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생하다(1)
마지막이자 첫날이었던 그날, 느지막한 오후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깃털처럼 날리는 눈을 바라보며 함께 있던 백표(伯豹)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맹주님! 첫눈입니다.”
백표는 맹주전 호위 책임자로 내가 신임하는 두 사람 중 하나다. 그는 사십대의 나이에도 ‘순수’란 단어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첫눈이 내리는 순간을 보면 그해 운이 좋거든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거기에는 올해도 무사히 살아남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누가 알겠는가? 과거 흑천궁(黑天宮) 칠요사(七妖邪)의 합공을 막아낸 무림맹 최고의 호위무인인 그에게 이렇게 감상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그래, 첫눈이구나!”
애써 감탄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지만 솔직히 무덤덤했다.
이제 ‘첫눈’이란 말에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
올해 내 나이 칠십.
처음이라는 떨림이 화석처럼 굳어버린 내 감정을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이리라.
눈을 보면…… 설원에서 내가 죽였던 이들만 생각날 뿐이다. 새하얀 눈 위에 피를 흘리며 죽어간 그들이.
휘이이잉.
흩날리던 눈발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오늘 날씨가 맑을 것이라고 호언했던 천문관주(天文館主)는 한 며칠 나를 피해 다닐 듯싶다. 첫눈은 내달이나 되어야 내릴 것이라더니.
“명이 놈, 지금쯤 좋아서 방방 뛰고 있겠네요.”
명이는 백표의 자식이다.
“올해 세 살이지?”
그러자 백표가 살짝 당황한 기색을 비쳤다.
“올해 여섯입니다.”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내가 놀란 이유는 뒤늦게 혼인해서 낳은 그의 늦둥이 나이를 기억하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니었다.
불과 며칠 전에 똑같은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불현 듯 떠올라서다.
그때도 난 아이가 세 살이냐고 물었었다.
치매 걸린 노인네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할 수가 있지?
“벌써 그렇게 컸군. 미안하네.”
백표는 섭섭함 대신 나를 걱정하는 기색이 얼굴에 가득했다.
“괜찮습니다. 본래 남의 집 자식 크는 것을 보며 세월 가는 것을 느낀다지 않습니까?”
백표는 그날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이제 확실히 기억난다.
‘대체 요즘 왜 이러는 걸까?’
근래에 자꾸 지난 일들을 잊어버리곤 한다. 특히 요 근래는 그 증상이 더 심해졌고, 기력도 예전 같지 않다. 심한 고뿔에 걸린 것처럼 몸이 붕 떠다니는 느낌이 자주 들었다.
혹시 중독을 의심해서 진기를 일으켜 몸 내부를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아무 이상도 없었다.
내가 모르는 병이라도 걸렸나 싶어 신의(神醫)에게 진맥이라도 받아볼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좀 더 두고 보기로 마음먹었다.
무림맹주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맹은 물론이고 전 강호가 들썩일 테니까.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러시게.”
내 사정이야 어쨌든 백표에게 미안했다. 항상 나를 호위하며 지켜주는 사람인데, 이런 실수를 연속해서 하다니.
당장에 아이 옷이라도 한 벌 사줘야겠다. 그런데…… 아이가 여식이었던가? 사내였던가?
젠장. 기억나지 않는다.
욕이라도 내뱉고 싶은 심정으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세지는 눈발에 마치 내 기억처럼 세상이 하얗게 덮여가고 있다.
“…… 죽을 때가 된 건가?”
천하제일인인 내가? 그 최고의 자리를 사십여 년이나 지켜온 내가?
오후에 총군사 갈사량(葛思量)이 업무보고를 위해 맹주전에 들었다.
평소처럼 맹 내의 여러 사안을 보고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창밖만 보고 있었다.
갈사량은 내 기분이 저조하다는 것을 눈치 채고 평소보다 빨리 보고를 마쳤다.
“……나머지는 보고서에 있습니다.”
“수고했네.”
“그럼 이만.”
돌아서 나가는 그를 불렀다.
“갈군사.”
“네, 맹주님.”
“난 어떤 사람인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말 그대로네. 자네가 보기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한 번 정의를 내려 보게.”
내가 갈사량을 향해 돌아보았다. 나를 도와 중원일통이라는 대업을 달성한 그의 평가가 궁금했다.
“제 말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갈사량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 강호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이지요.”
맹주전 내부 사방 벽에는 내 지난 삶이 기록되어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열다섯 번의 싸움. 이젠 강호의 역사로 남은 내 지난 발자취.
내 나이 스물아홉에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올랐다.
그해 검제(劍帝), 도제(刀帝), 권왕(拳王)이 연속해서 내게 무릎을 꿇었다.
무신(武神) 천하진(千河進).
이십대의 끝자락에 내가 얻은 이름이다.
그로부터 칠 년 후, 난 서른여섯의 나이에 무림맹주의 자리에 올랐다. 삼십대의 나이에 무림맹주가 된 것은 무림맹이 생긴 이래 내가 최초라고 했다.
최초가 주는 자부심. 그 뿌듯함에 취해 이후 삼십사 년을 무림맹주로 살아왔다.
내 삶은 치열했으며 화려했다.
맹주가 된 후 오랜 세월을 싸움터에서 보내며 사마외도를 무찔렀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하지만 결국 난 무림맹의 오랜 숙원을 이뤄냈다.
