

노인은 문을 꽝 닫고 방을 나가버렸다.

이놈은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눈을 뜨자마자 얻어터지고,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일까?

갑자기 피곤함이 밀려들었다.

그래, 자고 일어나면 원래대로 돌아가겠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자고 일어나면 맹주로 깨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녁에 깨어났을 때 여전히 나는 낯선 청년의 모습이었다. 창가로 들어오는 붉은 빛 노을은 더 없이 몽환적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꿈이 아니다.’

그래, 분명 꿈이 아니었다. 아무리 깊은 꿈에 빠졌다고,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설마 주화입마에 빠진 것일까?

하지만 이런 주화입마가 있다는 것은 생전 들어본 적이 없다. 무공과 관련해서 내가 모르는 것이 있던가?

주화입마의 증상도 아니다. 그렇다고 환각 따위는 더욱 아니다.

나는 지금 이 청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전 삶인 천하진의 모든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한마디로 다른 사람으로 환생을 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

칠십 평생 강호를 살아오면서 온갖 믿기 어려운 일들을 겪었지만, 환생이라니?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빛 노을을 머금은 뭉게구름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이 질문이 더욱 간절하게 느껴졌다.

왜 내게 이런 일을 겪게 하는 것이오?

백 번 양보해서 환생을 했다고 치자. 어떻게 전생을 모두 기억하게 된 것일까? 천하제일인이자 무림맹주 천하진으로 살았던 지난 일들이 모두 다 또렷이 기억났다.

죽기 얼마 전부터 기억력이 엉망이 되었다.

그것을 보상하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젊은 뇌의 위력인 것일까? 이제는 모든 것이 다 떠올랐다. 오래전 일들 하나하나까지 모두 또렷이.

백표가 아들을 낳던 날, 그의 모습이 기억난다.

한껏 상기된 얼굴로 기뻐하던 그의 얼굴이. 눈가의 주름까지 생생히 기억난다. 이렇게 다 기억나는데, 그의 아들 나이를 잊었다고? 아들인지 딸인지를 잊었다고?

이제와 생각하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시에는 약에 취한 것처럼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다시 말해 내 죽음이 정상적인 죽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누군가에 의해 암살당한 것인가?

그렇다면 이 환생은 복수를 하라는 하늘의 배려인가?

……그게 아니라면?

나는 방 앞마루에 걸터앉아서 담 너머 지고 있는 석양을 쳐다보고 있었다.

낯선 얼굴, 물 먹은 솜처럼 무겁기만 한 몸, 낯선 공간과  낯선 사람들.

모든 게 낯설다.

눈을 감았다 다시 뜨면 맹주전의 태사의 일 것만 같은데. 저 문을 열고 갈사량이 일거리를 잔뜩 들고 들어설 것만 같은데.

그때 문이 열리며 누군가 그곳으로 들어섰다.

이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유들유들한 인상의 사내였다.

“어? 깨어나셨네요.”

지금까지 이곳 앞으로 몇 사람이 지나갔는데, 모두 형식적으로 꾸벅 인사만 하고 달아나듯 지나갔다. 말을 걸고 다가온 사람은 처음이었다.

사내가 걸어와서 내 옆에 앉았다.

“그러게 제가 뭐랬어요? 아무리 여자라고 해도 절대 못 이긴다고 했죠? 이름난 사부 밑에서 오 년이나 수련을 했다잖아요? 제발 다음에는 제 말 좀 들으시라고요. 도련님 업고 뛰어오는데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길까봐 무서워죽는 줄 알았어요.”

“너 누구냐?”

“들었어요. 기억 잃은 것처럼 연기했다면서요? 뭐, 다들 믿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잘 하셨어요. 안 그랬으면 대부인께 맞아 죽었을 거예요. 이럴 때 보면 잔머리 최곤데, 그날은 왜 그렇게 상황판단 못하고…… 아뇨, 아닙니다. 도련님이 순수하신 거죠.”

“다시 묻는다. 너 누구냐?”

“그리고 도련님, 이번 기회에 본격적으로 무공수련 좀 하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여자한테 터지고 다니는 것은 좀 아니잖아요?”

“마지막으로 묻…….”

“광두(光頭)요, 광두! 재미없어요! 기억 잃은 척 그만하시고요!”

“광두? 미친대가리?”

“알면서 왜 그래요?”

“정말 이름에 미칠 광자를 썼어?”

놀란 얼굴로 녀석을 쳐다보자 그제야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당연히 아니죠. 빛날 광자지요. 미친 대가리는 도련님이 나 놀려먹으려고 하던 말이고. 오늘따라 왜 그러세요?”

“나, 정말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이런 장난 재미없다니까요.”

“진짜야.”

“정말요?”

반신반의한 녀석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잠시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쳐다보던 녀석이 넌지시 물었다.

“예전에 제가 빌려준 돈 생각나요?”

“얼만데?”

“두 냥요.”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인지라 당장 주머니를 뒤져서 두 냥을 건넸다.

내 손 위의 돈을 응시하던 광두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맙소사! 정말 기억이 안 나시나보네요.”

“왜?”

“도련님은 빌린 돈은 절대 안 갚는 분이시니까요.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머리를 정통으로 맞으신 겁니까?”

“그런 것 같아.”

“종 어르신이 뭐래요?”

“누군데? 아까 그 늙은이?”

“헉! 아무리 천방지축이래도 종 어르신은 무서워하셨는데. 정말 기억 안 나나 보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듣다 보면 기억이 날 수도 있을 테니까. 아까 그 늙은이는 누구지?”

“본가의 의원이자 총관이십니다. 가주님의 의형이시기도 하고요.”

“가주라면 우리 아버지?”

“…… 왜 이러세요? 저 이제 진짜 무서워지고 있어요.”

“의형제를 맺기에는 아버지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던데?”

“강호인에게 나이는 중요하지 않는 법이라면서요?”

“누가 그래?”

“사해(四海)는 동도(同徒), 아닌가요?”

사해동도 같은 소리 하네. 그것은 강호의 좋은 면을 극대화한 말일 뿐이다.

강호인만큼 따지는 것이 많은 부류도 없다. 나이 따지고, 사문 따지고, 계파 따지고, 실력 따지고, 남녀 따지고, 선후배 따지고, 출신지역 따지고. 직계냐 방계냐, 검을 쓰느냐 도를 쓰느냐, 좌수냐 우수냐, 외공이냐 내공이냐, 심지어 무복의 색깔과 문양까지 일일이 따지는 족속이 강호인이다.

“기억이 안 난다니까 뭐라고 하셔요?”

“안 믿어주더군.”

“하긴.”

“그 늙은이 반응이 영 심드렁하던데 대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뭐부터 얘기해요?”

사고를 친 것이 한두 개가 아닌 모양이다.

“최근 것부터. 일단 왜 다친 거지?”

광두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송소저 만나러 갔다가 거절당하고. 화 버럭버럭 내다가 술에 취해서 다시 찾아가서 난동을 부렸죠. 그러다 송소저 나오고, 송소저에게 막말하다가 개 맞듯이…… 휴.”

“송소저가 누구지?”

다시 광두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송소저가 누구냐고요?”

“그래, 누구냐?”

“송화린(宋華璘). 송가장의 후계자. 산동(山東)에서 최고로 아름다우신 분이죠. 똑똑하고 무공도 강하시고. 정말 완벽하신 분인데 딱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시죠.”

“뭔데?”

“도련님이 약혼자라는 것요.”

“뭐?”

“두 분은 태중혼약(胎中婚約)을 맺었어요.”

태중혼약이 이뤄지는 경우는 두 가지다. 부모들끼리 정말 친하거나, 혹은 정략적인 결정이거나.

“정말이지 남편 복이 지지리도 없는 거죠.”

“평소에 내가 널 자주 때렸나?”

광두가 흠칫 놀랐다.

“아, 아뇨. 왜 그런 말을 물어보시는 거죠?”

“네 말을 듣고 있으니까 이상하게 손이 근질근질해서.”

광두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도련님과 저의 관계는 태중혼약 이상의 끈끈함을 지니고 있죠.”

“전혀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청년이 이 광두와는 허물없이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데 왜 그녀에게 맞았지? 태중혼약을 맺었다면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냈을 것 같은데.”

“어려선 그랬죠. 둘이서 정말 잘 놀았어요. 한데 오 년 전에 아가씨가 멀리 청해(靑海)로 무공수련을 떠났어요.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았죠.”

“그 사이 그녀 마음이 변했군.”

“그 사이 도련님도 많이 변하셨죠.”

광두가 아쉬움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전에 친 사고는?”

“사기도박에 걸려 큰돈을 잃기도 했고, 기녀에게 빠져서 돈도 많이 갖다 바치고, 술 먹고 싸우고, 무공수련 싫다고 가출도 하고, 강호 공적을 잡으려고 설쳐대다가…….”

“거기까지.”

더 듣지 않아도 이 녀석에 대해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고작 뒤통수 한 대 때리고 마셨어?”

나 같으면 자식이 아니라 뭐라도, 반쯤 죽여 놨을 것이다.

“한마디로 나 어떤 사람이냐?”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나요?”

“이럴 때 해. 기회다.”

“쓰레기죠.”

문득 내가 죽던 날, 갈사량에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그날 갈사량은 이렇게 대답했다.

“강호 그 자체이시죠.”

하루아침에 강호의 영웅에서 인간쓰레기가 되어 깨어났다.

쓰레기란 말을 하고선 몇 발짝 후다닥 멀어졌던 광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는 것이 이상한 모양이었다.

“정말 죽다 살아나긴 한 모양이네.”

비슷하지만, 틀렸다.

난 정말 죽었다가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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