사파의 집합체인 흑도십삼맹(黑道十三盟)을 산산이 부쉈고 마교의 후신인 혈천신교(血天神敎)를 무너뜨린 것이다.
그렇게 강호의 평화를 지켜낸 후에도 내 삶은 바빴다.
적은 외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외부의 적이 사라지자, 내부의 적이 생겨났다.
절대권력을 차지하고자 하는 자들이 내 음식에 독을 탔고, 밤에 살수를 보내왔다.
하지만 난 죽지 않았고 반란을 꿈꾸는 자들을 모두 베어 넘겼다.
나는 우아하고 품위 있는 절대자로 남고 싶었지만 현실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었으니까.
강호인들은 나를 철혈(鐵血)의 맹주라 불렀고, 배신자는 가차 없이 베어버렸기에 징벌(懲罰)의 맹주라고도 불렀다.
모두들 내 앞에서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맹주님께서는 이 강호의 절대자시고 협의(俠義)와 무(武)의 상징이십니다. 나아가 이 강호 그 자체이십니다.”
그래, 이것이 나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기분이 처지는 것일까?
갈사량이 조금 걱정스럽게 덧붙였다.
“혹 어디 편찮은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는 오랫동안 나를 지켜본 사람답게,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괜찮네.”
“그럼 쉬십시오.”
갈사량이 대청에서 물러났다.
홀로 남은 난 태사의에 깊이 몸을 파묻었다.
강호 그 자체라. 그래, 강호인으로 태어나 이런 말을 들어봤으니 더 바랄 것이……
“끅!”
태사의에 앉았을 때 갑자기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내 몸을 내가 조율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온몸의 힘이 증발되어 사라져 버리는 것 같은 나른함이 나를 뒤덮었다.
‘일단 한숨 자고나서 생각해…….’
난 결코 알지 못했다.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임을.
천하제일인의 마지막이 이렇게 허무하고 덧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올 리 없다고 여겼으니까. 꽃잎 몇 개 떨어진다고 꽃이 지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나의 마지막은 배신자들에게 둘러싸여 미친 듯이 싸우다, 멋지게 죽기를 바랐으니까.
하지만 네 삶은 여기까지라는 듯, 세상이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 * *
눈을 떴을 때, 낯선 천장이 보였다.
‘이곳은 어디지?’
뒤이어 코를 찔러오는 진한 약향.
‘의방?’
내가 쓰러진 것인가? 그런 모양이다.
미리 몸 안 챙겼다고 갈군사에게 잔소리 좀 듣겠군.
몸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 낯선 이질감을 느꼈다.
‘뭐지?’
자연스럽게 내 독문심법인 천무호심결(天武護心訣)을 일으켰다.
단전에 가득한 내공이 온몸을 보호하며 퍼져나갔어야 했는데…… 몸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사 갑자의 내공이 가득 차 있어야 할 단전이 텅 비어 있었다. 아니, 내공이 있긴 있었다. 정말이지 내공이라 하기에도 뭣한 미약한 것이.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아파서 쓰러질 수는 있다. 하지만 내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산공독(散功毒)? 그럴 리가.
특히 내가 익힌 천무호심결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내 몸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해주는 천하제일의 심공이었다. 산공독 따위가 먹힐 리 없다.
내공이 텅 비고 심법이 작용하지 않는 이 낯선 느낌은 쇠붙이에 살과 뼈가 잘리는 것보다 더 기분이 더러웠다.
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의 움직임 역시 너무나 낯설었다.
여긴 어디지?
무림맹의 의방이 아니었다. 맹주 전용 의방의 십분지 일도 되지 않는 작은 방이었다.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한마디.
“깨어났구나.”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중년남녀가 나란히 서 있었다.
여인이 걸어오더니 내 손을 잡았다.
“괜찮으냐?”
물론 괜찮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대는 누구요?”
내 목소리 역시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나를 보고 그대가 누구냐고 물었느냐?”
“그렇소.”
“그렇소?”
여인의 입꼬리가 점점 말려 올라갔다. 뒤에 서 있던 중년사내가 재빨리 말했다.
“참으시오, 부인.”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인이 사정없이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따악!
“싹싹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지금 뭐? 그대는 누구시오? 네, 알려드립지요. 누구 걱정하느라 밤새 뜬 눈으로 보낸 이 불쌍한 년은 바로…… 니 애미다! 이 불효막심한 놈아! 그게 어미에게 할 소리더냐?”
붕.
다시 여인의 주먹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어느새 달려온 중년사내가 여인을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그 주먹에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았을 것이다.
“참으시오! 기절했다가 일어나면서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오!”
“차라리 죽어! 이 머저리, 등신, 팔푼이 같은 놈아!”
원래라면 이 상황에서 ‘이런 무엄한 것들을 봤나?’ 라는 말부터 나왔겠지만, 나는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 맞아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이것저것 다 떠나서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무례를 따질 여유조차 없는 황당한 상황이었다.
꿈인가?
하지만 꿈이라기에는 이 상황이 너무나 생생했다. 방금 전 얻어맞은 머리통은 정말 아팠다.
그때 무심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벽에 걸린 작은 동경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줄만 알았다.
동경 안에는 난생 처음 본 청년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게 나라고?
아, 역시 꿈이구나!
안도감이 드는 동시에 의아함이 밀려들었다.
뭐 이런 개꿈을 이렇게 생생하게 꾸나?
다음 순간 현기증을 느끼며 다시 쓰러졌다. 귓가에서 울려 퍼지는 여인의 야단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